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 20:43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우리 집은 광성리 25-3이었다. 아주 한적한 시골 마을에 어떻게 번지가 나누어져 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하지만 이것은 특이한 일로 생각되었다. 대청마루가 넓었던 본채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머슴 아저씨가 거처하기도 한 사랑채, 그리고 외양간과 광으로 구성된 헛간이 ㄷ자 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잿간과 돼지 집은 각각 독립되어 헛간 뒤쪽에 자리 잡았다. 집이 뒷동산 끝자락에 있었으나 산과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동산의 형태가 호랑이 형국이라 우리 집이 그 발치에 있어 개가 잘 안 된다는 얘기가 있었다.
언제부터 이 집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난 이 집에서 태어났다. 담장 안으로 채소밭이 두 군데 있어 큰 쪽은 마늘, 고추 등을 심었고, 돼지집 앞의 작은 밭은 오이, 호박 등을 심었다. 큰 밭가에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심었던 대추나무가 무척 크게 자라 있었고 제법 큰 호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 호두나무는 우리 마을에서는 드문 것이었는지 동네 어른들이 허리 아플 때 호두나무 가지 삶은 물로 감주를 해 드신다고 자주 잘라가서 키만 크고 가지는 없는 이상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우리 집은 경후네 집과 담장이 아닌 돌덤불로 경계를 이루었고 장독대 뒤로는 돌담과 돌덤불로 주대네 밭과 경계가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뒤뜰에 장독대를 가운데 두고 아름드리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고 경후네 집 쪽으로 아름드리 소태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덤불에는 으름 덩굴이 무척 많았다.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 아랫부분이 어른 종아리만큼 굵은 으름 덩굴이 소태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소태나무에 으름이 주렁주렁 열리기도 했다.
이 으름덩굴 덕에 소태나무에 쉽게 올라 갈 수가 있어 여름에는 자주 나무에 올라가서 놀았다. 하지만 우리가 밟고 올라 다닌 탓에 그 오래 된 으름덩굴이 죽어버려 많이 아쉬웠다.
돼지 집 쪽에 있던 아름드리 감나무와 살구나무 한 그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베어 화톳불을 때고는 나중에 뿌리 채 캐어냈다. 그 때는 중기를 동원할 생각을 못하던 때라 나무뿌리를 캐어 낼 때 아주 애를 먹었다.
살구나무를 캐어 낸 자리에 샘을 파고 펌프를 설치했다. 감나무를 캐어 낸 뒤에 밭가에 대추나무 한 그루와 밤나무 세 그루를 심어 내가 서울로 오기 전까지는 제법 많은 대추와 밤을 따기도 했었다.
나무도 수명이 있는 것이어서 오래되면 저절로 죽기도 한다. 뒤뜰에 있던 감나무 한 그루가 그렇게 죽어가서 아버지께서 그 자리에 은행나무를 구해다가 심으셨다. 아마 내가 여남은 살이 되었던 때다. 아버지는 은행나무는 암수 두 그루를 심어야 열린다고 또 한 그루를 돼지 집과 잿간 사이에 심으셨다. 이 두 나무는 무럭무럭 잘 자라 10년쯤 지나니까 아주 폼이 나서 어떤 나무장수가 사 갔다.
집의 둘레가 큰 편이라 경계가 무척 길어 집 뒤쪽으로는 군데군데 죽나무가 서 있었다. 이 나무들도 높이 자라 주변 밭 가진 사람들에게 피해가 된다고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 모두 베어 버렸다. 말이 주변 밭 가진 사람이지 우리 집 뒤에 밭이 있던 집은 큰누나네 한 집이었다. 자형이 자기 밭의 작물이 나무그늘 때문에 안자란다고 베어낸 거다.
새뜸에서 올라오는 길가에 있는 동네 우물에서, 기동이네와 광헌네 집 사이로 난 골목으로 40미터쯤 들어와서 우리 집이 있었다. 그 골목은 양쪽 집 처마와 담장 때문에 마차나 경운기에 짐을 싣고 들어오기가 무척 어려웠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시절의 우리 동네 담들은 다 돌담이어서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쉽게 무너졌다. 우리 집 뒤쪽의 돌담이야 누가 건드릴 사람이 없었고 좌⋅우는 그냥 돌담이라기보다는 돌덤불이 반은 차지해서 무너질 일은 없었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들은 자주 무너졌다.
