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 20:49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우리 마을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주 작은 산이 있다. 우리 집 뒤쪽 담장에서 불과 10미터도 안 떨어진 곳이어서 우리 집도 여기에 의지해 지은 것이 아닌가 싶지만 성벌 쪽에선 산 가까이 있는 집이 서너 채 뿐이고 동살뫼는 거의가 이 산자락에 의지해 집이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말은 좀 우습지만 이 산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 영 납득이 가질 않는다. 오서산 자락이 광제 위에서 끝이 나고 광제 아래로는 옻밭들이라는, 돌은 많지만 전부 밭으로 된 들판이고 그 옻밭들 아래가 성벌이다. 성벌 아래 쪽 끄트머리에 인절미처럼 생긴 작은 산이 사방이 들판인 그 가운데 우뚝하게 서 있다. 산 아래 쪽으로 시야가 아주 넓게 트인 들판이 멀리 홍동까지 이어진다.
참뱅이에서 안골로 내려 온 산줄기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그석재 아래로 해서 용배, 앙산에서 끝난 줄기는 내를 건너 멀리에 있다. 그러니까 오서산에서 내려오는 큰 내 둘 사이의 가운데쯤에 독립하여 작은 산이 하나 오뚝 서 있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그렇다고 둔덕이라고 하기는 좀 그런 모습이지만 들판 한 가운데에 서 있고 그 위에는 작은 나무와 잡초가 우거져 있어 우리가 뒷동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을 끼고 있는 성벌이나 동살뫼, 그리고 오서산 자락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 뒷동산으로 불리고 있다. 이 뒷동산에 올라가서 보면 오서산 아래의 사방이 다 잘 보인다.
이 뒷동산은 우리 집 쪽에서는 별로 높지 않아 쉽게 오를 수 있지만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오르려면 지세 자체가 낮아 숨이 가빠진다. 즉 산의 정상은 평평하게 길게 이어져 있지만 지형상 남쪽보다 북쪽이 낮아 북쪽에서 높은 형태로 되어 있다. 이 뒷동산이 우리 어릴 때는 아주 좋은 놀이터였다. 겨울철에는 여기에 올라가서 놀 일이 전혀 없었지만 봄이나 여름철에는 이 산에 자주 올라가서 놀았다. 특히 여름 방학 때 애향단 활동은 늘 여기 모여서 했다.
광성리 1구 아이들은 여름 방학 이른 아침에 이슬을 털면서 여기에 올라와 체조도 하고 씨름도 했다. 이 동산 위에서 소리를 치면 성벌과 동살뫼 새뜸까지는 그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것뿐이랴? 어릴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들으니 청춘남녀의 밀회 장소로도 아주 인기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예닐곱 살 정도 되었을 때 동살뫼로 가설극장이 들어와서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보니 확성기를 동산에 들고 올라와서 광고를 하는 거였다. 이 동산만 산이고 다른 마을로 통하는 곳은 시야가 다 트였기 때문에 소리를 전달하는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았던 거다.
산이 남북으로 길게 400여 미터가 조금 안되고 동서로는 좁게 100미터쯤 된다. 산위에는 참나무, 소나무 등이 드문드문 서 있고 땅에는 잔디와 잡초가 자라서 어디나 앉기 좋게 되어 있었다. 산의 북쪽 끝자락에 큰 묘가 2기 있었다. 묘 마당은 제법 넓은 잔디밭이라 아이들이 올라와서 놀이를 하기에 좋았다. 마당 양 끝으로 두 개의 문인석이 서 있었고 그 마당 아래에 아름드리 소나무도 한 그루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큰 묘는 임진왜란 때의 장군인 신립 장군의 묘였다고 한다. 우리 집 마당 끝에 있는 그 큰 기와집에 신립 장군의 직계 후손이 살았다고 했다.
사실 이 부분은 확인된 것은 아니어서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김좌진 장군이 소년 시절에 자주 놀러왔다고 들었다. 그리고 김좌진 소년이 그 기와집 서까래를 손으로 잡으며 집을 한 바퀴 도는 신력(神力)을 보여줬다고 했다. 신립 장군의 후손이 신태환(?)이었다고 하나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어렸을 때 봤던 묘도 이미 도굴꾼의 손을 거친 뒤였다. 그때는 몰랐지만 두 봉분 사이에 길고 깊게 파여진 흔적이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누가 부장품을 훔치려고 팠던 거였다.
