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넓은 인물이 많이 나온

2012. 3. 1. 21:07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홍성군은 충청남도 서부 지방의 중심지이다.

예산군이나 당진군, 서산시 등에 비해 평야가 적고 크게 자랑할 만한 산물도 없지만 홍성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이쪽 지역의 중심지로서 자리를 굳혀 왔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홍성의 자랑은 충절의 고장이라는 거다. 멀리 고려조의 최영, 조선조의 성삼문과 근대의 김좌진, 한용운, 김복한 등이 여기 출신이고, 구한말(舊韓末) 의병활동으로 홍성에서 900여 명의 의병이 순절하여 그 900의총(義冢)이 홍성읍에 모셔져 있다.

 

비록 땅은 좁아도 속 넓은 인물이 많이 나온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기소개서를 쓸 때에 꼭 들어가는 말이 충절의 고장 충남 홍성에서……이다.

 

홍성군은 조선시대의 홍주목()과 결성현()이 합쳐져서 홍성군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홍주목이었지만 일제 때에 개편되면서 강등된 거다. 내가 알기론 조선시대에 목이 있던 곳으로 시가 되지 못한 곳은 홍주뿐이다. 지금의 홍성은 축산낙농으로 널리 알려져 있긴 하나 그것은 최근의 일이고 예전에는 아주 낙후된 지방으로 서울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지명(地名)이었다.

 

홍성군은 홍성읍과 광천읍의 2, 갈산면, 결성면, 구항면, 금마면, 서부면, 은하면, 장곡면, 홍동면, 홍북면의 9면으로 되어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광천읍이 홍성읍보다 더 번화했다. 장항선에 있는 철도역 중에서 플랫폼에 열린 지붕이 설치되어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온양온천역과 광천역뿐이다.

 

내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알지만, 조금 아는 사람들은 내 고향이 홍천인 줄로 많이 알고 있다. 홍성과 광천을 강원도 홍천으로 혼동하기 때문이다. 홍성군의 중심이 홍성과 광천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홍성과 광천은 엄연히 다르다.

 

홍성은 지금도 홍주성이 보존되어 있고 홍주 감영(監營)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홍성군청이 있는 곳에 감영 건물이 보존되어 있고, 홍성읍내 한복판에 축소된 형태지만 홍주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아직도 읍에 불과하지만 홍성은 충남 서부지역의 중심지로 대부분의 관공서가 홍성에 밀집되어 있다.

 

홍성이 예전에 서산, 태안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하였다면, 광천은 옹암포구를 통하여 섬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특히 광천 장은 유명하여 충남 서부지역 5일장 중에서 가장 컸다고 들었다.

 

정확하게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광주광역시가 읍으로 될 때 광천이 함께 읍으로 되었다고 하니 예전의 광천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광천은 담산리 광산과 옹암포구 덕에 큰 호황을 누리다가 그곳들이 시들면서 같이 쇠락했다. 한때 광천 경제에 큰 힘이 되었던 제기산 미군부대의 철수도 광천 몰락의 한 축이 되었다. 광천이 누리던 호황을 대천시(보령시)가 대부분 가져가고 나머지는 홍성이 흡수하여 이제 광천은 25년 전의 광천보다도 더 퇴보한 추억 속의 고장이 되어 버렸다.

 

금마, 홍북, 홍동면 쪽은 평야지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갈산면과 구항면도 그런 대로 논이 많은 평야지대에 속하지만 서부면과 결성면, 은하면, 장곡면 등은 작은 야산들이 많아 산골이라는 느낌을 많이 준다. 결성면과 서부면은 바다에 접해 있어 좀 낫지만 은하면과 장곡면은 매우 척박한 산골 동네이다.

 

금마면은 홍성군에서 들이 가장 넓은 곳이다. 여러 산에서 흘러내린 목리천, 신리천, 봉신천, 월계천, 하장천, 상송천의 물줄기가 모여 금마천을 이루고 이 금마천이 금마면을 거쳐 삽교천으로 빠져 들어간다. 금마천은 하천 유역의 면적과 충적지가 넓어 다른 내를 낀 곳보다 들이 발달했다. 게다가 홍양저수지(뺏보)까지 있어 물이 풍족하여 가뭄을 타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어 홍성군에서 벼농사를 가장 많이 짓는 곳이 되었다.

