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와 자목련을 보았다

2012. 3. 1. 21:01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난 처음엔 장곡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장곡초등학교는 장곡면 도산리에 있다. 장곡면에는 장곡초등학교와 반계초등학교 2개가 있었다. 16개의 리()에 학교가 둘이니 대략 8개의 리를 묶어 하나의 학교가 있는 셈인데 도산리, 신동리, 상송리, 지정리, 가정리의 광성리, 화계리, 신풍리, 오성리, 죽전리의 장곡초등학교가 훨씬 컸고 옥계리, 월계리, 대현리, 산성리, 천태리, 행정리의 반계초등학교는 작은 규모였다.

 

장곡초등학교는 왜정(倭政) 때 세워진 곳으로 역사가 꽤 오랜 곳이다. 내가 거길 졸업했다면 46회이니 지금은 70회를 훨씬 넘겼다. 반계초등학교는 장곡초등학교보다 20여 년 뒤에 문을 열었고, 우리 어릴 때 세워진 오서초등학교는 그보다 20여 년 차이가 나지 않나 싶다.

 

장곡초등학교가 있는 도산리는 장곡면 소재지로 내가 어릴 때는 '생미'라고 불렀다. 생미는 광천에서 청양으로 가는 지방도로가 관통하는 곳으로, 어려서는 몰랐지만 지금 보면 '과연 여기가 면소재지인가?' 할 정도로 초라하다. 구색을 갖추느라 면사무소, 지서, 농협, 초등학교 등은 다 있지만 구멍가게 두 셋과 다방 둘(이것도 얼마 전에 생겼다), 술을 파는 식당 두어 곳 등이 전부였다.

그래도 도산리가 장곡면의 중심지인 것은 확실했다. 면사무소가 거기 있으니 행정적인 일을 보려면 도산리로 가야 됐고, 장곡면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장곡초등학교가 거기 있으니 예전의 장곡면 사람들은 의당 장곡초등학교가 있는 도산리로 모여들었다.

 

예전에야 학교가 멀고 가까운 것은 개인 사정이니 그것까지 나라에서 신경 썼을 리가 없었다. 광성리 1구에서 도산리까지는 약 2.5킬로미터로 내가 어릴 때 오리 길이라고 했지만 실제 오리가 넘는 길이다. 보통 걸음으로 1킬로미터를 갈 때에 10분 정도 소요되므로 오리 길이라면 20분이 걸려야 한다. 그러나 도산리에서 성벌까지는 보통 25분에서 30분 걸렸으니까 오리가 넘는 거리가 분명하다. 광성리 1구에서 오리 길이라면 2구나 3, 오성리 등은 거의 십리에 가까운 거리다. 이렇게 먼 길을 누구나 걸어 다녔으니 어린 아이들에겐 힘에 겨운 일이었다.

 

신작로라 부르던 비포장 길은 소달구지가 다닐 정도의 넓이여서 좁은 길은 아니었지만 비가 오면 진창이 되고, 얼었다가 풀리는 봄철엔 또 진창이 되어,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비가 오지 않아도 무척 험난한 길이었다. 게다가 집이 보이지 않는 들길, 산길로 이어지니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이들 학교 보내기가 큰 걱정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내가 입학을 하던 1965년경에는 대부분 아홉 살 때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지금도 나이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 많지만, 그 당시에 학교를 늦게 다닌 이유가 보통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출생신고의 문제였다. 그땐 정말 유아기에 죽는 애들이 많아서 출생신고가 1년 정도 늦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첫돌은 지나야 살 수 있는 자식으로 생각해서 태어난 지 1년은 지나야 호적에 올리는 것이 예사였다. 내가 어릴 때, 누구네 애가 죽었다는 얘기는 자주 듣는 것이었고 제법 큰 아이들도 병으로 죽어나간 적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1년이 늦어져 아홉 살이 되어야 호적에 올린 나이로 만 7세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학교가 멀다보니 우리 오서산 아래쪽에서는 여덟 살이 아닌 아홉 살에 보내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우리 동네에 오서초등학교가 생긴 뒤엔 다 여덟 살에 입학했지만 장곡으로 입학했던 내 1년 아래까지는 거의 아홉 살 아니면 열 살에 초등학교에 갔다.

