수영 팬티를 입어야 들어간다?

2012. 2. 24. 18:09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나는 수영을 전혀 못한다. 어려서 위험하다고 아예 물가에 가서 놀지도 못하게 하셨던 할아버지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우리 동네에는 수영을 할 만큼 넓은 개울이 없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수영을 할 수도 배울 수도 없었다. 우리 동네에는 그저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놀 정도만 되는 물이 흘렀고, 넓고 깊은 곳이 없어 대체적으로 우리 마을 아이들이 수영을 잘 하지 못한다. 대개 강가나 바닷가에 사는 아이들이 수영에 익숙한 것은 어려서부터 넓은 물가에서 놀았기 때문일 거다.

 

장곡면에 긴 골짜기가 없다. 예전에 오서산에 나무가 울창했을 때는 내원사 고랑이 제법 깊었었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우리 집 앞으로 흐르는 냇물이, 광천의 상류라는 것이 이상할 만큼 작은 개울로 변해 있었다. 그런 냇가를 가로 질러 막아 물을 저장하게 만든 게 보()였다. 보는 냇물을 논으로 보내기 위해 물을 가두는 것으로 성벌 윗말에 두 개, 아랫말에 두 개가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런 보들도 큰 것은 그 깊이가 2미터 가까이 되는 것들도 있지만 우리 성벌의 보는 물이 많을 때라야 겨우 1미터 정도가 될까 말까 했다.

 

그래도 보는 물을 가두어 놓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냇가에서는 제법 넓은 곳이었다. 대부분 돌로 넓게 둑을 쌓아 그 돌 틈에는 굵은 물고기들이 많이 살았고 뱀장어도 큰 것들이 있었다. 산골 아래서는 대부분 이런 보를 막아서 물 관리를 했었다.

 

우리 마을 아이들은 여름철에 이런 보에서 놀았다. 수영을 했다기보다는 멱을 감았다고 해야 맞다. 수영을 하기엔 광성리 냇가의 보들이 비좁았다. 난 서울에 와서 수영장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지만 한 번도 가지는 않았다. 수영도 못하지만 그 수영장을 보니 꼭 대중목욕탕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지 않았다. 거기다가 수영 팬티가 없으면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까지 수영 팬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 어릴 때는 수영 팬티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몰랐었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냇물에서 멱을 감았지만 그게 천연의 수영장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 곳에서 자랐으니 인공으로 만든 수영장이 목욕탕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래에 반바지 하나만 입고 다닐 때라 벗고 들어가면 끝이다. 우리끼리 멱을 감으니 수영팬티를 입고 말고 할 것도 없었고 그 시절에 우리 마을엔 반바지 속에 팬티를 입은 아이도 없었다.

 

우린 멱 감을 때 여자 남자가 철저하게 나뉘어서 했다. 여자들은 대개 우리보다 아래쪽 보에서 멱을 감고 놀았다. 우리 또래는 주로 윗말의 보를 이용해서 멱을 감았다. 용배 아래로 우리 약방 논과 용배 논 사이에 있는 보는 넓지는 않았어도 깊은 곳은 1미터가 넘어서 그런대로 고추를 가릴 만큼은 되었기 때문이다.

 

아주 어린 애들이야 남녀가 함께 놀았지만 초등학교 갈 때쯤 되면 남녀가 유별한데다가 길가에서 보면 아래가 다 보이는 곳이니 그래도 물이 좀 깊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냥 반바지와 런닝셔츠만 벗으면 알몸이 되었고 냇가에 벗어 놓은 채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요즘 애들에게는 물속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 운동을 하라느니, 먼저 몸을 물에 적신 다음에 들어가야 한다느니 얘기를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것이 전혀 필요 없었다. 그냥 물에 뛰어 들어가도 아무 탈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비가 와서 물이 많이 불으면 길가에 있는 콩잎을 따서 귀를 막았고 가끔 코도 막았다. 콩잎으로 코를 막으면 콩잎의 그 신선한 냄새가 머릿속까지 파고들었다. 헤엄을 전혀 못 치는 아이는 드물었지만 헤엄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 발로 장구치고 나가는 개헤엄이었다.

