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 21:05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광천이 점점 시들어가서 걱정이다.
인구도 점점 줄어들고 상업권도 축소되어 예전의 우리 어릴 때 알고 있던 광천은 이미 죽었는지도 모른다. 광천이 시들어간다는 얘기는 광천을 끼고 있는 장곡, 은하도 함께 시들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한 때 충남 서부에서 제일 번창한 곳으로, 홍성군과 서산시(서산군), 청양군, 보령시(보령군), 예산군의 중심에 섰던 광천의 퇴락은 광천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전해 주고 진한 아쉬움을 갖게 한다.
나는 홍성, 광천, 그리고 서산, 청양, 대천, 예산, 중에서 광천이나 홍성이 제일 먼저 시가 될 줄로 생각했으나 한참 전에 서산과 대천은 서산시, 보령시가 되었고 홍성과 광천은 그대로, 아니 광천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1914년에 읍이 된 홍성읍에 이어, 광천읍은 1915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홍성읍이야 홍주목이 있던 곳이고, 홍성군의 중심소재지로 읍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무렵에 광천이 읍으로 승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광천이 번성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광천읍 담산리의 황보 금광은 왜정시절 한 때 전국에서 가장 금이 많이 나오는 광산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고, 홍성군 근처의 서해바다에서 잡히는 어물은 모두 광천으로 몰려들어 왔었다.
광천 장은 어물만 집산되어 팔리는 곳이 아니라 모든 생활필수품이 이곳에서 거래되었기 때문에 홍성군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보령시와 서산시, 청양군, 예산군,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이들 지역의 중심이었다.
광천읍은 강경읍과 더불어 충청남도의 대표적인 상업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알부자들이 많아 ‘관청 많은 홍성에 가서 아는 체하지 말고, 알부자 많은 광천에 가서 돈 있는 체하지 마라’라는 말이 있었다.
광천에서 이와 같이 상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서해안에 있는 대부분의 섬 주민들이 배를 타고 광천읍 옹암포로 들어와 이곳 장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보령시 원산도를 비롯한 여러 섬과 서산시 안면도의 주민들은 4일과 9일에 장이 설 때면, 하루 전날 갖가지 해산물과 어패류를 가지고 보령시의 오천항을 거쳐 옹암포로 해서 광천에 들어와 하루 자면서 일을 보았다.
가져온 물건들을 팔거나 생활필수품으로 바꾸어 다음 날 저녁때에 배를 타고 이곳을 떠났으니 광천은 줄곧 인근 섬 주민들의 생활중심지 역할을 해온 셈이다.
그러던 것이 1968년에 서산시의 안면읍과 남면을 잇는 연륙교가 생기면서 안면도 사람들이 태안으로 빠지고, 옹암포 항구의 바닥에 흙모래가 쌓여 큰 배가 드나들기 어렵게 되면서부터 어물들이 군산시와 인천시, 보령시 등의 큰 항구로 가버려 광천은 시나브로 쇠퇴하고 말았다.
옹암포의 바다가 급격히 메워진 것은 자연적 현상만으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그 뱃길에서 사금을 캐던 배가 점점 위로 올라오면서 내를 뒤집어 더 빨리 막히게 된 거다. 담산리 광산에서 한내를 타고 내려간 사금조각이 오천으로 이어지는 갯고랑을 타고 쌓였는데 이것을 캐는 배가 광천 철교 아래에까지 올라와서 내 바닥을 뒤집으며 금을 캐면서 모래가 갯고랑을 막았다. 아마 철교가 없었다면 구장터로 해서 담산리까지 올라갔을지도 모른 일이다.
지금은 광천을 떠받치는 것이 광천 김과 광천 새우젓이다. 한 때 충남 서해안 대부분의 어물들이 몰려들었던 광천이라 아직도 김과 새우젓은 광천 것을 제일로 치고 있다. 예전에 원산도에서 사시던 고모님 덕에 김을 많이 먹은 나로서는 광천 김이 아니면 김으로 치질 않는다. 김은 얇을수록 고급으로 치는데 예전에 사람이 할 때는 정말 얇게 잘 떴으나 요즘은 다 기계로 한다.