10여 년 전에 그 묘의 주인이 산을 팔았고, 묘의 문인석도 팔았다고 들었다. 산을 팔았으니 묘를 옮겨 가는 것이 상식이다. 산을 산 만중이 형이 파묘 자리에 자기 부모 묘를 썼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후손이라는 작자가 묘에서 나온 유골을 냇가에 버리고 갔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이 얘기가 맞는 것이라면 그 묘 속의 주인공이 신립 장군은 아닌 것 같다. 이미 400여 년이 지난 유골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산을 팔아야할 정도로 살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조상의 유골을 버리고 갈 사람들이라면 그 집안이 망하게 된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묘 마당 아래 산 끄트머리에 낡고 허름한 교회가 서 있었고 그 교회는 ‘대한 기독교 침례회 화계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 교회는 역사가 꽤 되었지만 내가 거기 있을 때까지는 교세가 크게 일어나지 못하다가 지금은 안골로 옮겨 갔다.
어려서 놀던 곳이, 커서 보니까 작아졌더라는 얘기를 많이 듣지만 내게 뒷동산은 그런 곳이 아니다. 난 어려서 보았던 것들이 커서 가 보니 작아졌더라는 얘기에 크게 수긍하는 편은 아니다. 무엇이든 상대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것에 크게 매달리거나 전적으로 믿는 일도 없었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뒷동산 남쪽 끝인 우리 집 가까운 곳에 닥나무가 많이 있었다. 닥나무는 한지를 만드는 원료가 된다고 들었다. 닥나무는 나무껍질과 뿌리껍질이 아주 질기어 겨울철 팽이채로 각광을 받았다. 어느 해 겨울인지 가물가물하지만 이 닥나무 뿌리를 캐기 위해 인근 마을 아이들까지 벌 떼처럼 밀려온 적이 있었다. 나도 두어 가닥 얻어다가 팽이채를 만들었다. 그때는 팽이채 만들 헌 옷가지도 없을 때였다.
초등학교 5, 6학년 경에 산 아래서 놀다가 굴을 파기 시작해서 4-5미터까지 파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 동살뫼 애들도 내가 굴을 판다는 얘기를 듣고 굴을 그 쪽에 제법 크게 팠다. 흙이 마사토여서 쉽게 무너져 내리질 않았기 때문에 길게 파 낼 수 있었다.
동살뫼 쪽으로는 산 아래 자락에 대나무가 많이 자랐는데 그것들을 주인 몰래 베어 오는 아이들도 많았었다. 동네에 무슨 큰 행사만 있으며 아이들과 올라가서 놀던 뒷동산, 요즘엔 오르는 아이들이 없어 길도 없어 진 모양이다. 나무도 예전처럼 작은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카시아나무를 심는 바람에 완전히 산을 버린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릴 때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나 지금 생각하니 이 동산은 아주 예전에 사람의 힘으로 만든 산이 아닌가 싶다. 즉 광성리라는 지명과 연관시킨 것으로 성에서 넓게 트인 아래쪽을 관망하기 위해 만든 가산(假山)이었을 것으로 짐작해 보았다.
지금은 죽전리 위가 다 저수지가 되어 그 아래로는 보이지도 않지만 예전에 배가 들어오는 길이 새뜸 아래 갱변말까지 이어졌다고 가정하면 그 바다로 들어오는 배들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산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한 추측은 아닐 거다.
오서산에 있는 내원사는 백제시대에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 근거가 확실하다면 그 당시에 오서산 아래로 들어오는 길은 오천에서 광천으로 이어지는 뱃길이었을 것이고 그 뱃길이 화계리까지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 마지막 부흥운동이 임존성에서 있었고 그 임존성이 지금의 광시면과 장곡면 산성리 부근이라고 하니 광성리가 백제시대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뒷동산을 그 무렵에 필요에 의해서 쌓았던 가산으로 보는 것 또한 무방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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