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8:10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어머니는 남에게 싫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언성을 높이실 때도 없었다. 늘 작고 부드러운 일관된 음성으로 말씀을 하셨다. 다른 사람과 다투시는 일을 본 적도 없지만 우리들에게 거친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말이 거칠기로 유명하지만 이건 순전히 군에서 습관이 된 거였다. 훈련소 조교시절에 괜히 폼을 잡기 위해 욕설을 퍼 붇던 게 남아서 학교에서도 거친 말을 하지만 나도 집에서는 욕설을 쓴 적이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6학년 2학기가 되면서 나는 방종한 생활을 했다. 담임선생님이 갑자기 전근을 가시고 다른 선생님이 우리를 맡은 뒤에 통제 불능이 되면서 나도 거기에 휩쓸려 정말 막나갔던 거다. 그때에도 어머니는 크게 꾸짖지 않으셨다. 여러 소문을 듣고 오신 새뜸 당숙께서 내게 걱정의 말씀을 주실 때에도 어머니는 다른 말씀을 보태지 않으셨다.
내가 대학을 갈 때도 어머니는 내가 내린 결정에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결혼하기 위해 지금 집사람을 만났고 어머니 생신 때에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도 좋아하시기만 하셨지 다른 말씀을 주지 않으셨다. 한 겨울에 우리 집으로 인사를 하러 찾아온 집사람이 서울에서 첫 차를 타고 광천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을 때에 추위에 떨었다고 걱정을 하셨을 뿐 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내가 결혼을 하고서 일주일 뒤에 어머니는 고향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오셨다. 어머니께서나 나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이미 칠순에 가까우신 연세이셨다. 서울 생활이라는 것이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말씀들 하시지만 어머니는 전혀 그런 내색을 않으셨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내가 힘들어할까봐 그러셨을 거다.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늘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다. 내가 늦게 들어오는 게 어머니께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집사람에게는 불만스러웠을 거다. 그 문제로 집사람이 잔소리를 하면, 어머니께서는 ‘남자가 바깥일을 하다보면 늦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며 나를 역성들어 주셨다. 아들이 더 가까워서가 아니라 예전에 아버지 때를 생각하시며 그런 말씀을 하셨을 거다.
내 입맛에 가장 맞는 음식은 어머니가 하신 거였다. 어머니께서는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하셨다. 내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맛에 익숙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거는 우리 음식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나 할 얘기였다. 우리 고모님들이나 당고모, 당숙, 외가식구들 다 어머니 음식에는 군말씀이 없었다. 자랑 같지만 어머니 음식 솜씨는 어디 가서 자랑해도 충분하다고 자신한다. 어머니는 충청도의 음식 맛을 정확하게 내셨다. 너무 특특하지 않고 크게 진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담백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은근한 맛, 이런 맛이 충청도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결혼하고서 처가에 가면 우리 음식과 맛이 달라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라 우리 애들도 그렇다. 요즘 애들은 친가보다 외가에 더 익숙하다고 얘기하지만 우리 애들은 그렇지 않다. 할머니 음식이 외가보다 훨씬 낫다고 얘기한다. 집사람이 처가의 음식보다 우리 음식에 더 익숙한 것은 어머니가 워낙 잘 하셔서 스스로 배우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술도 아주 잘 빚으셨다. 우리 집안의 술이 다 맛이 좋다고 인정을 받고 있지만 어머니가 빚은 동동주는 정말 어디에 가서 자랑할 만했었다. 지금도 아쉬운 게 집사람이 어머니의 술 빚으시는 솜씨를 배우지 못한 거다. 지금은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예전에는 밀주라고 해서 불법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술을 빚을 생각을 못 했었다.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빚은 술은 우리가 집을 사서 집들이를 할 때에 빚은 술이니 돌아가시기 몇 년 전의 일이셨다. 어머니는 그때 좋은 누룩을 구할 수가 없다고 걱정을 하셨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랬어도 마시는 사람들마다 술맛이 좋다고 극구 칭찬을 했다.
