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 20:45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능수버들이 지키고 섰는 낡은 우물가
우물 속에 푸른 하늘 조각이 떨어져 있는 윤사월(閏四月)
-아주머님
지금 울고 있는 저 뻐꾸기는 작년에 울던 그놈일까요?
조용하신 당신은 박꽃처럼 웃으시면서
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하늘만 길어 올리시네
두레박을 넘쳐흐르는 푸른 전설(傳說)만 길어 올리시네
언덕을 넘어 황소의 울음소리는 흘러오는데
-물동이에서도 아주머님! 푸른 하늘이 넘쳐흐르는 구료
-김종한,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
지금이야 시골에도 다 수돗물을 쓰지만 예전에는 우물이 있는 집도 아주 드물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도 성벌 아랫말에 우물이 있었던 집은 없었다. 우물이 멀면 그만큼 물을 길어다 먹기가 힘들어서 우물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 게 더 좋았다. 예전 시집살이 민요에 보면 ‘오리 물을 길어다가, 십리 방아 찧어다가’가 나오는데 우물이 멀면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 들어가는 골목 앞에 성벌 공동 우물이 있었다. 광헌네 마당 아래, 기동이네 마당 끝, 그리고 우리 집 들어가는 어귀가 만나는 위치에 공동 우물이 있어 모든 집들이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우물에서 우리 바깥마당까지는 40여 미터쯤 됐고 거기서 다시 부엌까지는 10여 미터가 되었으니 물을 길어 오려면 50미터쯤 되는 거리였다. 부엌 안쪽에는 지게로 열 번 정도 길어 나른 물통의 분량이 들어갈 만큼 큰 독{甕}이 있었고 머슴 아저씨가 아침, 저녁으로 물을 길어다가 여기에 물을 채웠다.
성벌 우물은 그리 깊지 않아서 우물가에서 허리를 숙이면 물을 뜰 수가 있었다. 샘의 깊이가 1미터 정도 밖에 안됐지만 제법 넓었고 사철 물이 잘 나와 가뭄에도 아무 걱정이 없었다. 우물 앞쪽은 넓은 공터여서 여러 사람이 물을 길러 와도 줄을 설 필요가 없었고 그 아래쪽으로는 물이 흘러나와 적은 양의 빨래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 우물에서 성벌 냇가까지의 거리는 100미터 정도의 거리 밖에 안 되었으니 빨래가 많으면 냇가로 갔지만 적은 빨래를 할 만큼의 물은 항시 흘렀다. 대개 우물가에는 버드나무가 있기 마련이지만 성벌 우물가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었고 미나리꽝도 없었으나 그 도랑 끝에 있는 논에 미나리가 자랐다.
이 우물은 우리 집, 선호네, 기동이네, 광헌네, 원종이네, 경후네, 길호네, 진희 누나네, 영철네, 영주 형네, 그리고 아래쪽의 영식이네와 효웅이네 집까지 쓰는 샘물이었으니 우리 어려서는 성벌 아랫말은 거의 다 이 물을 사용했다. 물을 뜨러 오는 어머니들에 의해서 마을에 떠도는 소문들이 확대 재생산될 때가 많았다. 동네 처녀들이 우물가에 오기 보다는 주로 며느리들이 나왔고 이 젊은 새댁들이 자기네 시가(媤家)의 흉을 보면서 그것이 동네 소문의 발원지가 되었던 거였다.
우물 앞에 공터와 빨래터를 지나 작은 도랑으로 물이 흘러 우리 집 마구발치 논 쪽으로 이어졌다. 이 도랑은 지저분해 보였지만 물고기가 많이 살았다. 가을에 도토리를 주워다가 묵을 쑤기 위해 도토리 쌀을 물에 담가 떫은맛을 뺄 때, 우물가에 놔두어야만 물을 자주 갈아 줄 수가 있어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담긴 동이가 두서넛 씩 있었다. 이 도토리에 들어있는 떫은맛이 얼마나 강하던지 그 물을 도랑에 부으면 도랑에 살던 물고기들이 다 죽어 뜨는 거였다. 우물 속에도 늘 미꾸라지나 중고기 노니는 것이 보였지만 도토리 우려내기 위해 부은 물로 죽는 고기가 무척 많았었다.
