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 21:03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홍성군의 2읍 9면 중에 가장 궁벽한 곳이 장곡면이다. 오서산과 천태산이라는, 서해안에서는 그래도 높은 축에 속하는 두 산 사이에 들어있는 장곡면은 내세울 만한 인물을 내지도 못했고, 들보다 산이 더 많아 가난한 시골 마을들을 산자락에 깔고 있는 곳이다.
장곡면에 장곡리가 없다는 것도 좀 특이한 예라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긴 장(長), 골 곡(谷)의 지명임에도 불구하고 얘기할 만한 골짜기가 없는 것도 이상하다. 내 짐작으로는 장(長)이 예전에는 길다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눈에 띄는 골짜기가 없고, 옛 기록에도 그런 지명으로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장곡의 고려 때의 이름은 ‘여양’이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장곡으로 불렸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고려 때 ‘여양’이란 지명이 꼭 지금의 장곡면만을 가리킨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여양 진씨’의 본관인 여양이 장곡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장곡면 근방이 여양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장곡면은 도산리, 상송리, 신동리, 지정리, 가송리, 산성리, 행정리, 천태리, 월계리, 대현리, 옥계리, 광성리, 신풍리, 화계리, 오성리, 죽전리 등의 16개 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사무소는 도산리에 있다. 도산리는 장곡면의 중심이 되는 곳이라 면사무소, 지서, 농협, 보건소 등의 관공서가 있고 역사가 깊은 장곡초등학교도 거기에 있다.
누구나 어려서는 자기가 사는 고장, 자란 고장을 내세우기 마련이지만 우리 장곡면은 자랑할 만한 얘깃거리가 없었다. 그저 꺼낼 수 있는 것은 충남에서 두 번째로 높다는 오서산뿐이다. 예전에는 웬만한 면소재지라면 대부분 5일장이 섰으나 장곡면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도산리에는 장이 서질 않고, 장곡면 끝머리에 청양 비봉면과 만나는 반계에 손바닥만한 반계장이 설 뿐이었다.
반계는 행정지명으로는 장곡면 옥계리로, 예산군 광시면, 청양군 비봉면, 화성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3개 군의 접경지대라 예전부터 한 중심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거기에는 도산리에 없는 중학교도 하나 있었다. 양성중학교가 바로 그것인데 시골서는 드물게 사립중학교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 갈 때에는 이미 반계에도 초등학교가 생긴 지 꽤 오래되어 산성리, 행정리, 천태리, 월계리, 대현리, 옥계리 아이들은 그 곳으로 다니고, 도산리, 상송리, 신동리, 지정리, 가송리, 광성리, 신풍리, 화계리, 오성리, 죽전리 아이들만 장곡초등학교로 다녔다. 난 그래서 반계 쪽은 거의 가 본 기억이 없고 같은 장곡면이라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 쪽은 오히려 광천읍보다 더 모르는데 중학교도 학군이 달라서 그 지역 아이들을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럴 거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에 광성리에 오서분교가 생기면서 다시 장곡초등학교도 학군이 축소되었다. 꼭 학교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장곡면이 셋으로 나누어져 자기가 사는 지역이 아니면 알 수 없게 되었다. 장곡으로 다닐 때는 아이들이 신동리나 지정리, 상송리 등에서 왔기 때문에 동네 이름이라도 알고 지냈지만 나중에는 그 쪽 아이들을 만날 일이 없어 아주 생소해졌다.
연세를 드신 분들은 학교가 하나일 때 장곡으로 다녔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아이들보다 더 넓게 알고 친구 범위도 더 넓으나 학군이 축소되면서 아이들의 활동 범위도 좁아진 셈이다.
장곡초등학교에 1년 반을 다니다가 광성리에 새로 지은 오서분교로 옮겨와서 내가 아는 범위는 다시 광성리, 신풍리, 화계리, 오성리, 죽전리로 더 축소되었다. 나중에 중학교에 갔을 때 장곡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을 만났지만 그래도 내가 안다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장곡면의 1/3에 해당하는 오서초등학교 학군 지역뿐이다.
