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 20:58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장곡초등학교 오서분교가 문을 연 것은 1966년 가을 2학기 시작하고 며칠 지나서다. 당시 장곡초등학교 1학년, 2학년 학생 중 광성리, 오성리, 화계리 1구, 신풍리 1구, 죽전리 2구 아이들을 4학급으로 편성하여, 오서분교로 옮겨 오면서 오서분교는 시작되었다. 날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9월 1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미리 아는 바도 없고, 큰 감회도 없이 어느 날 오서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에 나는 장곡초등학교 2학년 2반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신풍리가 고향이신 오흥원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어서 우리에게 자상한 모습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다른 아이들은 혹 알았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학교를 옮기는 당일 날 알았다. 내가 둔했던 탓이기도 했지만 집에서도 얘기를 일체 듣지 못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 4개 반이 오서로 떠날 때, 장곡초등학교 전 학생이 교문에서부터 삼거리를 지나 도산리 윗동네까지 2열로 줄을 서서 박수를 쳐 주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그 날 인절미 2개, 사과 1개, 공책 2권, 연필 2자루를 선물로 받고 학교를 옮겼고 당시 오서분교는 운동장이 없어서 학교 땅으로 확정된 밭에서 기념식을 했다. 운동장은 없었어도 만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지역 기관장님들의 축사와 만세 삼창까지 불렀다. 교실이 2칸밖에 없었으나 반은 4학급이어서 우리도 처음엔 2부제 수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학교가 ‘오서’ 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당연히 오서산 때문이다. 오서산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의 학교마다 그 교가에 ‘오서산’이 안 들어 있는 곳이 드물지만 정작 학교 이름이 ‘오서’인 곳은 오서분교밖에 없었다. 오서의 오는 까마귀 ‘오(烏)’, 서는 깃들일 ‘서(棲)’ 그러니까 까마귀가 깃들여 산다는 뜻이다. 오서산 아래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오서산’의 ‘오서’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면서 그냥 ‘오서산, 오서산’하고 부를 뿐이다. 하기야 관심이 많다고 자부하는 나도 한동안 몰랐으니까…….
근래에 들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오서 분교’는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며, ‘오사(五四? 五舍? 烏舍?) 분교’였다고 한다. 나는 한 번도 우리 학교의 이름이 ‘오서’외는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많이 놀랐다. 장곡초등학교 오사분교에서 독립할 때는 오서초등학교로 된 모양인데 ‘오사’는 고려시대의 ‘오사소’에서 비롯된 이름 같다.
얼마 전에 장곡면지(長谷面誌)에 보니까 광성리에 오사소가 있었다고 전한다는데 ‘소’는 고려시대의 행정지명이다. 이 ‘소’는 천민집단이 사는 곳으로 알려진 적이 있지만 천민뿐이 아니라 일반 사람도 같이 거주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오사분교가 초등학교로 독립을 할 때에 학교 이름 때문에 여러 말들이 많았지만 오서산 아래에 있다는 가장 큰 이유로 ‘오서초등학교’가 되었다. 당시에 장곡초등학교 교장이셨던 김명진 선생님이 ‘오서초등학교’라는 이름을 무척 싫어하셨다고 들었는데 우리 학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오서산과 학교를 연결했으면 하는 바람이셨을 거다.
'오서'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신이 났다. 학교면 어떻고 분교면 어떤가? 그저 우리 마을에 학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날 일 아니던가? 학교가 생기면서 마을에 구멍가게도 생기게 되었으니 용돈이 없다 해도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서분교는 2년 뒤에 '오서초등학교'로 독립을 했다. 오서초등학교가 개교할 당시에 6학년은 없었다. 우리가 4학년이 될 때에 장곡에서 다시 온 5학년이 최고학년으로 1학급, 4학년이 1학급, 3학년이 2학급, 2학년이 1학급, 1학년이 1학급해서 모두 7학급이었다. 초대 교장으로 김종성 선생님, 교감으로는 이철재 선생님이 오셨다.
우리는 오서초등학교가 다른 곳의 초등학교보다 훨씬 좋은 학교로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열심히 뛰어놀았다. 지금은 다시 오서분교로 바뀌었고 앞으로 언젠가는 영원히 사라질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지난 30여 년 세월 속에 광성리, 오성리, 화계리, 신풍리, 죽전리 아이들에겐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이름 ‘오서초등학교’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때 거기서 같이 놀던 친구 중에 세상을 뜬 사람도 있고, 그 곳에서 근무하던 선생님 성함도 가물가물하지만 우리 오서의 역사는 시작된 거였다. 생전 잊지 않을 것 같았던 선생님들, 그 분들도 지금 '오서'라는 이름을 기억 하시고 계실지는 알 수 없지만 오서분교의 탄생은 오서산 아래 아이들에겐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아니 모든 학생 시절에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이 오서분교 시절의 교무실이다. 난 중학교 때만 아웃사이더였고 고등학교, 대학 시절은 늘 핵심 학생으로 생활해 왔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때를 얘기하라면 선뜻 떠올리는 것이 오서분교 시절의 교무실 공간이다.
