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자취도 남아 있지 않지만

2012. 3. 1. 20:51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오서초등학교가 1968년에 개교하였을 때에 초대 교장으로 오셨던 김종성 선생님은 지금도 그 소식을 몰라 내가 무척이나 궁금해 하는 분이시다. 선생님은 원산도 광명초등학교에서 근무하시다가 우리 오서로 오셨다고 들었다. 수더분한 외모에 막걸리 같이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분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학교의 초대 육성회장을 맡으셔서 학교에 자주 오시기도 했지만 아버지하고 교장 선생님은 밖에서도 자주 만나셨다. 그때만 해도 동네 조금 잘 사는 집에서 큰일을 하면 선생님들께 점심식사를 대접하였고, 무슨 잔치가 있는 집에서는 저녁에 초대하여 약주를 대접하는 것이 일상사였다. 그런 자리에서 교장 선생님은 스스럼없이 농담도 잘 하시고 음식도 소담스럽게 잘 드셨다. 동네 주막에서 어른들과 술자리도 많이 하셨고 동네에서 하는 일에는 거의 참석을 하셨다.

 

언젠가 딱 한번 교장 선생님이 우리 반에 보충을 들어오신 적이 있었다. 수업을 하신 것은 아니고 예전에 가정 방문을 하셨을 때의 말씀을 하셨다. 아이가 학교를 나오지 않아 학생 집에 찾아갔더니 애 아버지는 아파서 누워있고 어머니가 식사를 들여와서 보니 멀건 아욱죽이 전부였다. 못 먹어서 병이 난 사람에게 아욱죽을 끓여 주면서도 선생님 드시라고 가져 와서 목이 메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 멀건 아욱죽을 떠올려 봤다.

 

교장 선생님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내가 공부를 하지 않고 엇되게 자란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나는 다른 선생님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교장 선생님은 많이 무서워했다.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셨기 때문이다. 다른 선생님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학교로 오셨기 때문에 아버지도 모를 것이고, 나도 잘 모르지만 교장 선생님은 우리 집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 늘 꺼림칙했다.

 

내가, 아니 우리 반 아이들이 툭하면 사고를 쳐서 교무실에 불려갈 때가 많았는데 나는 그때마다 교장 선생님하고 마주칠까봐 무척 겁을 냈었다. 다른 선생님들께 맞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교장 선생님이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것은 무척 싫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우리 동네 애들이 은복이네 가게에서 담배를 훔쳐다가 피운 적이 있었다. 처음에 누가 시도를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주인 몰래 담배를 빼내올 수 있다는 소문이 난 후 여러 애들이 담배를 훔쳐 내었고, 공급이 넘치니까 흔한 것이 담배여서 나이가 많고 적고 다 한두 번은 피우게 되었다.

 

나는 소위 싸가지 없는 짓은 하지 않는 아이였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다 피는 바람에 한 번 피워봤다. 아이들이 뒷동산에 여럿 모여서 놀다가 담배를 피웠고, 한 해 위인 형이 피워보라고 권해서 입에 대고 빨았다. 그때가 5학년인가 6학년 때이니 담배 맛을 알 리도 없고, 맵고 써서 다시는 피우고 싶지가 않았고 그 뒤로는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데 담배를 훔치던 어떤 아이가 들키게 되어 학교 선생님들이 조사를 하고 담배를 훔치거나 피운 아이들을 찾아내었다. 지금 생각하면 되게 우스운 일이지만 이미 장곡초등학교를 졸업한 형들까지도 대부분 학교에 와서 선생님들께 조사를 받았다. 선생님들이 장곡지서에 넘긴다고 엄포를 놓는 바람에 이 아이 저 아이 다 불어서 나도 담배를 피운 놈으로 불려갔다.

 

솔직히 얘기하라고 몇 번을 다그쳤지만 나야 담배 맛을 알 나이도 아니고 멋으로 피우는 짓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네 애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가까운 형이 한번 피워보라고 권해서 몇 번 빨아본 것이 전부였을 뿐이다. 누가 내 이름을 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전부라는 것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길게 불려 다니지는 않았지만 딱 한번 교장 선생님께 불려갔다.