예전에는 기계로 뜨고 말린 김은 쳐다보지도 않았으나 지금은 다 기계로 한다니 이것, 저것 가릴 처지도 아니지만 그래도 ‘광천’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김 같다. 한 때 좁고 두텁게 나왔던 남쪽 김들은 사람들이 잘 먹지 않으니까 광천 김처럼 얇고 넓게 만들지만 그렇게 해도 역시 김은 광천 김이 더 낫다.
새우젓은 광천이란 이름이 붙지 않으면 치질 않으니 어딜 가나 다 광천 새우젓이라고 하지만 사실 가짜가 많다고 한다. 말로는 다 광천 새우젓이라고 해도 광천 독배 토굴에서 익힌 새우젓이라야 제 맛이 난다. 이 토굴 새우젓이 맛과 빛깔에서 단연 으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문이 광천 독배에 토굴이 얼마나 있기에 전부 다 토굴 새우젓이냐고 하는 거였다.
책(『한국의 재발견. 충청남도 편』, 뿌리 깊은 나무)에서 보니까 독배에 토굴이 60여 개가 있고, 한 토굴에 새우젓을 담는 큰 드럼통이 1,500 ~ 2,000개 정도 들어간다고 한다. 1981년 기준으로 이곳에 들어 있던 새우젓은 모두 15,000 드럼쯤으로 전국 새우젓의 50-60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하니 결코 적은 양은 아니다. 독배 마을에 사는 250여 가구 중에서 90퍼센트 정도가 새우젓 가공과 저장으로 먹고 산다고 들었다. 예로부터 독배는 새우젓 때문에 잘 사는 사람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흥타령」에 “광천 독배로 시집 못 간 내 팔자야”라는 구절이 들어 있을 정도이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즘 광천에서 파는 것도 중국산이 많이 섞여 있다고 해서 걱정스럽다. 먹는 음식만큼은 아무리 비싸도 국산을 써야하고 거기에 다른 것을 섞어 우리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우리 집은 광천 새우젓만 사다가 먹는다.
광천에 구장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지금의 장터가 아니었을 거였다. 지형으로 보아도 구장터는 그냥 산 아래에 있어 배가 들어오면 자연스레 배를 댈 수가 있었을 것이니 거기가 시장으로서의 입지는 훨씬 나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시가지는 광천 내{川}에 둑을 쌓아 내 밖으로 형성되었다. 이 내 때문에 광천(廣川)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나 그리 넓지는 않아서 나는 이름이 아깝다고 늘 생각했었다.
이 광천은 전부 오서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이루어진 내이다. 담산리 쪽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크지만 본줄기는 오서산에서 광성리로 흘러내린 것이고, 거기에 오성리 쪽 물이 합수하면서 커진다. 이 내(광천:廣川)로 예전에 배가 광성리까지 들어왔을 것으로 믿고 있다.
광천 시가지와 구장터를 잇는 다리는 왜정 때에 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게 그 유명한 광천 쪽다리다. 어려서 어른들이 애가 말을 안 들으면, ‘저 녀석 광천 쪽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라고 했다. 이런 얘기가 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동네에서 광천에 가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폐쇄를 하고 그 곁에 새로 다리를 놓았다.
이 새 다리를 너무 작게 놓아 차를 가지고 다니기에는 아주 불편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든지 이 다리를 다시 교체하여 세 번째 다리가 놓였다. 세 번째 다리도 이용하는 사람들 편에서 본다면 역시 불편하다. 다리 입구가 잘못 된 거다. 탁상행정으로 다리를 놓은 거라고 불평을 하고 다니지만 다시 놓으려면 돈 때문에 쉽지 않을 거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광천은 지금보다 나았다. 그런데 점점 인구도 줄고 홍성, 대천, 서산 등이 급격히 커지면서 상대적으로 쇠락해 가고 있어 광천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저리다. 누가 뭐라고 해도 고향을 물으면 홍성보다는 광천이라고 말이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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