 

나도 아홉 살에 학교에 갔다. 아니 여덟 살에 장곡초등학교로 입학신고를 하러 갔다가 퇴짜를 맞고 왔다.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내가 여덟 살 때 할머니와 함께 장곡초등학교로 입학신고를 하러 갔다가 어리다고(?) 입학 허가가 안 되어서 그냥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땐 아이들이 넘칠 때라 굳이 1년 먼저 아이를 받을 일도 없었던 거다.

 

내가 왜 여덟 살에 입학이 안 되었는가 하면, 경욱이 누나가 57년 생으로 되는 바람에, 내가 한 살 줄어 58년 생으로 출생신고가 되어 한 살이 더 줄었던 까닭이다. 우리 집의 좀 특이한 가족구조로 경욱이 누나 57, 58, 용주가 59년으로 호적에 올라 있다.

 

그 때에 내가 학교에 가겠다고 계속 우겼더라면 갔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학교에 가셔서 한 말씀만 하셨다면 학교에서 절대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믿으니까……. 난 학교 선생님들 욕을 바가지로 했을 뿐 아버지에게 굳이 가겠다고 떼를 쓰지 못했다. 퇴짜 맞고 왔다고 얘기하니까, 아버지는 그럼 내년에 가거라.” 하시는 것으로 그 문제는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더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학교가 1년 먼저냐, 늦으냐에 따라 친구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동네 친구들이야 다 같다고 하지만 내가 1년 먼저 갔다면 다른 마을 동기들과는 잘 모르는 사이일지도 모르니까…….

 

내가 장곡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196532일이다. 입학식 날, 누구와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네 아이들, 경후, 기동이, 정혁이, 선교, 길순이, 칠환이 등과 어울려 다녔다. 지금 가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규모의 작은 학교지만 그땐 엄청나게 커 보였다. 특히 운동장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나무는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이었고 우리 키 높이의 굵기가 어른들 한 아름은 될 것처럼 커 보였다.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운동장에서 하나 둘, 하나 둘 하고 따라 걷던 기억이 새로운데, 난 그때 1학년 2반이었고, 담임선생님은 안경을 쓴 중년의 김득환 선생님이었다. 우리 반은 주로 광성리, 화계리, 가송리 애들이 많았고 아마 50명은 되었던 것 같다. 그 당시 교장 선생님은 김명진 선생님이라고 기억하지만 교감 선생님은 성함이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생활보다는 학교 오가는 길이 더 재밌었다. 아침에는 동네 형들과 떼를 지어 갔고, 집에 올 때는 우리 1학년끼리 마을별로 몰려다녔다. 신작로보다는 산길로 다니면서 새 새끼도 쫓고 길가 밭의 고구마 등도 손을 대며 즐거워했다. 도산리 뒷산으로 해서, 줌뱅이 뒤 등성이로 나오면 군데군데 산밭이 있어 먹을거리가 많았다. 이 길이 싫증이 나면 소라실 고개에서 작은 빈정골로 넘어 방깔미로 건너오는 길이나, 큰 빈정골로 해서 내 건너로 오는 길을 택했다. 어느 길이나 30분이 걸리는 거리니까 놀 거리가 많았다. 학교와 집이 너무 가까워도 좋지 않다는 것은 뒤에 알았지만 그 때는 너무 먼 것이 힘들기도 했었다.

 

내가 학교 다니던 처음에 가장 곤혹스러워했던 것은, 남들은 대부분 책보를 들고 다닐 때에 나는 가방을 메고 다녔던 일이다. 내가 입학을 한다고 서울 외삼촌댁에서 등에 메는 가방을 사서 보냈는데 다른 애들이 갖지 않은 가방을 나만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 정말 싫었다. 그래서 안 가지고 다니려 했지만 집에서는 굳이 그것을 메고 다니라고 하셨다.