 

나이를 좀 더 먹은 형들이 장난을 하느라 애들을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서 손을 놓으면 허우적거리면서 몇 번 발장구치면 물가로 나올 수 있으니 헤엄 잘 치는 것이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한 30여 분 놀고 나면 입술이 파래져서 물가로 나오고, 여름 땡볕에 달구어진 큰 돌 사이를 왔다, 갔다하면 다시 땀이 흘렀다.

 

물속에서 놀다보면 가끔 귀로 물이 들어가기도 했었다. 이럴 때는 손가락으로 귓속을 후비기보다는 볕에 달궈진 납작하고 뜨거운 돌을 양 귀에 대고 옆으로 젖혔다 세웠다 하면 그 돌 위에 물이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에 돌을 귀에 대고 하는 소리가 뜨거운 물 나와라, 찬물 나와라였다. 물속에서 놀아도 물이 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고 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때는 귓속에 물이 들어 있는 것처럼 소리가 나고 그러면 돌을 대고 물이 나오는 것을 확인했었다.

 

나이가 웬만큼 든 형들도 더울 때는 우리들과 같이 멱 감으러 다녔지만 여자들은 나이가 들면 주로 저녁에 다녔다. 저녁에는 어른들도 같이 다녔기 때문에 근처에서 얼씬거리다가는 크게 혼날 일이었으나 들킬 위험을 무릅쓰면서 여자들 멱 감는 장면을 보러 다니는 팀들도 있었다.

 

나는 이런 일에 무척 소극적이었지만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형들 몇은 이런 일에 적극적이었다. 다른 일에는 나이 든 형들도 나를 자주 데리고 다녔으나 이 일만큼은 많이 몰려다니면 보안 유지가 안 되어서 그랬는지 가자는 권유가 없었다.

이가 좀 들어서는 성벌 보에서 멱 감는 것보다 광제 위에 있는 말 샘이나 도드래미 앞에 있는 옻 샘으로 다니기를 좋아했다. 말 샘은 왜 말 샘이라고 부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벌에서 1킬로미터 조금 더 되는 광제 윗말 냇가에 있었다. 냇가 산 속에서 물이 나오는데 돌 위를 누가 팠는지 도랑이 있고 그 돌로 된 도랑 위로 물이 흘러 나왔다. 겨울에는 얼지 않을 만큼 온기가 있었지만 여름에는 다른 물보다 훨씬 차가웠고 깨끗했다.

 

물이 사람이 들어갈 만큼 큰 것은 아니었으나 워낙 차가워 몇 번 끼얹으면 더위가 싹 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괜히 폼 잡느라고 다닌 것 같다. 동네 냇물도 차갑고 깨끗했으므로 굳이 거기까지 가서 멱을 감을 필요까지는 없었던 거였다.

 샘은 논으로 된 들판 한 가운데 있었다. 1.5미터 정도의 깊이를 가진 우물이었다. 도드래미동네 앞이었고 물의 깊이는 1미터쯤 되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물이 아주 차가워 몸에 옻이 올랐을 때에 이 물로 목욕하면 낫는다고 했다. 나는 옻이 여러 번 올랐었지만 그것 때문에 이 옻 샘에 간 적은 없다. 낮에 가기는 창피하고 밤에 혼자 가기는 무서웠기 때문이다.

 

낮에 가서 혼자 옷을 벗고 거기 들어간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일 수가 없기도 했지만 내게 옻이 오르는 시기가 초봄이었던 까닭도 크다. 다른 사람들은 나무를 하다가 옻이 오르거나 부엌에서 불을 때다가 옻나무를 잘못 만져 옻이 오르니 초여름이 지나고서 옻이 오르는 일이 많았지만 나는 옻순을 먹고 옻이 오르는 것이라 이른 봄에 옻이 올랐다. 그러니 옻이 올라도 옻 샘에 갈 수가 없었다.

 

여름에 아주 더우면 몇 사람씩 모여서 이 옻 샘에 갔었다. 들판 가운데에 있으니 오며가며 바람을 쏘이지, 물이 아주 차갑지, 게다가 그 앞산이 다들 가기를 꺼려하는 북망산이어서 소름끼치는 생각도 들었으니 이리로 멱을 감으러 갔다가 오면 더울 리가 없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