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에 불은 꺼지고

2012. 2. 28. 18:08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우리 집에는 사랑방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사랑방이라는 개념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났다. 수업을 하면서 알고 보니 내가 말하는 사랑방은 다른 지역의 행랑방과 겹치는 거였다. 우리 집은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광과 헛간, 외양간이 있는 아래채가 자 형으로 되어 있었다.

 

본채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있는 사랑채는 다른 지역에서는 행창채로 얘기되는 거였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 고장에서는 대부분 사랑채라고 불렀고 거기에 있는 방을 사랑방이라고 불렀다.

 

나이가 들어 여러 곳에 다니다 보니 사랑방은 행랑채와는 다른 거였다. 주인 남자가 거처하면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생활하는 공간이 사랑방이었고, 행랑채는 대개 하인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나중에 노비 제도가 폐지된 후에는 행랑 식구들이 사는 거처로 바뀌었다. 1920년대의 소설, 화수분이나 운수 좋은 날에 나오는 행랑아범이라 불리던 사람들이 바로 자기 집도 없이 남의 집 행랑채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광성리 1구에서 이런 사랑방(행랑방)이 있는 집은 많지 않았다. 70가구에 사랑방이 있는 집은 열 집 정도밖에 안 되었을 거다. 쉽게 얘기해서 집이 세 칸이나 네 칸 단독으로 있으면 사랑방이 없고 아래, 위로 두 채는 되어야 있었다. 또 사랑방이 있다고 해서 어느 집이나 다 사람들이 많이 왔던 것은 아니다. 그 집이 조금은 살 만하고 인심이 후해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사랑방은 동네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했다. 아버지는 누구를 막론하고 차별하지 않았으며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 잘 곳이 없다고 하면 당연히 재워주고 먹여 주었으니 우리 사랑방은 늘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거쳐 가는 곳이었다.

 

사랑방이 있던 행랑채는 그 부엌을 통해 대문이 있었으나 내가 어렸을 때 그 대문은 철거하고 헛간과 행랑채 사이에 대문을 만들었다. 그 시절에는 대부분 행랑채를 통해서 들어 올 수 있도록 대문이 행랑채 부엌을 통하게 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그 문을 아예 없애고 따로 만들었던 거다. 대문이 부엌을 통하게 되면 사람이 통행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으나 지게에 많은 짐을 지고 들어 올 수가 없었고, 소달구지가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 불편했었다.

 

그렇게 대문을 옆으로 옮기고 나니 아래 행랑채는 부엌과 방 두 칸으로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부엌에서는 여름만 빼고는 늘 소여물을 끓여 방이 따뜻했다. 아랫방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곳이고 윗방은 머슴 아저씨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저녁 늦게까지 사랑방에 나가서 계셨고 동네 어른들이 놀러 오시어 웃음소리와 얘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은 드물었지만 아래로는 나이 차가 꽤 나는 젊은 사람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위로나 아래로나 나이를 떠나 다 두루 좋아하셔서 젊은 분들 중에도 아버지를 잘 따르는 사람은 우리 사랑방에 자주 왔었다.

 

경후 아버지, 기동이 아버지, 선기 아버지, 영식이 아버지, 들마당 은낙이 형님이 젊은 분들이었고 광헌 아버지, 영철 아버지, 영주 형네 아저씨 등이 연세가 드신 분이었다. 머슴 아저씨는 윗방에서 새끼를 꼬거나 멍석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고, 집에 술이 있는 날은 술상을 내가기도 하였다. 방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장지로 된 아래 위를 트면 스무 명 정도는 앉아서 있을 수 있었다.

성벌에 공회당이 생기기 전에는 무슨 회의 같은 것을 하려면 전부 우리 사랑방에서 했다. 여름철에야 더우니까 밖에서 모여도 괜찮았지만 다른 계절에는 우리 사랑방이 공공장소가 되었다.