70년대 초반에 나훈아가 부른 대중가요, 「물레방아 도는데」의 가사, ‘돌담길 돌아서며 또 한 번 보고, 징검다리 건너 설 때 손을 흔들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이 나올 때마다 그게 바로 우리 동네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바깥마당 좌측에 고대광실 기와집이 있고 그 앞으로 기동이네 집 뒷담이 우리 마당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 기와집에는 여러 가정이 함께 살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에 헐려서 그럴 거다. 나중에 들으니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 장군의 후손인 신태환이란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집에 김좌진 장군이 어려서 자주 놀러 왔었다고 들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본채는 부엌과 안방, 음방 그리고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었다. 우리 집 부엌은 무척 넓었으나 조금 깊어 여자들이 일을 하기에는 불편했다고 한다. 솥을 거는 아궁이가 다섯이 있었고, 방 쪽이 아닌 곳에 다시 작은 솥을 걸어 놓은 아궁이가 하나 더 있었다. 시렁이 매어져 있었고, 요즘 싱크대 형식은 아니지만 그릇과 양념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2층으로 되어 있었다. 부엌 한 쪽에 아주 큰 물독이 있어 거기에 물을 가득 채워 썼다.
마루는 느티나무라 했다. 나무 두께가 20센티미터가 넘는 것이었고 길게 만들어진 판자 형식이 아니라 60센티미터×40센티미터 정도로 된 나무를 두 줄로 끼워 맞춘 형식이었다. 대청마루는 여름에 아주 시원하여 낮잠을 자기에 좋았다. 안방과 음방 사이는 막혀 있었고 어머니가 안방에서, 아버지가 음방에서 거처하셨다.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안방과 음방 사이에 작은 문을 내서 마루를 통하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
바깥마당 우측으론 광헌이네 뒷담이 닿아 있었다. 그 담 역시 돌담으로 담쟁이넝쿨이 뒤덮고 있었다. 그 뒷담이 사랑채 바깥문과 가까이 있어 문을 열고 부르면 광헌이네 집에 훤히 들릴 정도였다.
사랑방은 두 칸으로 아래 칸은 아버지와 마을 어른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 곳이고, 장지문으로 나누어진 위 칸은 머슴 아저씨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놀러 오시는 어른이 없어 자연스럽게 머슴 아저씨 차지가 되고 위 칸은 작업공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랑채 부엌은 소여물을 끓이는 곳으로 조금 지저분하였고, 그 한쪽에 추수한 벼를 넣어두는 광이 있었다. 고구마를 구워먹기 좋은 곳이 여기여서 머슴 아저씨들이 겨울이면 자주 고구마를 구워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서 명절 때가 되면 우리 사랑방은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서 노는 곳이 되었다. 머슴아저씨가 명절을 쇠러 가셨기 때문에 큰 방에 사람이 없고, 세간도 없어서 넓은 공간이라 놀기에 더없이 좋았다.
우리 집은 집이 넓은 것에 비해서 식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에 자주 다니던 방물장수 아주머니나 꿀을 팔러 오는 아주머니들이 우리 동네에 오면 대부분 우리 집에서 자고 먹고 하였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이 되었지만 다른 동네에서 온 사람이 아무 때나 자고 먹고 가는 집은 우리 집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 계셨던 때는 조카인 형호, 명종이, 준호가 차례로 와서 같이 지냈다. 누님 댁이 가까이 있었고, 심부름을 해줄 아이가 있으면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광천, 홍성으로 계속 나돌아서 어머니가 적적하셨겠지만 늘 동네 아주머니들이 놀러오는 곳이 우리 집이었다.
이제 그 집은 우리 식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내가 서울로 오면서 팔고 떠났기 때문이다. 언제든 돌아갈 날이 있다면 다시 그 집으로 가고 싶다. 그러면 그 집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다시 나를 반겨 줄 거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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