 

교장 선생님은 자리에 앉아서 나를 노려보시더니 책상 위에 있는 주판을 들었다 놓았다 하셨다. 그 주판으로 두들겨 팰 것인지 말 것인지가 판단이 서질 않으셨던 모양이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지만 그때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지는 짐작할 만한 일이다. 그 뒤로는 더욱 교장 선생님 마주치는 것을 싫어했다. 멀리서도 선생님이 보이시면 얼른 피해서 다른 길로 가거나 숨었다.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 제사에 오신 적이 한 번 있다. 제사 준비를 다 끝내고 상을 차리고 있을 때에 청주 한 병을 들고 우리 집으로 찾아 오셨다. 마루에서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리시더니 끝난 뒤에 잔을 부어 올리고 큰 절을 하셨다. 나는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지만 교장 선생님이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셨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교장 선생님이 학교 운동장가에 플라타너스를 심으신 일 말고도 학교에 계시면서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일을 하신 것은 오서산 아래에 양봉을 널리 퍼뜨린 일이다. 어디서 구해 오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처음에 교장 선생님이 학교에 가져다 놓은 벌통 덕에 학교에도 벌이 여러 통으로 늘어났고 동네 어른들도 많이 분양을 받아가서 생각지 않게 양봉 붐이 일었었다. 벌통만 늘린 것이 아니라 꿀을 따는 기계도 구해 오셔서 학교에서 꿀을 따 학교살림에 보탰다.

 

꿀을 딸 때가 되면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한다고 전부 줄을 세우고 조금씩 맛을 보게 하신 것도 교장 선생님이다. 나도 줄을 서서 조금 찍어 주는 꿀맛을 보며 입맛을 다셨던 적이 있다. 벌이 여러 통이던 것이 교장 선생님이 떠나신 후 관리를 소홀하게 했는지 전부 없어졌고 학교 벌통이 없어지면서 동네에서 벌을 키우던 집들도 모두 양봉이 없어졌다. 잠깐 사이에 그렇게 되고 말았다.

 

운동장 가에 교장 선생님께서 심으셨던 플라타너스는 아름드리나무로 자라서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그 나무 아래에서 서로 자기들이 심었다는 자랑을 하곤 했다. 어느 해인가 새로 오신 교장 선생님이 그 플라타너스를 다 베어내고 은행나무를 심어 놓았다. 우리의 자랑이던 그 플라타너스는 이제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허망한 일이었다.

 

교장 선생님 본가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광천 매생이에서 사셨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학교가 개교한 뒤에 교감 선생님이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교장 선생님은 5년인가를 오서에서 근무하셨다. 처음엔 홀로 오셔서 하숙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중에는 이사를 오시어 학교 사택에서 사셨다.

 

가족관계는 자세히 모르지만 우리보다 몇 살 위인 따님이 우리 동네 청년과 눈이 맞아 염문을 뿌리고 다니다가 결혼을 했다. 사람이 사랑을 할 때는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고 하지만 따님이 좋아한 그 사위가 선생님 눈에는 크게 차지 않았던 것 같다. 사위가 마음에 안 드셨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도 같지만 그 따님도 어디 내어놓고 자랑할 만한 인물은 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교장 선생님이 전근을 가실 때의 일은 알지 못한다. 적어도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어야 할 일인데도 그때는 잘 몰랐다. 나이가 들어서 선생님의 소식이 궁금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도 선생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미 정년퇴임을 하신 지도 오래되어 조금씩 알고 지내던 분들도 소식이 끊기었다고 한다. 풍문으로, 선생님 큰 아드님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여 무척 어렵게 지내신다고 들었지만 그것도 오래 전 이야기다.

 

만나 뵙고 싶은 선생님이 한두 분이 아니지만 김종성 교장 선생님은 꼭 한번 뵙고 싶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에도 선생님이 기억나고, 오서초등학교 일을 회상할 때도 선생님이 떠오를 때가 많다. 어떻게든 뵐 수만 있다면 선생님 좋아하시던 약주 한잔 꼭 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