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 20:42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사실 나는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52세의 연세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은 열두 살이면 그 때의 일을 다 안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알기에는 너무 크고 넓은 어른이셨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가장 큰 기억은 아버지가 무척 두려웠던 분이라는 거다.
아버지는 청양에서 태어나셨다고 한다. 내게 있어 가장 직계인 윗분이 증조부시다. 이 증조부 생전에 할아버지 형제분들이 청양을 떠나 오서산 아래 광성리와 신풍리, 화계리로 오셨다고 들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광성리로 오시어 터를 잡으시고 뒤에 상풍 할아버지와 새뜸 할아버지가 이사를 오시어 정착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장곡초등학교를 졸업하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버지 어린 시절에 광성리로 오셨던 게 확실하다. 아버지께서 장성하신 뒤에 청양으로 외가를 찾아 다니셨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은 그쪽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다.
아버지가 장곡초등학교를 다니실 적에는 학업 성적이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짐작한다. 큰고모에게서 듣기로는 아버지가 학교에 다니실 때 일본인 교장 선생이 아버지를 무척 귀여워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공부를 잘 한다고 우리 집에 찾아와서 할아버지께 치하를 한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1917년에 태어났으니 그때는 일제 치하이고 그때만 해도 까마득한 산골 오서산 아래였으니 아버지가 무슨 독립투사의 길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고 장곡초등학교를 다니던 학생으로 보통 학생보다는 뛰어났던 것으로만 짐작한다.
아버지가 장곡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신 것이 아마 20대 초반부터이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1940년대 이전에 만든 신풍리 어덕말 방죽공사를 아버지가 하셨다는 것으로 보아 짐작하는 거다. 사실 아버지가 어떠한 직책으로 그 일을 하셨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그 때의 소문에 아버지가 마신 막걸리가 그 방죽의 물보다 더 많을 거라고 했다니까 아버지는 거기의 현장 책임자나 감독이셨던 것 같다.
어느 시기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버지가 어떤 일의 실패로 실의에 빠져 집에 계셨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실의에 빠진 아버지에게 할머니께서 그 당시의 쌀 20짝 값을 주시며 서울에 가서 바람을 쐬고 오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서울에 가시어 호롱기와 자전거, 벽시계 등을 사 가지고 오셨다. 이런 신식 것들은 그 당시에 오서산 아래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라 연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구경하러 우리 집으로 몰려왔었다고 들었다. 나도 자전거는 보지 못했지만 집구석에 먼지가 뿌옇게 앉은 채로 있었던 호롱기와 벽시계는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가장 시련을 겪은 것은 한국 전쟁이었다. 북괴군이 장곡면을 점령한 후에 장곡지서에 끌려가 얼마나 맞았는지 며칠 동안 거동을 못하셨고, 집안에 있던 땅 문서와 가재도구를 모두 지서에서 강탈해 갔다.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 분들이 대부분 좌익으로 돌아섰으나 아버지는 거기에 동조하지 않으신 것이 화근이 되셨다고 한다. 6.25 전에도 오서산을 끼고 많은 빨치산들이 암약(暗躍)을 하였고 화계리에는 좌익 성향을 가진 분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다 아버지를 눈엣가시로 여겼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집으로 오신 뒤에도 늘 감시를 당했고 집안 식구 모두가 반동으로 몰려 적지 않은 고초를 겪다가 우리 국군이 다시 올라왔을 때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다.
늘 감시를 당하고 있었기에 멀리 피신할 수도 없었던 데다가 상황이 급해지자 좌익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자 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이 위급한 상황에 친구 중의 한 분이 살짝 알려주어 담을 넘어 콩밭을 기어 피신을 하셨다. 집에 남은 할아버지와 어머니, 고모들은 그들이 대신 분풀이를 할까봐 정신이 없으셨다고 들었다.
새뜸 사시는 원기 형님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시어 방문을 잠그고 앉아 계셨고 어머니와 다른 가족은 이불을 덮어 쓴 채 숨소리도 크게 못 내고 계셨다고 한다. 그 와중에 아버지를 찾는 사람들이 밤새 대여섯 번이나 들이닥쳐 아버지를 찾아내라고 윽박질렀다고 했다.
그 밤이 새니까 이미 국군이 광천, 장곡, 청양을 수복하고 북괴군은 밤에 북쪽으로 서둘러 도망을 쳤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전날 밤까지 설쳐댔던 좌익들은 북으로 도망을 했거나 국군에게 잡혀 대부분 총살되었다.
나중에 다시 우리 군이 밀릴 때는 북괴군이 충청권까지는 들어서지도 못했지만 아버지는 넷째 고모가 사시는 큰 산 너머로 피신을 가셨다가 무사히 돌아오셨다.