어머니께서 서울에 오셔서 늘 하신 말씀이 ‘손주 낳는 것을 보고 돌아갔으면 좋겠다.’셨지만 결혼하고 바로 애를 갖지는 못했다. 먼저 나은 아이가 딸이라 내가 무척 낙심을 했을 때에 어머니께서는 ‘아기하고 산모가 건강하면 되었지 무엇을 더 바라느냐’고 말씀을 주셨다. 그 뒤에 아들을 낳아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혜경이와 용범이는 어머니께서 다 키우신 거다. 집사람이 처음부터 직장을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집에서 아이를 보는 일은 어머니가 더 잘하셨다. 아이가 자라면서 어머니의 바람은 혜경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거를 보시고 돌아가셨으면 으로 조금 연장되셨다. 혜경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 ·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도 어머니는 건강하셨다.
어머니께서는 혜경이나 용범이에게도 싫은 말씀을 전혀 안 하셨다.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말씀을 하신 적도 없고 꾸지람을 하신 적도 없으셨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집에서 큰소리를 낸 적이 없다. 우리 애들이 어른들에게 얼굴을 붉히거나 큰소리로 대꾸를 한 적이 없다는 게 내가 자랑하는 일이다.
어머니는 서울에 오셔서 20여 년을 지내시다가 어느 날 거짓말처럼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여든여덟 생신을 받으시고 그 이틀 뒤에 돌아가셨다. 어머니 생신이라 시골 큰 누님과 노량진 넷째 고모님, 청주 막내 고모님이 집에 오셨고 아우네와 같이 생신을 모셨고 손님들은 그 다음 날에 다 가셨다. 나는 학교에 나가지 않은 겨울방학 이었지만 학교에 보충수업을 하러 가야 해서 새벽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있었고 용범이는 나보다 먼저 학교에 간 아침이었다.
혜경이는 교회수련회에 가 있었고 집에는 어머니와 나, 집사람만 있었다. 내가 아침밥을 먹을 때에 어머니께서 같이 드시기 때문에 밥 차려 놓은 것을 보고 어머니께 진지 잡수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내가 방에 들어가서 누워 계신 어머니를 흔들어 깨우려했는데 아무 기척이 없어서 놀랐다. 집사람을 소리쳐 불렀더니 바로 들어와서 보고는 119로 전화를 했다. 5분이 채 안돼서 구급대가 와서 확인하더니 어머니께서 운명하셨다고 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은 울었지만 크게 슬프지가 않아서 민망했다. 남의 집 장례식에 가서 상주가 울지 않더라고 얘기했던 나인데도 눈물이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적에 그 끝없는 울음 때문에 무서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어머니의 돌아가심에 나는 눈물이 안 나와서 부끄러웠다.
내가 어머니께 불효한 거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만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이 가치(假齒)를 안 해드린 거다. 어머니는 치아가 좋지 않으셔서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시질 못하셨다. 서울에 올라오신 뒤에 어금니가 다 상하셨다고 치과에 모시고 가셨는데 그냥 뽑기만 하셨던 거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당신이 얼마를 더 사시겠냐면서 이를 안 하셨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길래 그런가보다 했지만 그 후로 10년을 넘게 사셨다.
어머니는 채소보다는 고기를 더 좋아셨는데 치아가 부실하여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셨을 거라 생각하면 정말 후회가 된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의 십분 지 일만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면 만고의 효자가 된다고 했으니 바로 이런 데서 나온 말일 게다.
책을 내고 처음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한 것이 못내 송구스럽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사람들 불러 놓고 어머니께 자랑하는 것 같아서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다가 노량진 고모님께 한 말씀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도 서운하셨을 거라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깝다.
어머니는 평생을 남에게 베풀기만 하셨다. 우리도 넉넉한 편이 아니었지만 넉넉지 못한 사람들의 어려운 얘기를 들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내가 이만큼이나 앞가림을 하며 사는 게 전부 어머니께서 남에게 베푼 덕이라고 확신한다.
어머니 연세만큼 사시면서 건강하신 분도 많다고 하지만 어머니도 그 연세까지 건강이 좋으셨다. 주변에 많은 분들이 치매로 고생하시고 더러는 뇌졸중으로 힘들어 하셨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던 날까지 전혀 그렇지 않으셨다. 어머니께서 평소에 많은 음덕을 쌓으신 덕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도 존경하는 분이지만 어머니는 더 대단하신 분이셨다.
. 나는 내가 어머니께 좀 더 자상하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늘 아쉽다. 어려서부터 ‘남자다움’을 스스로 강조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나뭇가지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를 아니하고,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을 이제야 실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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