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은 없어도 성중(城中)이다

2012. 3. 1. 20:47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광성리 1구는 성벌과 동살뫼, 홈다리와 들마당, 옻밭들, 탑상골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자로 성중(城中)’이라고 쓴다. 즉 성 가운데, 그러니까 성안이라는 의미일 거다.

 

오서산 아래에서는 산자락을 깔고 있지 않은 동네가 만들어지기 어려운데 그래도 광성리 1구는 산을 끼고 있지 않다. 성벌도 뒷동산 아래에 있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동산은 산이라고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다. 들판 한 가운데에 인절미 하나가 떨어진 것 같은 형상이고 어디 다른 산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동살뫼도 그 동산을 끼고 있지만 산자락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홈다리도 산을 끼고 있지 않으니 광성리 1구가 성중(城中)이라는 말은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 탑상골은 안골자락에 붙어 있어 산 아래지만 홈다리에서도 한참 건너편이니 같은 1구라도 좀 거리가 있는 편이다.

 

1구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모르는 집이나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 내 동네 같기는 성벌이다. 성벌 끝머리에 화계침례교회가 서 있었으나 지금은 안골로 옮겨가고 그 자리는 밭으로 변해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교회가 세를 편 적이 없어 작기는 했어도 오서산 아래 나이 든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기웃거려 보았던 곳이다. 나도 행사가 있으면 빼놓지 않고 갔었다.

 

교회 바로 위에 효웅이네가 살았다. 아들만 여러 형제였고 아주 가난했다. 효웅이네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에 서울로 이사를 가고, 그 집엔 두성이 아저씨네가 이사와 살다가 나중엔 정호네가 들어왔다. 두성이 아저씨는 새뜸에서 살다가 광천으로 이사를 갔는데 둘째인 칠성이 아저씨와 분가하여 두성이 아저씨가 거기와 살다가 다시 광천으로 이사를 갔다.

 

정호네는 윗말과 아랫말 중간인 선기네 집에서 살다가 꼬챙이로 이사를 갔었고, 다시 온 것이 두성이 아저씨네 집이었다. 그 윗집은 건식이 형네가 살았고 바로 위에 붙은 집이 나의 수양부모였던 영식이 할아버지네가 살던 집이다. 건식이 형은 영식이 사촌형으로 수양아버지의 손자이니까 나에게는 조카뻘이 되는 셈이지만 보통 형이라고 불렀다. 건식이 형네도 가난했고, 영식이네도 가난했다. 내가 5학년 무렵에 건식이 형네는 서울로 이사를 갔다.

 

마구발치 논 세 마지기가 그 위로 펼쳐졌고 그 앞에 정혁이네 집이 있었다. 이 집은 나중에 헐렸고, 그 앞에 아주 작은 하꼬방이 있던 것을 한석이 아저씨가 다시 지어 조금 커진 판자집이 되었다. 그 하꼬방은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드물에 살던 삼봉이 아저씨가 무허가로 지은 집이었다. 그 앞으로도 집이 있었으나 다 헐리어 논이 되고 말았다.

 

우리 집 바로 아래는 근사한 기와집이 있었으나 헐리어 밭이 되었고 그 끝머리가 선호네 집, 곁에 기동이네, 우리 집 들어오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광헌이네 집이다. 광헌이네 집은 우리 집 마당 끝에 담장이 있고, 기동이네 집도 우리 마당 끝에 담장이 있었으니 우리 집서 30미터쯤 나가는 골목은 두 집 담장 사이였고 그 끝에 마을의 우물이 있었다.

 

광헌이네 집과 담장을 맞댄 집이 원산도 고모네가 살던 집으로 고모가 원산도로 이사 간 뒤엔 원종이네가 살았다. 그 윗집이 기준이 아저씨네 집이었고 그 뒷집은 경후네 그리고 그 뒷집은 방앗간 안집이었다. 기준이 아저씨네와 담장을 맞댄 곳은 찬호네였고 그 앞에 진희 누나네 집이 있었다.