 

남이 안 가진 것을 갖고 다니는 것이 남들 보기에 창피하기도 했고, 무슨 일에 뛰어가려면 가방 속의 책들이 덜그럭거려 등에 착 붙게 맨 책보가 더 맘에 들었다. 아마 한 학기는 그 가방을 메고 다닌 것 같다. 그 시절에 오서산 아래 마을서는 나하고 정주만 가방을 메고 다녔을 거다. 그 가방은 한 학기 쯤 지나니까 끈이 헤져서 나도 남들처럼 책보를 가지고 다녔다.

 

그때는 장곡초등학교도 오전반, 오후반 2부제 수업을 하였고 그것이 1주일 단위로 교체가 되어서 월요일엔 혼동을 일으키곤 했었다. 어떤 날은 오후반인데 일찍 가서 하릴없이 학교 안에서 왔다 갔다 하고, 어떤 날은 오전반으로 바뀐 것을 모르고 늦게 가서 지각을 하기도 했었다.

 

장곡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제일 힘든 것이 겨울철 추위였다. 추운 날 바람이라도 불면 소라실 고개를 넘어 줌뱅이 앞까지 뺨을 에이는 듯하던 추위……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처럼 잘 먹지도 못한 때이고, 옷도 허술하여 추위 앞에선 애들이 견디기 힘들어 했다. 비가 오면 그것도 큰 문제였다. 우비는 고사하고 변변한 우산도 없던 시절이니 비가 오면 비료 푸대나 큰 비닐을 반으로 접어 머리부터 쓰고 다녔다. 책은 책보로 쌌으니 비가 오면 젖기 일쑤이고 개울을 건너다가 신발을 잃어 발을 동동 구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타이어표 진짜 검정 고무신은 내가 4학년 때쯤 나왔고 그때는 '지렁이고무' 라고 불리던 노란 고무신이나 주황색, 엷은 파란색 고무신인데 잘 닳고 쉽게 찢어져서 애를 먹였다. 그땐 신이 찢어지면 장에 가서 때워 신을 때이다. 한 짝을 잃어버리면 따로 구할 수가 없으므로 다시 살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남은 한 짝은 엿을 바꿔 먹거나 여름철 아이스케키 장수에게 돌아갔다.

 

장곡초등학교 교정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이 우물가에 서 있던 자목련 나무이다. 꽃이 피는 것을 본 적은 두 번 뿐이지만 그렇게 탐스럽고 짙은 자목련은 그 후로 보지 못했다. 어려서 기억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지만 내가 서울서 본 자목련은 짙은 자주색이 아니어서 힘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다. 그 우물, 지금이야 수도로 바뀌었겠지만 그때는 큰 노깡(노관?)으로 가슴 높이까지 올라오게 하고, 수각은 아니어도 지붕을 만들어 놓은 샘()이었다. 타래박으로 물을 긷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나도 그 우물물을 퍼서 신발을 닦았던 기억이 있다.

 

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에 한글을 제대로 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받아쓰기 같은 시험을 보면 잘 할 수가 없었다. 처음 시험을 봤을 때 반에서 8등인가 했었다. 그때 1등을 한 친구는, 1등 했다고 교실 문을 잠글 수 있는 자물통을 사왔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에 1등을 하는 것이 왜 좋은 지도 몰랐고 1등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학교에 다니는 것이 재미있고 애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이런 철없는 생각은 2학년이 되면서 바뀌었으니 1학년 때가 가장 좋았던 셈이다.

기억에 남는 것 중에 하나는 아버지가 교장선생님과 자주 만났던 일이다. 아버지는 도산리에 오시면 면사무소, 학교 등을 꼭 들리셔서 거기 분들과 오래 말씀을 나누시었다.

 

나는 길에서 아버지와 마주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길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가급적 피하려했으나 그것이 잘 안 되었다. 길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꼭 인사를 해야 했지만 그것은 다른 아이들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밖에서 인사를 않고 어정쩡하게 넘어갔다가 집에 오면 몹시 혼이 났다.