얼마 전에 그때의 상황을 대전에 사시는 큰당숙께 들을 기회가 있었다. 큰당숙은 아버지와 열세 살 차이로 당시 아버지를 모시고 큰 산 너머로 피신을 같이 가셨다가 돌아오셨다. 장곡과 광천이 모두 회복에 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돌아오시는 도중에 북쪽으로 떠나는 좌익계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고 하신다. 그 와중에서도 아버지는 그분들께 술을 사시면서 고향에 남아 있으면 책임지고 살 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나중에 산으로 피신했던 장곡면 부책임자가 우리 마을 사람이었다. 그 아저씨를 우리 집 광에 숨겨주시고 치안이 안정이 된 뒤에 자수를 시켜 그 아저씨는 10여 년의 감옥을 살고서 나와 늙도록 고향에서 살았다. 그때 고향을 떠나서 북으로 간 사람들에 온전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향이 대천인 이문구님이나, 청라 쪽이 고향인 김성동님의 글에 자주 나오는 얘기지만 오서산과 성주산이 청양 칠갑산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공주로 해서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라 우리 오서산 안쪽까지 빨치산들의 활동이 많았고 북괴군이 아닌 자생적 좌익이 많았던 거였다. 그 때 만약 아버지가 좌익에 가담했더라면 나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고 민주당 정권 때 아버지는 민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셨다. 내 기억으론 오서산 아래에서 아버지만큼이나 컸던 분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을 지낸 화계리의 김지준 씨가 있지만 오서산 아래 장곡면의 지역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비록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시고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셨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 아버지가 오서산 아래 가장 큰 인물이었다고 지금도 자신한다.
아버지는 어디서 누구에게 배우셨는지 모르지만 한문에 대해서도 웬만큼 이해가 있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유품을 정리하다보니 한지(韓紙)로 된 낡은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글자가 한문이라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었다. 나중에 서울 막내 외삼촌에게 물었더니 아버지가 한시 차운(次韻)한 것이라 하셨다. 지금 그런 유품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하나 뿐인 아들인 아버지가 무척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우셨을 거였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앞가림 확실하게 하시고 인덕이 많아 어디가도 대접을 받고 남들이 다 좋아하니 오죽이나 좋으시었으랴!
나는 늘 아버지를 두려워했다. 한 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도 두려워했고, 아버지가 내게 하라고 했던 일은 항상 조심스럽게 했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새벽에 일기 검사를 하시곤 했다. 나는 길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하루에 몇 번이고 인사를 해야 했고, 아버지가 장곡에 나가 술을 드시고 늦도록 안 오시면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가야 했다.
아버지는 집에 계신 날보다 장곡에 나가시는 날이 더 많으셨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이 드신 분들을 친구로 두시어 아버지 친구 분들의 손자가 나보다 나이가 더 든 사람이 많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성격보다는 부드러우셨지만 화가 날 때의 불같던 모습은 할아버지를 닮으셨다고 했다. 동기간에 정이 많으시어 동생들이나 사촌 동생들에게는 무척 자상하고 다감하셨고, 이웃들에게는 아주 인자하셨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분들도 많이 사귀셨지만 많이 아래인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셨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귀어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분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정도였다. 아버지는 늘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좋아하셨다. 평생 양복 한 벌 안 해 입으시고 나들이 하실 때는 한복만 입으셨다.
말술을 드셨고 담배는 연세가 많이 드신 뒤에 시작하셨다고 한다. 매운 음식을 무척 좋아하시어 얼마나 맵게 드셨는지 보는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을 정도이셨다.
아버지는 산나물이나 푸성귀를 아주 좋아하셨지만 고기와 생선 등 육류도 무척 좋아하셨다. 내가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고기를 많이 먹고, 생선회 같은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은 다 아버지의 영향이다.
아버지는 52세 되시던 봄에 거짓말처럼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사인(死因)이 뇌출혈이라고 한다. 52세 되시던 봄에 수염을 기르시어 보기에 무척 위엄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의 나이 드신 친구 분들이 나이가 어린데 무슨 수염이냐고 촛불을 대어 끄슬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깎으셨다.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세상을 뜨셨다. 그래서 아버지 친구 분들이 그 일을 오래오래 후회하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돌아가신 것과 수염이 무슨 관계가 있으랴.
아버지 덕에 광성리로 왔던 오서초등학교에서 경옥이 누나가 1회, 내가 2회, 용주가 3회, 응주가 5회로 넷이 졸업을 했다. 아버지는 오서초등학교 초대 육성회장을 지내시다가 돌아가시어 오서초등학교장(烏棲初等學校葬)으로 장례를 모셨다.
내가 꿈꾸는 이상형의 인물이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의 급시우(急時雨) 송강이다. 급할 때에 내리는 고마운 비, 이 얼마나 좋은가?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바로 급시우이셨다. 다정다감하시고 의리 높으시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내 것 다 털어 주시고…….
지금 집에 아버지 젊으셨을 때의 사진을 모사한 초상화가 있지만 이 초상화는 생전의 얼굴과 너무 동떨어진 모습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즈음의 모습은 사진에서 본 도산 안창호 선생님과 너무나 흡사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전혀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것 같은 초상화를 보면서 혜경이가 할아버지 모습과 안창호 선생님의 사진이 너무 닮았다고 얘기하는 거다.
가문(家門)이 발전하려면 아버지보다 아들이 나아야 한다는데 나는 늘 아버지의 연세 때의 모습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아버지가 사셨던 만큼의 나이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버지는 오서산 아래의 큰 바위 얼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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