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까중 할아버지

2012. 2. 28. 18:05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내가 어릴 때 우리 성벌에는 이발소가 없었다. 성벌에 이발소가 없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광성리에 없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머리를 깎으려면 장곡 도산리나 광천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 나갔다가 머리를 깎고 오는 것은 큰 일이 아니지만 머리를 깎기 위해 일 삼아 나간다는 것은 어른이나 애들에게나 귀찮은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예전에는 명절 때가 되면 애고 어른이고 다 머리를 깎아야만 되는 줄 알던 시기라 이런 때에 이발소에 가면 사람들이 밀려들어 몇 시간씩 기다리다가 겨우 깎곤 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 성벌에는 이동 이발소 비슷한 게 있었다. 반계 어디에서 사신다는 그리 늙지 않으신 할아버지가 이발 기계를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 머리를 깎았던 거다. 우리 집에서는 까까중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연세가 많으시지는 않았지만 항렬로 할아버지가 되신 거였다. 이 할아버지는 두 달에 한 번 꼴로 우리 집에 오시어 사랑방에 묵으시며 동네 어른, 애들 머리를 다 깎아 주셨다. 요즘 이발소에서는 볼 수도 없는 기계지만 손잡이가 나무로 된 두 손으로 머리를 깎는 기계로 머리를 깎으셨다.

 

그 기계가 이가 빠진 것인지, 솜씨가 서툰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머리카락이 잘리지 않고 뜯기어 눈물이 찔끔찔끔 나게 아팠다. 어른들 머리에는 가위를 댔는지 모르지만 아이들 머리는 언제나 박박 밀어 주셨다. 하기야 그때는 머리가 길면 보기 흉하다고 걱정을 들을 때니 박박 미는 것이 여러모로 나았을 거였다.

 

지금 애들은 머리도 자주 감고 비누, 샴푸, 린스 등을 써서인지 머리에 병이 없지만 그 시절에는 세수 비누가 아닌 빨래 비누로 머리를 감아서인지 아이들 머리에 기계충이니 도장 병이니 하는 병이 많았다. 기계충은 머리가 헐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병으로 한 점에서 시작하여 동심원 모양으로 퍼져 갔던 병이다. 그런데 이 기계충에 걸리면 재봉틀 기름(윤활유?)을 발랐다.

 

나는 이런 병을 한 번도 앓아 본 적이 없지만 아이들이 기계충에 걸리면 대부분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 집에 재봉틀이 있어 재봉틀 기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장병은 마치 도장을 찍어낸 것처럼 머리가 빠지는 병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원형 탈모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까까중 할아버지가 어떻게 우리 집에 다니게 됐는지는 어머니도 자세히는 모르셨다. 아버지가 주선하시어 다니셨다고 하는데 머리를 깎아주고 돈으로 받았던 것이 아니라 1년에 두 차례, 보리 철에 보리 한 말, 가을에 벼 한 말씩을 받아가셨다. 이 할아버지가 곡식을 받아 가실 때가 되면 아버지가 얘기해서 걷어 놓았다가 머슴 아저씨 편에 장곡까지 가져다주게 하셨다.

 

나는 그 할아버지가 성벌 사람들 머리만 깎은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들으니 새뜸과 상풍 사람들도 와서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작은 당숙들이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 내가 잘못 안 것은 아닐 거다. 어떠면 그 할아버지는 우리 오서산 아래뿐이 아니라 다른 곳에 가셔서도 성벌에서처럼 이동이발소를 하셨는지 모른다.

 

까까중 할아버지는 지관(地官) 일도 하셨는데 증조모 산소와 할아버지 산소를 잡으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아버지 산소 자리도 잡으셨다. 새뜸 할아버지께서는 까까중 할아버지가 잡은 자리를 늘 못마땅해 하셨고 그 바람에 돌팔이 지관이 아닌가 하는 말도 들었다. 왜냐하면 산 아래 좋은 자리 다 못보고 산꼭대기만 찾아서 묘를 쓰라고 했기 때문이다.

 

증조모 묘소와 할아버지 묘소는 이미 이장(移葬)을 하였고 아버지 묘소도 이장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그 할아버지가 잡은 묘소는 다 이장하게 된 셈이니 돌팔이였다는 얘기가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까까중 할아버지가 성벌에 오시기 힘들게 된 것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쯤 성벌 공회당에 이발소가 생겨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이 변했으니 연세가 드신 분들은 모르겠지만 젊은 사람들은 돈보다도 머리를 얼마만큼 멋있게 깎아주느냐 하는 것이 더 관심사였으니 그런 노인들이 어떻게 젊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으랴?

 

성벌에 이발소가 생기게 된 것은 내가 장곡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어디서 이사를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나와 같은 학년인 종국이라는 아이네 집이 공회당 한쪽에 흙벽돌로 공간을 만들어 이발소를 했었다. 공회당에 세를 들어 살면서 종국이 형이 이발을 했다. 이발소라야 의자 세 개가 전부이고 한쪽에 머리를 감을 수 있는 세면대를 만들어 놓은 것뿐이다. 지금이야 이발비가 꽤 올랐다고 해도 8000원에 불과하지만 그 시절에는 10원 안팎이었다.

 

그 공회당에 붙어 있던 공간은 내가 2학년 때 오서분교의 교무실이 되었으니까 종국이네가 거기서 살다가 떠난 것은 한 2년 밖에 안 되는데 떠난 뒤로는 한 번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아마 우리 동네서 그 집 식구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몇 되지 않을 거다.

 

그 뒤에 학교가 있으니까 이발소가 다시 생겼다. 윗말 올라가는 길목에 삽다리에서 온 철성이 형이 이발소를 지은 거다.

나는 철성이 형하고는 나이 차가 열 살도 더 나지만 나를 많이 귀여워 해줘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 무협지를 좋아하는 것이 서로 같았고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잘 대해 줘서 나도 잘 따랐다.

 

철성이 형은 나중에 이발소를 팔고서 삽다리로 이사를 갔는데 그 뒤에 온 사람들은 머리 깎는 기술이 부족했는지 잘 안되다가 두어 사람 거친 뒤에 이발소가 없어졌다.

 

버스가 성벌에 까지 들어오니 사람들이 광천이나 장곡에 나가서 이발을 하니 동네 이발소가 필요 없게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