오서분교는 처음에 교실 두 칸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학교에 교무실이 없었다. 그래서 임시 교무실로 사용하게 된 곳이 성벌 공회당에 덧대어 지은 예전 이발소였다. 공회당 한쪽 벽에 흙벽돌을 쌓아 지었던 이발소는 종국이네가 이사를 간 뒤에 그냥 비어 있던 것으로 학교가 들어오면서 그 공간을 교무실로 꾸며서 썼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공간이었지만 청소를 하려고 보니 방과 바닥에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던지……. 거기 청소를 우리 집 머슴 아저씨가 하셨다. 이발할 때 쓰던 의자도 그대로 있었고 구석의 세면대도 그대로 있었던 것을 모두 치우고 선생님들 책상과 의자를 들여놓았다. 그때 나도 돕는다고 뛰어다녔지만 사실 심부름이나 했지 내가 힘 쓸 일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교실 두 칸과 화장실만 달랑 지어놨으니 선생님들은 거처할 공간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방은 비닐 장판인가를 깔아서 숙직실 겸 보관창고로 쓰고 넓은 공간에는 선생님들 책상을 놓았다. 학급은 1학년과 2학년 각각 두 학급씩 4학급이지만 교실은 2칸이니 학년별로 오전, 오후 수업을 하였고 수업이 없는 두 선생님이 교무실을 지키는 것이 일이었다.
난 오전반일 때 오후에, 오후반일 땐 오전에 늘 교무실에 있으면서 선생님들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여러 여건들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고, 그것은 선생님들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와 동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교무실에 가서 놀았고, 오후반일 때는 오전부터 나가 교무실에서 알짱거렸다. 집에서 학교까지 3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으니 아무리 오후반이라고 한들 학생이 집에서 빈둥거릴 수야 없지 않은가? 게다가 운동장이 없으니 다른 곳에 갈 수도 없어 늘 교무실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교무실에서 놀다가 간혹 아버지를 만나면 쫄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나무라신 기억은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가 장곡에서 온 것이 9월 하순쯤이었으니 곧 추워져서 그 교무실에 커다란 난로를 놓았다. 방에는 구공탄을 쓰고 난로에는 나무를 연료로 썼다. 학교 지을 때 쓰고 남은 나무쪼가리가 공사장 주변에 널려 있어 그것들을 땔감으로 썼다. 나는 난로가 피워져 있으니 '집에 가서 고구마 가져와라. 김치 가져와라. 주막에 가서 막걸리 받아와라' 등등 그런 심부름은 많이 하였다.
학교가 처음 생겼을 땐 마을 어른들이 교무실에 자주 찾아왔고 오후엔 으레 술자리가 벌어졌다. 간단한 안주나 술잔, 젓가락 등은 거의 내가 집에서 날랐다. 우리 담임선생님이 장석민 선생님, 2반 담임 선생님이 최홍진 선생님이셨고 1학년 선생님들 성함은 송운섭, 구기은 선생님이셨다.
우리는 오후에 냇가로 선생님들과 물고기 잡으러 무척 많이 다녔다. 물고기를 잡아오면 내가 집에 가서 양은솥과 양념, 국수 등을 가져와서 끓였고, 우린 국수를, 선생님들은 술을 드셨다.
지금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가고 싶다. 아니 우리 용범이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도시락을 싸주며 보내고 싶다. 그땐 그것이 행복인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하는 생활이 너무 너무 즐거웠다. 그 선생님들 지금은 다 정년 퇴임하셨을 연세가 되셨다. 근래에 최흥진, 장석민 선생님을 찾아뵈면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누구나 다 자기가 다닌 학교를 '우리 학교'라고 말한다. 그것은 꼭 초등학교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나와 관계있는 것을 얘기할 때 '우리'라는 말을 쓴다. 우리 민족은 대부분 '나'를 '우리'로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오서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오서'가 '우리 학교'임에 틀림없다. 공동체로서의 '우리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오서'를 '우리 학교'라고 부르는 데는 그보다 더 각별한 관계로서의, 공동체적인 입장이 아닌 나로서의 우리, 즉 '내 학교'란 의미가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나만 가지고 있는 편견이지만 꼭 편견이라기보다는 그만큼 다른 사람보다 애착이 강하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우선 학교는 우리 밭(내 밭?)에 지어졌다. 처음에 학교를 짓고자 할 때, 장곡초등학교의 분교가 광성리로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지정리 쪽과 광성리 쪽으로 의견이 분분할 때 아버지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광성리로 오게 되었다. 광성리로 오면서 문제가 된 것이, 학교를 야산에 지으면 땅값이 훨씬 헐한 것을 광성리 성벌은 산이 아니라 밭이어서 문제였다. 이 때 아버지가 우리 뒷밭 아홉 마지기를 내어 놓으셨다. 밭 값을 얼마라도 받으셨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때 소문으로는 아버지가 밭을 희사하신 것으로 들렸다. 이 밭은 학교를 안 지었다면 내가 상속받았을 땅이다.