 

마을 우물은 우리 집에서 40미터쯤 되는 곳에 있었다. 내가 어릴 때는 성벌 아랫말 집들이 대부분 이 우물을 사용했다. 이 우물은 비가 많이 오나, 많이 가물으나 물이 항상 똑같았다. 샘이 깊지 않아서 그냥 바가지로 물을 퍼 낼 수가 있었고 그 앞으로 작은 빨래터도 있었다. 우리 집은 머슴 아저씨가 늘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가 부엌에 있는 큰 독{大瓮}에 가득 채워 놓았다. 마당에서 우물까지 30미터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부엌까지는 40미터가 넘어 내가 물을 길러 다니기엔 귀찮은 거리였다.

 

진희 누나네 집에서 큰길을 하나 건너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 있었고 그 앞쪽으로 국진이 형네 집과 그 곁에 영주 형네 집과 은복이 외가가 있었다. 조금 올라가면 선기네가 살던 집이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가면 들마당이고 들마당에는 청락이 형네와 기표 형네, 그리고 광중이네 집이 있었다. 원래 들마당에는 네 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한 집은 누가 살았는지 생각이 안 나고 내가 아주 어릴 때에 헐리었다는 것만 생각난다.

 

거기서 조금 올라가면 정주네 집 뒤편에 순옥이네 집이 밭 가운데 있고, 조금 외돌게 승룡이네 집이 있었다. 그 집 위로 종난이네와 인정이 형네 집이 있고 조금 뒤에 있는 완석이네는 홈다리로 들어갔다. 그 위에 옻밭들에 있는 계돌이 아저씨네도 홈다리였다. 거기서 조금 앞에 나와 있는 길순이네는 성벌이면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이었다.

 

정주네 집 위로 만중이 형네가 살았고 그 위에는 정영이네 집이 있었다. 이 세 집은 서로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정영이네서 길 하나 건너면 선교네 집이었다. 선교네 집 뒤에도 한 집이 더 있다가 헐리었던 것 같다. 작은 대나무 숲이 있던 집이었으나 누구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어릴 때에 광성리 이장을 보던 경후 아버지 주선으로 우리 뒷밭 앞에 공회당을 지었다. 비록 흙벽돌을 지은 것이지만 상당히 크게 지어, 거기서 회의도 하고 마을 연장들을 보관하기도 했다. 나중에 학교가 들어서자 그곳을 세를 주어 산 너머에서 이사 온 영길이네가 거기서 장사를 하였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학교 앞에 2층으로 된 마을회관을 지었다. 아마 2층으로 된 마을회관은 전국을 통틀어 우리 성벌에만 있지 않았나 싶다.

 

성벌 앞으로 흐르는 냇물 건너에 내건너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이 있다. 거기는 화계리에 속했어도 오히려 성벌에 가까웠다. 거기엔 용환이 형네와 길동이 형님네 그리고 영철이네가 살았었다. 길동이 형님은 광천으로 이사를 갔고, 영철이네는 선호네가 살던 집으로 이사를 와서 한 집만 남았다. 나중에 용환이 형네가 서울로 이사를 하고 그 집에 기동이네가 이사를 갔다.

 

그 시절에는 하나같이 가난해서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집이 드물 정도였다. 아마 성벌서 그래도 살 만하다고 하는 집이 우리하고 만중이 형네, 선교네 정도였고 다른 집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 어렵게 살았던 것 같다. 성벌은 동네에 비해서 농토가 적었다. 그러니 식구는 많고 가진 땅이 적어 늘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던 거였다.

 

조금 살 만하다고 하는 것도 끼니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라는 것이지 무슨 세 끼 쌀밥을 먹고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기가 어렵다보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집도 많아서 여러 집이 헐리게 되었다. 그 당시야 무슨 기술 가진 사람도 없었지만 막노동을 하더라도 도시로 가는 것이 나았던 거다. 농촌의 품삯이라는 것이 아주 쌌기 때문에 남의 집에서 품을 팔아가지고는 생계유지도 힘들었던 시절이다.

 

내가 여기서 하는 이야기들은 벌써 40여 년 전의 일들이다. 지금 생각을 하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내가 떠올린 것들도 확실하다고는 못할 얘기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시나브로 잊혀져 가고 또 변한 모습에 익숙해지다 보니 긴가 민가 싶기도 하다. 몇 년이 더 지나면 이나마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아 되짚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