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8:00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우리 동네 아래 마을 새뜸에 서로 친구인 선생님 세 분이 계셨다. 새뜸 큰 당숙은 고등학교에서 상업을 가르치시다가 대천여고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셨고, 김동구 선생님과 황낙순 선생님은 초등학교에서 계시다가 정년퇴임을 하셨는데 세 분이 한 동네 친구시다.
당숙은 일찍이 밖으로 나가시어 조치원에 오래 사시다가 대전으로 이사하신 지 20여 년이 지났으니 이젠 대전 분으로 얘기해야 맞을 거다. 황낙순 선생님도 우리 초등학교 시절 조금 뒤에 홍성으로 이사하시어 쭉 홍성에서 사셨으니 홍성 분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김동구 선생님은 새뜸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김동구 선생님은 학교 은사님이기 전에 동네 어른이셨다. 선생님은 경주 김씨 집안에서 항렬이 높아 어디를 가나 ‘대부’로 대접을 받으셨다. 성격이 괄괄하시고 조금이라도 잘못된 일은 참지 못하시어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기가 어려웠던 거 같다. 그래서인지 젊은 시절에 학교를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시다가 다시 시험을 쳐서 학교로 들어오신 특이한 경력을 갖고 계셨다.
선생님은 만득자(晩得子)라고 들었다. 예전에는 집안에 반드시 아들이 있어야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내가 어릴 때도 그랬지만 선생님이 태어나기 전에는 더욱 심했을 거였다. 선생님 댁에서는 아들을 두지 못해 걱정이 크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선생님이 태어나시어 어르신들이 무척 기뻐하셨고 아주 귀하게 키운 아들이라고 들었다. 그렇게 귀하게 태어나신 선생님도 늦게까지 아들을 두지 못해서 걱정을 하시다가 따님을 넷 둔 뒤에 막내로 아들을 낳으셨다. 그때 선생님이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사모님은 우리 동네 성벌이 친정인데, 두 분의 중매는 우리 아버지가 하셨다고 들었다. 선생님이 오서산 아래에서 집안의 어른 대접을 받으면서 학교에 근무한다고 밖으로만 나도시니까 집안일은 모두 사모님 차지였다. 내가 깊이는 알 수가 없지만 선생님이 크게 술을 마시거나 다른 일에 돈을 쓰시지는 않았다 해도 여러 자제를 가르치고 집안 돌보는 일이 수월치만은 않았을 것 같다. 시골살림이라는 것이 나올 곳은 없고 쓸 곳은 많기 때문이다.
황낙순 선생님은 우리가 4학년 때 한 달인가 우리 담임을 맡으신 적이 있지만 김동구 선생님은 우리 2회를 담임하신 적이 없다. 오서에 오래 계시면서 다른 후배들은 담임을 하셨어도 우리 2회는 맡지 않으셨다. 그래도 오서초등학교의 가을 운동회를 할 때면 기마전이나 기둥 높이기 등 고학년 단체 게임은 어김없이 선생님이 맡아하셨다.
그 시절에는 학교의 가장 큰 행사가 가을 운동회였다. 여름 방학이 끝나면 바로 연습에 들어가서 보통 오후 수업은 다 제쳐두고 운동회 연습만 했었다. 학생 수가 많은 학교는 그래도 나았겠지만 우리처럼 한 학년에 한 반이나 두 반인 곳은 아이들이 겹치기로 여러 종목을 해야 했다. 남학생들은 덤블링, 기마전, 기둥 높이기 등을 했고 여학생들은 소고놀이 부채춤 같은 단체 운동을 하느라 쉴 틈 없이 운동장에서 땀을 흘렸다.
운동회 연습은 아이들만 힘든 것이 아니다. 한 선생님이 여러 종목을 맡아서 연습해야 하니까 선생님들도 쉴 겨를이 없었다. 그 때는 초등학교 운동회가 학교와 지역사회를 위한 가장 큰 행사였다. 도시에서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시골은 어디나 다 비슷했다. 학부모와 지역 주민을 다 초청해 놓고 하는 큰 잔치에 볼거리가 시원찮으면 안 되니까 오후 수업을 전부 쉬며 연습에 몰두 했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나 선생님에게나 아주 고된 일이었다.