지금은 사물놀이가 전문가에 의한 공연으로 변모했지만 예전엔 시골에서 모를 심거나 벼를 벨 때에 자주 하는 놀이였다.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집 모내기나 벼를 벨 때에 주로 했으며 추석날에도 이 농악놀이를 했었다. 이 농악이 시작되려면 먼저 하는 곳이 이 공동 우물 앞이었다. 사물놀이패들이 농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우물에 대한 축원(祝願)을 하는데 그 말이 ‘뚫어라, 뚫어라 물구멍을 뚫어라!’ 였다. 다른 말들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물에서의 축원이 끝나면 바로 우리 집으로 몰려가서 한바탕 놀고, 먹고, 마시곤 했다.
성벌 우물은 큰길가에 있어서 동네 사람뿐 아니라 마을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 이용하는 아주 요긴한 샘물이었다. 어느 동네나 다 자기네 동네에 있는 우물물이 더 좋다고 하겠지만 우리 성벌 우물물도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물이 좋다는 것이 어떤 특별한 맛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언제고 마르지 않고 잘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물맛이 변화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한 기준이 되는 거였다. 다른 마을 사람들이 지나면서 물맛을 보고는 늘 물맛이 좋다고 하던 얘기를 많이 들었다.
성벌 아랫말에서 집에 우물을 맨 처음 판 데가 우리 집이다. 외딴 집들은 공동 우물을 이용하지 않고 자기 집에 우물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동 우물을 이용하던 집들 중에서는 우리 집이 가장 먼저 우물을 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작은 텃밭 옆에 있는 두 아름이 넘던 감나무를 베어 화톳불을 땠다. 그때 베어낸 감나무 뿌리를 캐내면서 그 옆에 우물을 팠다.
어려서 본 기억이라 그렇긴 하겠지만 그 감나무 뿌리가 얼마나 컸던지 우리 잿간만큼이나 되는 것 같았다. 그 때는 굴삭기 등이 없을 때라 순전히 삽과 괭이로만 팠고 깊이 파도 물이 안 나와서 애를 먹었다. 세 길 반이나 팠으니 5미터 가까이 파낸 셈이다. 아버지는 그 샘에 펌프를 설치했고, 함석으로 쫄대를 만들고 펌프 주둥이에 쫄대를 대어 물이 부엌 물독으로 직접 가게 하셨다.
우리 집이 샘을 판 뒤에 경후네, 광헌네 등 해서 집집마다 샘을 팠다. 샘이 깊은 집은 펌프를 설치하고 얕은 집은 타래박으로 물을 펐다. 공동 우물로 물을 길러 다니는 것이 어렵기도 했을 것이고 자기 집에 우물이 있어야 편하다는 것도 알게 된 거였다.
어느 동네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아무도 쓰지 않는 공동 우물은 사람들이 그 물을 먹지 않으니까 죽어가서 그런지 지저분해지고 우물 안에 이끼가 많이 끼어 먹을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우물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소설에 마을 우물에 사람이 빠져 죽은 얘기가 있었다. 사람이 빠져 죽은 우물의 물을 먹는 다는 것이 힘들겠지만 다른 우물이 없으니 그냥 건져 낸 뒤에 마셔야 했을 것 같다. 우리 동네 우물이야 깊이가 깊지 않아 그럴 일이야 생각도 할 수 없지만 흉하게 변해가는 우물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가던 때에 우리 집에 와 계시던 수원 외삼촌께서 날을 잡아 그 우물을 메웠다고 들었다. 그 일이 벌써 30년 가까이 되어 지금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 중에 그 자리에 우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을 하는 분이 거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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