 

홍북면은 용봉산 아래에 길게 퍼져 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그 쪽은 전부 사과나무 과수원이었으나 사과 가격이 떨어진 탓인지 요즘은 사과나무 밭이 많이 줄었다. 예전에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홍성에서 덕산으로 윤봉길 의사 의거 일에 행군을 하면 홍북면을 관통해서 용봉산 아래 길로 다녔다. 20리 길을 걸어서 갔다 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어도 연례행사로 다녔고 그 때마다 사과나무 밭을 보면서 동화에 나오는 얘기들을 떠올리고는 했었다.

 

홍동면은 근래 홍성군에서 인재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으로 알려졌다. 전 대법원장 유태홍 님을 비롯하여 홍성에서 인물이 났다하면 다 홍동면 출신이라고 한다. 오서산 정기로 태어난다면 당연히 그 아래인 장곡면에서 인물이 나와야할 이나 어떻게 해서 그 정기가 다 홍동면으로 흘러갔는지 의문이다. 홍동면은 장곡면과 인접해 있는데도 장곡면에서는 근세에 이렇다 할 인물이 나오질 않아 늘 안타까워하고 있다.

 

구항면은 홍성읍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어 홍성과 광천이 서로 확장해 가면 구항면이 가장 먼저 사라질 거다. 예전에 광천에서 홍성으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보면 구항면이 광천읍과 홍성읍 사이에 끼어 있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 보니 구항면은 갈산면과 홍성읍 사이에도 낀 상태로 홍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면 중에서 가장 세가 큰 곳이 갈산면이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생각이라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홍성군민 체육대회를 하면 갈산이 홍성읍과 광천읍을 제치고 우승을 한 적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보니 갈산 아이들이 씨름을 잘 하였고, 달리기도 잘 하였다. 갈산은 김좌진 장군 생가(生家)가 있고 사당도 거기에 있다.

 

서부면은 바닷가와 접한 곳이 많은 지역이다. 바닷가 쪽으로 고등학교 동창들이 여럿 살고 있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자주 다녔다. 현대가 바다를 막아서 만든 간척지가 서부에서 시작된 것인데도 사람들이 서산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내가 서부에 다닐 때는 그냥 넓은 바다여서 그곳을 막는다는 얘기를 듣고서도 믿지 않았으나 군에 갔다 와서 가보니 한참 막고 있었다. 지금이야 바다가 농토로 변했으니 거기 바다를 누가 기억이나 할 수 있으랴?

 

결성은 조선시대에 결성현이 있던 요충지이다. 한용운 선생 생가(生家)로도 유명하지만 예전에 내가 어릴 적에는 바닷가로 염전이 크게 있었다. 큰외삼촌이 염전 근처에 사시어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를 따라서 외갓집에 갔던 기억도 많고, 바닷가 뻘에서 게를 잡다가 물려 뒹군 적도 있었다. 결성은 결성 농요로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하였다. 나는 요즘에도 결성에는 일 년에 세 번은 꼭 들른다. 아주 가까운 친구가 있어 설과 추석, 그리고 모임을 만들어 거기서 만나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는 장곡초등학교와 오서초등학교를 나왔지만 중학교는 광천에 있는 광흥중학교를 나와서 중학 동창 중에는 광천읍과 장곡면, 은하면 그리고 보령시에 속하는 천북면 아이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고등학교는 홍성에 있는 홍주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동창 중에는 홍성읍, 갈산면, 구항면, 홍동면, 홍북면, 결성면, 서부면 등 홍성군 내에 있는 여러 읍면의 아이들이 골고루 섞여 있다.

 

그래서 각 면 단위까지는 다녀보지 않았어도 여러 곳으로 친구를 만나러 다니곤 했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광천에서 2년 반 정도 누나와 자취했고, 고등학교 때는 홍성에서 1, 광천에서 2년을 둘째 누나, 용주, 응주 등과 함께 있었다.

서울서 누가 고향을 물으면 홍성이라고 대답하고 다시 또 물으면 광천이라고 말한다. 홍성 광천은 사람들이 알아도 장곡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