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 20:52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광성리는 오서초등학교의 중심지역이다. 광성리는 1구인 성벌, 동살뫼, 홈다리와 2구인 안골, 참뱅이, 3구인 광제로 되어 있다. 지금이야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예전에 내가 어릴 때는 광성리가 장곡면에서 아주 넓은 축에 속했고 사람도 가장 많은 편이었다. 각 구를 독립시켜 리를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컸다고 기억한다.
‘광성(廣城)’이란 ‘넓은 성’이라는 의미이겠으나 광성리에는 성터조차 찾아볼 수 없어서 난 늘 이 이름이 궁금했다. 성은 대개 산자락을 끼고 있기 마련이지만 광성리 1구에는 뒷동산밖에 없고 2구인 안골이나 참뱅이는 그대로 오서산 줄기와 이어지는데다가 바닥이 좁아 성을 쌓고 할 곳이 못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3구인 광제(廣濟?)도 성과 관련된 지명 같은데 아시는 분이 없다. ‘광성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생겼는지에 대해 아는 분들이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고향에 대해 누구보다도 나서기를 좋아하는 내가 우리 고향에 대해 모른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나, 누구도 알지 못하니 어디서 알 수가 있단 말인가? 사실 어릴 적에는 이 지명에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내다가 ‘오서산’이란 이름과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항쟁지로 알려진 임존성이 지금의 광시, 대치면 등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알게 된 후부터 ‘광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서산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광제 아래 옻밭들부터 성벌 새뜸으로 해서 갱변말로 이어지는 들판이 괘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서산은 큰 산이지만 광성리와 오성리, 신풍리 앞으로 해서는 마치 깎아낸 것처럼 넓게 평평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위에서 볼 때, 왼쪽으로는 안골 고개와 오성리로 넘어가는 질마재가 이중으로 담처럼 보이고, 광성리 큰 내를 건너 용배, 아주개, 빈정골, 미련티로 쭉 뻗은 줄기가 또 담처럼 보여 대밭 아래로 넓게 펴진 평야는 장곡면이 진짜 산골일까 할 정도로 드넓게 들판을 이루고 그 밖으로는 산으로 둘러싸여 오서산에서 광성리로 흐르는 내{川}가 광천으로 해서 서해 바다로 빠져나가는 곳만 트여 있다.
그러니까 서해 바다에서 광천을 거쳐 내를 따라 올라오면 좌우가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들판으로 들어오게 된다. 물론 지금이야 사람이 살고 길이 사방으로 뚫려 있으니 그저 그런가보다 할지 모르겠지만 백제 때쯤이라면 물길(배를 타고)이 아니면 광성리까지 들어오기가 무척 힘이 들고 길을 내기도 어려웠을 거였다.
그렇게 배를 타고 올라와 넓은 분지에 성을 쌓았다면 거기가 ‘광성(廣城)’이 아니었을까? 아직까지 이렇다하고 내세울 자료가 없으니 내 얘기가 신빙성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얘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옻밭들에는 시대를 알 수 없는 기왓장이 나오고 광성리 맨 아래쪽에 위치한 뒷동산은 전혀 산 같지 않아 가산(假山)으로 본다면 이 가산은 성에서 배가 올라오는 바다 쪽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동산의 흙을 파보면 산에서 보는 흙이 아니라는 어른들 말씀도 이런 추리를 가능하게 해준다.
광성이 어느 시대의 성인지를 밝히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겠지만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게 늘 아쉬울 뿐이다. 적어도 광성리 사람들이 성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면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는 아닐 것으로 본다. 조상 대대로 살아 온 집이 한 집이라도 있으면 조상으로부터 구전되어 오던 얘기라도 남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이란 얘기가 되고 그렇다면 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 싶어서 백제와 연결을 시켜 본다. 고려 말에 중국에서 귀화한 여양 진씨네의 본관이 여양이라 하는데 그 여양이 장곡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그 때는 바다길이 적어도 장곡 근처까지 이어졌다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역사서에도 나와 있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어 조사를 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거다.