뒤에 잠깐 육성회장을 맡으셨던 아버지는 오서분교 시절에 교장이나 다름없으셨다. 흙으로 지어진 엉성한 교무실에 날마다 들르시어 선생님들이 불편하신 점은 없는지 확인하시고, 큰 일하는 집이 있으면 꼭 선생님들 식사를 대접하도록 하셨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정성을 쏟으시니 선생님들도 각별하게 생각하셨고 이는 지금의 교사와 학부형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솔직히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나 또한 학교에 더더욱 애착을 가질 수밖에…….
학교에서 무엇이든 필요한 물건이나 연장은 다 내가 집에서 날랐다. 선생님들은 무엇이든 없으면 내게 집에 가서 가져오라고 시키셨고 나 또한 당연하게 따랐다. 지금 같으면 도저히 상상이 안 될 일들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다. 학교야 교육청에서 지은 거지만 초기엔 마치 우리 집 건물처럼 생각될 정도였으니 내가 '우리 학교'라고 부를 때 '우리'는 남들이 말하는 일반적 의미보다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긴 해도 오서분교로 부임하시는 선생님들이나 이임하시는 선생님들은 꼭 집으로 오셔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고 그 경우 대개 우리 집에서 식사를 대접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처럼 '우리 학교'라는 말이 남다르게 느껴질 사람은 경후일 거다. 경후도 바로 학교 앞이 집이었고, 경후 아버지도 아버지만큼이나 학교에 관심을 쏟으셨기 때문이다. 나와 경후는 아래윗집에 살면서 학교 심부름이라면 늘 같이 했고 성벌에 사는 다른 아이들보다 교무실에 많이 드나들었다.
우리 둘 사이도 가까웠지만 아버지와 경후 아버지 사이가 보통 관계가 아니셨고 두 분이 학교 일에 가장 열성이셨다. 그리고 경후도 학교를 사랑하는 일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성파였다. 경후와 나는 지금도 학교 일이라면 최우선으로 알고, 예전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
오서분교 시절을 생각하면 또 빼어놓을 수 없는 사람이 얼마 전에 고인(故人)이 된 내 아우 용주이다. 학교 심부름을 내가 다 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실제로 한 것은 그 사람이었다. 나는 형이라고 내가 받은 일은 모두 아우에게 대신 시켰으나 용주 아우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뛰어다녔다. 용주 아우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데 학교는 오서 3회로 1년 후배였다. 아우는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쭉 고향에 있었기 때문에 오서초등학교의 변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또 오서초등학교의 학부형으로 학교 일에 참여하기도 했다.
우리보다 한참 후배인 어덕말 명숙이가 우리만큼이나 학교를 잘 알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고는 깜짝 놀랐다. 명숙이는 오서 6회 졸업생이니 나보다는 4년 후배이나 실제 나이로는 더 차이가 많을 것이다. 그런 명숙이가 나나 경후만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부분들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또 많은 선배와 후배들을 꿰뚫고 있어 명숙이가 오서초등학교의 또 다른 지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긴 4, 5년의 나이 차이야 사회에 나와 무슨 차이가 있으랴?
나는 지금도 오서에 애착을 가지고 학교와 관계된 일에 열심인 명숙이를 보고 많이 놀랐다. 나는 나와 가까운 몇 사람만 우리 오서를 사랑하고 지키려한다고 믿었으나 의외로 많은 후배들이 우리처럼 학교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반가웠다. 명숙이 말고도 얼굴을 보지 못한 한참 후배들이 우리처럼 오서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들었다.
이제 오서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 언젠가는 그 이름을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한참 전에 오서초등학교가 아닌 오서분교로 내려앉았다. 학생 수가 적어서 폐교가 될 거라는 얘기도 여러 번 나왔고, 실제 교육청에서 그런 작업을 하기도 했다. 우린 그때 폐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말 백방으로 노력했다. 오서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던 경후가 여일 제쳐놓고 다니며 손을 썼다.
이런 와중에 어떤 동문들은 차라리 폐교하고서 아이들을 장곡으로 보내는 것이 더 낫지 않으냐는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오서초등학교는 단순한 학교로서의 공간만이 아니라 오서산 아래 모든 사람들의 공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학교가 폐교가 되면 그와 관련된 모든 문화가 다 사라진다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시우 수필집 > 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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