오서초등학교는 광성리에 있었으므로 오서 학군에서는 단연 광성리가 중심이었다. 아주 작았지만 학용품과 과자를 파는 가게가 두 곳이 있었고 술집도 두 곳이나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 때문에 광성리로 왔지만 어른들은 술을 마시기 위해 광성리로 모여들었다. 난 광성리서 나고 자랐지만 화계리 새뜸과 신풍리 상풍에 할아버지(종조부)가 한 분씩 사셔서, 새뜸과 상풍을 자주 드나들어 그래도 다른 지역보다는 많이 아는 편이다.
오서초등학교의 학생 수를 지역으로 나눠 본다면 광성리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오성리, 화계리, 신풍리, 죽전리 순이었다. 광성리와 오성리는 모두 오서로 다녔으나 화계리, 신풍리, 죽전리 등은 일부는 장곡 또는 대평초등학교로 가서 오서로 오는 숫자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광성리는 다른 지역보다 더 넓었고 사람도 더 많았다. 1구를 중심으로 2구, 3구가 오서산 아래에 큰 자락으로 전개되어 있고 광성(廣城)이란 지명이 다른 동네를 압도할 만하였다. 그리고 학교가 있어서인지 아이들도 다른 지역보다 드세어서 타 지역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것도 버거워할 정도였다. 특히 학교가 있는 1구 아이들이 더 그랬다.
오성리는 광성리 다음으로 큰 마을이나 광성리처럼 여기 저기 마을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 큰 바닥에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거기도 가서 보면 작은 단위로 동네 이름이 다 달랐지만 다른 지역 사람이 보기엔 하나의 큰 마을 같았다. 어려서 듣기로도 오성리는 마을 단결이 잘 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고 아이들도 온순했었다. 오서산 아래에서는 오성리 사람들이 대처로 나가서도 가장 단결이 잘 되고 잘 산다고 들었다. 오성리에는 오서 2회 동창들도 많다. 진석이, 진태, 동호, 성길이, 영규, 일동이, 금산이, 지현이, 창배, 효중이, 정주, 정택이, 금복이, 금수, 정순이, 종숙이, 순희, 한순이, 혜선이, 은자, 병자, 춘자 등이 나와 함께 배웠다.
화계리는 1구인 새뜸, 꽃밭골만 오서로 다니고 2구인 모산은 장곡으로 다녔기 때문에 친구가 그리 많지 않다. 꽃밭골의 상환이, 상호, 성운이, 재운이, 희순이, 용주, 용성이, 새뜸의 기종이, 복순이, 박순이 종설이, 도드래미의 정백이, 순호 등이 오서로 다녔다.
죽전리도 아래 대밭은 대평으로 다니고, 위의 하니만 오서로 다녀서 친구가 많지 않았다. 경희, 종호, 병찬이, 숙자, 인자, 경자가 하니에 살았다. 그러니까 남자 셋, 여자 셋이 전부이다.
신풍리는 하풍과 분토골은 장곡으로 다니고 상풍, 새말, 어덕말만 오서로 다녔으나 우리 2회는 전부 장곡으로 다녀, 오서 2회에는 신풍리 친구들이 없다.
백제가 멸망할 때 그 잔여 세력이 2년 간 백제 부흥운동을 펼친 임존성이 장곡면 산성리와 거기 인접한 예산군 광시면이라는 것이 근래에 와서 밝혀지면서 장곡면의 존재가 조금 알려지게 되었다. 나도 그 얘기를 듣고서 생각한 것이지만 거기 산성리의 산성에서 5만 정도의 군사가 어떻게 2년을 버텼는지 의문이 가고, 그래서 유추되는 것이 ‘광성리’라는 지명이 백제 때에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즉 오천에서 광천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대평리 앞으로 해서 오서산 아래에까지 닿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그래야만 광성리라는 지명이 어디서 연유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부분은 좀 더 자료를 찾고 연구를 해야 할 부분인데 아직은 그냥 추측에 기대고 있다.
그리 크지도 않은 장곡면에서 내가 조금 안다고 할 수 있는 곳은 현재의 1/3밖에 안 되는 셈이다. 난 내가 장곡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늘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찾아 볼 사람도 없는 곳에 돌아다니는 것도 그래서 마음으로만 아쉬워 할 뿐이다. 나중에 시간이 주어지면 장곡면만이라도 꼭 다 둘러보고 싶다. 사진기 들고 모든 마을을 한 번씩이라도 가보고 싶다. 그런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꼭 시도할 날이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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