나는 광성리 1구중에서도 성벌이 고향이다. 정확히 광성리 25-3번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가 어릴 때는 광성리 1구에만 70호가 훨씬 넘는 집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40여 호 남짓하다고 한다. 하기야 우리도 집을 팔고 떠나 왔지만 내 기억에 우리 집과 지근거리에 있던 집 세 채가 헐리어 밭이 되는 것을 보고 자랐다.
성벌은 아랫말과 윗말 들마당, 그리고 길순네 집이 있던 옻밭들로 되어 있다. 윗말보다는 아랫말에 집이 더 많았다. 동살뫼는 뒷동산을 끼고 있어서 이름이 동살뫼인데 갱변말서 불어오는 들바람 때문에 성벌보다 훨씬 춥게 느껴지는 곳이다. 홈다리는 동살뫼와 연결되어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성벌보다 동살뫼와 더 가깝게 여겨지는 것 같다. 그래서 마을단위의 모임을 가질 때도 성벌은 따로, 동살뫼와 홈다리가 같이 한다.
광성리 2구는 안골과 참뱅이이다. 거기에 가면 또 작은 마을로 이름이 아주 여럿이지만 우리가 보기엔 크게 안골과 참뱅이로 알고 있다. 안골에는 오서초등학교 동창인 정준이, 정록이, 창호, 은난이, 금숙이, 주길이, 정희가 살던 곳인데 별로 놀러 다닌 적이 없다. 은난이는 공부를 나보다 더 잘 해서 시험에서 나를 제치고 1등을 할 때가 많았다. 오서에 와서 3-5학년을 같이 배웠고 6학년 초에 서울로 전학을 갔다. 정준이는 중학교도 같이 다녔는데 궂은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개구쟁이였다.
참뱅이는 상만이, 상천이 쌍둥이 형제가 있었고 달리기를 잘 하던 분희와 영춘이가 살았다. 상만이, 상천이는 쌍둥이의 이점을 잘 살려 애들 괴롭히는 데는 아주 선수였다. 지금이야 다 어른이 되서 언제 그랬냐고 시치미 떼지만 그 형제 때문에 힘들어한 아이들이 정말 많았다.
성벌에서 홈다리를 지나 참뱅이로 가는 산소 모탱이에 정혁이네가 집을 짓고 이사 가서 살았다. 정혁이는 처음에 성벌에 살다가 그리로 간 거였다. 오서 2회 남자 중에서 성적으로 나와 다툰 것은 정혁이 뿐이었다. 정혁이를 참뱅이에 살았다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지만 성벌로 치면 그 쪽 애들이 싫어한다. 그러고 보면 참뱅이는 다른 기수에 비해 2회가 유달리 적었다.
광제에 내가 자주 놀러 다닌 것은 광석이와 우상이가 있어서였다. 광석이와 어떻게 해서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늘 내게 잘 해 주었다. 광석이는 우두머리 기질이 있어 동네서나 학교에서나 남에게 밀리지 않았지만 크게 드러내는 성격도 아니었다. 우상이네 가면 할머니가 아주 귀여워해 주셨고 우상이 어머니도 나를 각별히 대해 주셔서 자주 갔었다.
주철이 형은 우리와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나이는 서너 살 더 먹은 형이었다. 어릴 때에 무슨 보약을 잘못 먹었는지 나이에 맞지 않게 자라 몇 년 아래인 우리와 함께 공부한 거였다. 명랑 쾌활하여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았고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경순이도 우리보다 나이를 더 먹었지만, 학교는 같은 학년이었다.
그 때는 보통 아홉 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장곡으로 다니려면 힘이 들어서 몸이 약한 아이들은 열 살에 보내기도 했었다. 그 밖에 주몽이, 장룡이, 자순이, 용순이의 쌍둥이, 광삼이가 광제에 살았고, 순현이, 남순이, 예순이, 성화 등의 여자 동창도 있었다.
이상하게 광제에 살던 친구들 중에 세상을 뜬 사람이 많다. 광삼이는 논에 나갔다가 죽었다고 하고, 광석이는 간암으로 원자력병원에서 세상을 떴다. 주철이 형은 의정부 형님 댁으로 명절을 지내러 왔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젠 광제도 예전의 광제처럼 자주 다니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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