 

1학년 가을에 할아버지 대상(大喪)을 치른 뒤 아버지께서 장곡초등학교의 모든 선생님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신 일이 있었다. 선생님들이 사랑방에서 음식을 드실 때, 아버지께서 날 불러 인사드리라고 하셔서 나갔었다. 그때 우리 담임선생님이 날 안아주시고 앞으로 잘 해주겠다고 말씀하시니까, 아버지께서 정색을 하시며 애들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하셔서 얼마나 쫄고 나왔던지…….

 

2학년이 되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첫 시험에서 1등한 것과 하루 땡땡이를 쳤던 일이다.

2학년 담임선생님은 신풍리 출신의 오흥원 선생님이셨다. 오 선생님은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 전() 장곡면장 오수영 님의 따님이셨지만 사실 난 오수영 님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저 '오 면장, 오 면장' 해서 그렇게 알 뿐이었다. 그때 오 선생님은 결혼하시어 갓난아이가 있었고 우리 반의 나이든 학생 연분이가 자주 애를 보아 주러 다녔다.

 

오 선생님은 당신 아버지 친구의 아들인 나에게 다른 아이들보다 더 관심을 주셨다. 상풍에는 당숙 댁도 있고 해서 내가 자주 다녔고, 장곡초등학교를 떠나서도 아버지는 유명한 분이셨으니 나를 조금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이 무척 부담스러웠다. 내게 겉으로 잘해 주신 것도 별로 없지만 선생님은 인상이 좀 무뚝뚝한 편이어서 가까이 따르기는 고사하고 자꾸 뒷전으로 나돈 거였다. 담임선생님이 나에 대해 훤히 알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잘 아신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럭저럭 3월 한 달이 다 갈 때 월례고사를 보았다. 그 때는 중간, 기말고사 말고도 매달 시험을 보았었다.

 

하루는 좀 늦게 나가 앞집 사는 기동이와 둘이 학교로 갔다. 늦어서인지 길에는 우리 둘 외에 보이는 학생이 없었다. 그때는 시계를 가진 사람도 드물었지만 학교 가는 길에 마주칠 어른도 없을 때여서 그런가보다 하고 천천히 갔다. 그렇게 도산리 학교 근처까지 갔더니 차가 다니는 길에 고장 난 차가 서 있고 수리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있길래 우리도 거기 서 구경하다보니, 이미 시간이 꽤 지난 뒤였다. 그래서 학교로 들어가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둘이 학교 앞산에 올라가 놀다가 다른 애들 끝나고 나올 때 같이 왔다. 물론 집에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다.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내가 3월 월례고사에서 1등을 했다는 게 아닌가? 얼떨떨했는데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앞에 나와 무릎 꿇고 손들라고 하시어 오전 내내 그런 자세로 있었다. 물론 힘도 들었지만 정말 부끄럽고 창피했다. 다행히 내가 시험에 1등을 했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게 보였는지 다른 아이들이 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뒤에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지만 어머니에게서 한 말씀 들었다. 담임선생님이 선생님 어머님을 통해 어머니께 내가 땡땡이 쳤고,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난 지금도 궁금한 것이 그때 일을 정말 아버지가 모르셨을까 하는 점이다. 아버지를 무척 어려워해서 아버지 앞에서는 고개도 들지 못할 때라 아버지가 나를 혼내셨다면 더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반에서 1등 했다는 것은 내게 놀라운 일이었다. 한 번도 진지하게 공부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면 늘 마을 친구들과 몰려다니고 새알을 줍는다, 새 새끼를 잡는다 하면서 산으로 뛰어다니면서 신나게 놀았을 뿐이다. 난 운동이나 뛰어 놀기를 안 좋아해서 운동신경이 아주 둔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무척 좋아했다. 그 후로 나는 학교생활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장곡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던 1학년이 지나자 우리 마을에 학교가 들어선다고 공사를 하더니 2학년 때가 되어서 우리는 오서분교로 옮겨가 장곡초등학교에 대한 기억은 거기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