그런 운동회 연습을 할 때에 늘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 김동구 선생님이셨다. 여자 선생님이 맡은 종목이라 해도 아이들을 집합시키고 정렬을 해서 준비하는 과정은 모두 선생님 몫이었다. 아이들을 확실하게 통제를 할 수 있으려면 연세도 드시고 완력도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선생님은 김동구 선생님밖에 없었다.
오서초등학교의 학군은 광성리, 오성리, 화계리, 신풍리, 죽전리였다. 그 학군 내에서 김동구 선생님을 모르는 학부형도 없었고, 선생님이 모르는 학부형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학교의 궂은일은 모두 선생님이 해야 했으니 아이들에게 인자한 모습이나 자상한 인상으로 남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궂은일을 하면서 좋은 얘기를 듣는다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게 더 속이 편한 일일 거다.
당장 우리들만 해도 늘 동네에서 뵙는 분이 학교에서 선생님이라는 것이 크게 실감나지 않았다. 동네 어느 집에 큰 일이 있어서 잔치를 먹으러 가면 선생님과 마주치기 일쑤였다. 동네 어른으로 뵙고 학교에 오면 선생님으로 뵈니 아무래도 한 말씀이라도 더 듣게 되고, 그렇게 만나서 좋은 얘기보다는 꾸지람에 가까운 말씀만 들으니 애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선생님의 성격은 다정다감하시지 않았다. 우선 목소리부터가 쟁쟁한데다가 가문에서도 높은 항렬이다 보니 어딜 가나 큰 소리로 말씀을 하셨다. 게다가 옛날 어른들은 세세한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앞뒤를 살펴 본 뒤에 얘기해도 되는 것을 먼저 큰 목소리로 나무라기가 일쑤였으니 그때 아이들이라 해도 잘 따르지 않았다.
아버지와 선생님은 10여 세 조금 더 차이가 나신다. 10여 년은 그리 큰 차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선생님이 아버지께는 아주 깍듯이 예의를 지키셨다. 선생님 어르신과 아버지는 연차가 많이 나셨어도 거의 친구처럼 지내셨고, 아버지는 선생님 장인어른과도 아주 가까우셨고 당신 친구인 새뜸 당숙의 장형(長兄)이라 더욱 어려웠을 거다.
김동구 선생님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 집에 가끔 오시어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곤 하셨다. 선생님이 어린아이였을 적에 한 동네에 살던 어머니가 많이 업어주셨다고 들었다. 그런 인연도 있지만 선생님이 교직을 그만두고 방황하실 적에 아버지가 여러 차례 위로와 격려 말씀을 주셨다고 한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선생님은 가끔 뵈올 수 있었다. 명절 때 새뜸 할머니 댁에 가면 바로 옆집에 사시어 뵐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 큰 일이 있어 내려가면 선생님이 꼭 와 계시어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선생님은 오서에 오래 계셨고, 장곡과 광천 등지의 학교로 옮겨 다니시며 근무하시다가 평교사로 정년퇴임을 하셨다. 퇴임을 하신 뒤에는 소일거리로 지관(地官) 일을 하셨다고 한다.
사모님이 병환으로 돌아가신 뒤에 혼자 집을 지키시던 선생님이 병환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새뜸에 갔다가 들었다. 서울에 와서 경후, 명숙이와 부천 순천향병원으로 뵈러 갔다니 병이 많이 진행되어 쾌차가 어렵다고 들었다. 선생님은 많이 좋아져서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좋아하셨지만 따님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뒤라 뭐라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할 지 몰랐다. 그저 예전의 오서초등학교 시절 얘기를 하다가 돌아왔다.
얼마 지난 뒤에 다시 병원으로 갔더니 이틀 전에 퇴원을 하셨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병세가 악화되어 더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았다. 그 사흘 뒤에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이 오서초등학교카페에 올라 경후하고 둘이 조문을 갔다. 우리 2회는 담임을 하신 적이 없지만 우리도 오서초등학교의 이름으로 조화를 올렸다.
우린 그때 오서초등학교 총동문회 구성도 못한 때였고, 지금처럼 조직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것도 쉽지 않을 때였다. 오서초등학교가 이미 분교로 내려앉은 뒤라고 하지만 김동구 선생님만큼은 오서초등학교장(烏棲初等學校葬)으로 모셨어야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선생님이 훌륭하셨다 해도 제자가 똑똑치 못하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 것도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의 일을 보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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