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2012. 2. 28. 18:07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약간은 과장된 얘기겠지만 고모들이 모이면 하시는 말씀이 성벌에서 우리 밥 안 먹고 산 집이 어디 있느냐는 거였다. 나는 어렸을 때의 일이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집이 큰일을 할 때는 이웃집 어른들이 애들을 데리고 와서 밥을 많이 먹었다. 우리 집이 크게 부잣집은 아니었으나 먹는 것 가지고 따질 만큼 야박한 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서 군에 갈 때까지는 해마다 머슴 아저씨들이 있었다. 내가 군에 가면서 논농사는 남에게 소작을 주었지만 그 전에는 얼마 안 되었어도 어머니가 혼자서 지을 수가 없어 1년 단위의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었었다. 광성리 1구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머슴을 두고 산 집은 우리밖에 없었던 것 같다. 만중이 형네나 선교네도 머슴을 두었지만 그것은 우리보다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내 기억으로 타 지역에서 머슴으로 왔던 분도 여럿 있었지만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에 와 머슴살이를 했던 분이 더 많다. 결혼을 하시고 가정을 가진 분들도 많이 있었고, 총각으로 와서 산 사람도 여럿 있었다.

 

내가 어릴 때는 일 년 사경이 쌀 여섯 짝이면 상머슴이었다. 요즘에 생각한다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임금이지만 쌀 여섯 짝을 받는 사람도 드물었다. 우선 쟁기질에 능해야 했다. 다른 것도 잘해야 했지만 소를 부릴 줄 모르면 상머슴이 될 수 없었다. 우리 성벌에는 쟁기질을 할 만한 소가 몇 마리 되지도 않았지만 다른 집에 소를 빌려 줄 때도 머슴 아저씨가 함께 가서 해야 될 때가 많았다.

 

어른들이 우리 집에 머슴으로 들어오면 그 집 식구들도 대부분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 집에 와서 돕고 밥을 먹고 가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다른 고장으로 머슴을 가는 것보다는 같은 마을인 우리 집이 백번 나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머슴 사시던 분들이 연세가 들어가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쯤에는 젊은 머슴은 보기 드물었고 보통 50이 넘은 사람들이 머슴을 살았다.

 

젊은 사람들이 와서 일을 하면 내가 좋았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들을 부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어른들이 와 계시면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다른 동네에서 온 젊은 사람들은 내가 부탁하면 물고기를 잡아다 준다든가, 나무로 칼을 깎아 준다든가 하는 작은 일들을 잘 해주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늘 남에게 잘 해주시는 성격이셨고, 나도 온순한 편이어서 우리 집에 머슴으로 오는 분들은 사람 관계에서는 아주 편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어떤 집들은 머슴을 하인 부리듯 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머슴을 살게 되면 대개는 그 집에서 먹고 자고 하였지만 우리 집에서 머슴을 사는 동네 어른들은 대부분 집에 가서 주무시고 아침 일찍 오기도 하였다. 저녁에도 늦도록 잔 손일을 하였지만 집에 가서 자는 것이 더 편하면 그렇게 해도 괜찮았다.

 

드물에서 소개받아 왔던 아저씨가 한 2년 우리 집에 있었다. 이 아저씨는 집에 다니러 가면 하루, 이틀씩 안 와서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 하시었다. 게다가 성깔도 있어 하기 싫은 일은 잘 안 하려 해서 두 해 살고는 그만 두었다.

 

대부동 고모가 소개해서 반계 쪽에서 오신 분이 한 2년 우리 집에 있었다. 연세도 지긋하시고 자상한 분이셨으나 술을 많이 드시는 것이 흠이었다. 늘 나에게 존댓말을 쓰셔서 내가 무척 미안해했다. 내 조카인 형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막걸리를 가지고 심부름을 가면 아저씨가 형호에게 막걸리를 먹여 이 녀석이 취해 비틀거리며 논둑길을 걸어오곤 했다고 한다. 형호는 그 맛에 심부름을 더 열심히 했을 거였다.

 

상풍 당숙이 소개해서 온 새말의 어떤 아저씨는 성질이 불끈하는 편이었다. 그 성질 때문에 봄에 와서 여름에 그만두어 우리 집 머슴으로는 가장 짧은 기간을 살고 갔다. 어머니가 뭐라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하셨는데, 별 얘기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집으로 가서는 오질 않는 거였다. 그때는 내가 방학이라 집에 와 있다가 정 그럴 것이면 그만두라고 통보했더니 우리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려고 했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니 누가 온들 내 힘으로 못 당하겠는가? 나하고 밀고 당기고 하다가 안 되니까 아래채 헛간에 걸어둔 쇠스랑을 들고 덤벼들었다. 나는 그때 마루 밑에 있던 작은 도끼를 꺼내 들었지만 서로 그것으로 치지는 못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뜯어 말렸기 때문이다.

 

이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내가 쇠스랑에 찔렸어도 그렇고, 내가 도끼로 찍었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그런 일이 발생했더라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대형사고가 될 뻔 했다. 다행히 아무 사고 없이 끝났고 그 뒤로는 우리 집에 와 행패 부리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던가 겨울철에 밖에서 애들과 놀다가 오른팔에 금이 간 적이 있었다. 처음엔 아버지가 아시면 꾸중을 하실까봐 말도 못 꺼냈으나 팔이 점점 부어오르고 아파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이 이슥해질 무렵에 어머니가 알게 되셨고 동네에서 방법이 없어 광천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 머슴 아저씨가 나를 업고 광천까지 나가셨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머슴살이가 언제부터 없어졌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이 머슴살이는 예전의 노비하고는 많이 다른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완전히 없어져 소설에서나 볼 수 있을 거다. 1년 단위로 계약을 하고 그 계약기간 중에는 거의 하인처럼 부렸던 것이 머슴이다.

 

이런 머슴 제도는 노비제도가 사라진 다음에도 노비였던 사람들이 관행적으로 옛 주인집 일을 도왔던 맥락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 도시에서는 이런 머슴이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농사를 짓는 곳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고 또 노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갈 곳도 없고 땅도 없어 그냥 먼저 살던 집에 붙어살면서 일을 도운데서 온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나중에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계약으로 발전했을 거였다.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사람이 몇 년 착실히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 웬 만큼의 돈을 모을 수가 있었다고 하나, 1년 사경을 받은 것을 노름판에서 며칠 만에 다 쓸어 넣고 마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예전에는 머슴들이 사경을 받을 때가 되면 시골 사랑방에 전문꾼들이 모여 이 순진한 사람들 돈을 다 먹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리 집에서 1년 사경이 열두 짝까지 되었을 때 이후부터는 머슴을 두지 않고 논을 남에게 주어 짓게 했다. 그리고 그 때 쯤에는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할 사람들도 다 없어졌다. 정 상황이 안 되면 도시로 떠날망정 남의 집 머슴살이는 안 하려 했고, 여러 기계들이 도입되면서 머슴을 두지 않고도 농사일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머슴을 살던 아저씨들도 이젠 연세가 드시어 거의 세상을 떠나셨고 그런 옛날이야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