 

한번은 동네 영식이 삼촌이 영식이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고 말이 나서 동네에서 영식이 삼촌을 혼내주려고 마을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사랑방에 모인 적이 있었다. 우리도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거기 끼었다. 선기 아버지 얘기가 자기가 불을 톡 끄거든 멍석으로 덮어씌우고 사정없이 두들겨 패라고 해서 불안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영식이 어머니와 삼촌이 다 불려 와서 서로 자기주장을 하는데 그 얘기가 중언부언하고 어떻게 결말이 안 나서 그냥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우리 동네 어른들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잘 곳이 없으면 사랑방으로 왔다. 지금이야 다 돈을 받고 잠을 재워주지만 예전에는 잠을 재워주면 밥까지 먹여 보내는 것이 상식이라고 할 만큼 당연한 일이었고 더 심한 경우는 약간의 여비까지 주는 거였다. 잘 살아서가 아니고 아버지나 어머니나 인정이 많으셔서 어려운 사람이 오면 모른 체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광천에 사시던 도번 할아버지가 오셔 사랑방에 한 2년 기거하셨다. 도번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당숙으로 노년에 혼자되어 갈 곳도 없고 해서 우리 집에 와 계셨던 거다. 성질이 불 같으셨고, 칼 같아서 어른이고 애고 가까이 하기 어려운 분이었다.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완전히 머슴 아저씨가 쓰는 방이 되었지만 머슴을 사는 분이 동네 아저씨들이면 대개 저녁에는 집에 가서 주무셨기 때문에 사랑방은 비어 있을 때가 많았고 명절 때가 되면 우리 친구들이 모여와 난리를 피우고 놀았다.

 

시골에서는 나이가 어릴 때면 대여섯 살 차이까지는 같이 어울려 놀기 때문에 명절 때 우리 사랑방에 모이는 아이들 수는 열 대여섯은 되었다. 설이나 추석이 되면 막걸리를 양동이에 받아다 놓고 콜라를 섞어서 마시며 늦은 시간까지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한동안은 수원 외삼촌이 와서 기거하신 적도 있었다. 수원 외삼촌은 어머니 사촌오빠신데 원래 오서산 아래에서 나신 분이나 젊은 시절에 수원으로 이사를 가셨다고 했다. 천성이 부지런하시고 손재주가 뛰어나셔서 자력으로 목수와 미장을 터득하신 외삼촌은 우리 사랑방에 기거하시면서 집안의 모든 일을 다 손수 다듬어주셨다. 연세가 많이 드신 뒤에는 다시 수원 댁으로 올라가셨다.

 

내가 군에 가고 머슴을 두지 않고부터는 사랑방에 올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넓고 크다고 할 우리 집에 어머니 혼자 계시니 조카인 형호가 있다고 해도 적적하셨을 거였다. 그래서였는지 오서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 우리 사랑방에서 살게 되었다. 최무열 교감선생님이셨는데 사모님과 막내아들하고 해서 세 식구였다. 아들 둘은 대전에 따로 살고 있다가 방학 때면 와서 지내다 갔다. 그 집 막내는 나를 아주 잘 따랐고 나도 무척 귀여워했다. 그 교감선생님이 2년인가 거기서 살았고 그 뒤에는 역시 오서초등학교 이필하 선생님이 와서 살았다.

 

이필하 선생님은 반계가 고향이신데 전주 이()가 덕천군파(德泉君派)로 나보다 두 항렬 위라 할아버지뻘 되셨다. 사모님이 어머니에게 무척 잘 하신다고 들어 나도 고맙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모님이 딸만 셋을 두어 그게 큰 걱정이었다. 선생님이 유복자(遺腹子)여서 집안에서 반드시 아들을 두어야 한다고 성화였다고 한다.

 

내가 봐도 선생님은 너무 순하고 착하시어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사모님이야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그 선생님네 애들은 여자애들이라 그랬는지 나를 잘 따르지 않았고 나도 그때는 대학 3, 4학년 때라 방학이라도 집에 가 지낸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선생님하고 사모님만 조금 알고 지냈을 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랑방도 주인을 잃어버린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