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28. 18:03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우물 안에서 하늘을 보다.고향, 추억)
경후네 집은 우리 집과 붙어 있었다. 우리 집 들어오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기동이네 집과 광헌네 집이 있었고 경후네 집은 자갈로 된 담불을 경계로 붙어 있어 담불을 통해 오가는 사이였다. 그러니까 둘 째 고모네가 살던 집과 마찬가지로 대문을 통해 드나든 것이 아니라 담을 넘어 다녔다. 담장이 두 집 경계였지만 우리 대문을 통해 경후네 대문으로 가려면 400미터는 족히 되는 거리였다.
경후네 집은 우리 집보다도 대식구였다. 우리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경후네 큰아버지 가족과 경후네 가족이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큰집이 5남매, 경후네가 7남매였다. 이때 경후 동생들 미성이, 호근이, 보근이는 조그맣거나 간난아이였다.
그렇게 대식구에다가 경후 증조부가 90이 넘으신 연세로 살아 계셨으니 얼마나 북적거렸을지는 짐작이 간다. 그래서였는지 아주 어릴 때는 경후 어머니가 경후를 우리 집으로 자주 데리고 오셨었다. 그러다가 큰집이 광천으로 이사 가고 경후네만 남게 되었다.
잘은 모르지만 경후네 윗대는 아주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경후 큰아버지가 무슨 사업인가 하신다고 재산을 다 날렸던 모양이다. 무슨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었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한데 좌우간 우리 태어나기 전에 이미 망했던 것으로 짐작한다. 그게 한지(韓紙) 공장이 아니었나 싶은데 이미 값이 싼 종이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을 때니 소규모의 한지 공장이 될 리가 없었을 거였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경후 아버지가 광성리 이장을 보셨다. 경후 아버지는 많이 배우시지는 않았지만 오서산 아래에서는 아주 출중한 분이셨다. 아버지와 함께 오서초등학교가 광성리로 올 수 있도록 한 공로자이며 오서산 아래의 크고 작은 공사는 거의 경후 아버지가 이끌어 오신 거라고 한다. 새마을 회관이 생기기 전에 벌써 성벌에 공회당을 지으셨고 나중에 새마을 회관을 지을 때는 다른 마을에서는 보지 못한 2층을 지으셨다.
지금은 유명무실해졌지만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에 광제 위의 산을 목장으로 개발한다고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치우는 큰 공사가 있었다. 이것도 경후 아버지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들었다. 경후 아버지가 한창 일하실 때는 새뜸 당숙이 화계리 이장을 보실 때라 그때의 일들을 소상히 알고 계시어 그 이면의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그 공사가 진행될 때 여기에 배당된 공사비가 엄청났던 덕에 광성리, 화계리의 사람들이 한철 웬 만큼의 돈을 만질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광성리까지 버스가 들어온 것도 경후 아버지가 힘써서 된 일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하루에 열 차례 가까이 버스가 들어오지만 오서산 아래에 버스 노선이 생길 것이라고 누가 꿈에나 상상했으랴? 차가 다니니까 다들 편하게 타고 다니지만 이것이 경후 아버지가 한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경후 아버지는 지역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많은 일을 했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비난뿐이었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지만 한 지도자가 오래 하는 것을 싫어하고 남이 잘하는 것을 보면 시기 질투하기 마련이다. 특정인만 도움을 주었다느니 무엇을 착복했다느니 등의 말이 많아 경후 아버지는 비난만 들은 채 이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시골 이장이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었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경후 아버지는 그냥 이장이 아니라 마을의 경영자였던 셈이다.
경후 아버지는 평소에 술도 많이 드시지 않으셨으나 간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우리 나이가 서른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경후 증조부는 101세까지 장수하신 분이라 지금도 내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경후 할아버지는 나도 본 적이 없지만 동살뫼 사시던 경후 종조부는 95세로 돌아가셨으니 경후네 집안은 장수 집안이다. 경후 아버지가 아무 일도 안 맡고 그냥 편하게 사셨더라면 장수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경후 아버지가 떠오를 때가 많다. 두 분이 비슷한 연세였다면 서로 부딪힐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이 차가 조금 있어서인지 아주 잘 맞으셨다. 안타까운 것은 오서산 아래에 아버지나 경후 아버지 같은 어른들이 다시 나오기는 힘들 거라는 점이다.
꼭 집이 붙어 있어서만은 아니겠지만 나는 경후의 형인 주보 형과 친하게 지냈고 경후와도 가장 가깝게 지냈다. 동네 형들 중에서 그래도 잘 통하는 사람이 주보 형이었다. 예의가 바르고 정도 많아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던 주보 형은 애석하게도 군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다들 살아남기 힘들거라고 말했지만 하늘의 도움으로 주보 형은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심신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던가 그 전이었던가 아침을 일찍 먹고 경후네 집에 갔는데 마침 아침을 먹고 있었다. 아니다, 아침에 고깃국을 끓였다고 나를 불러서 같이 먹게 했던 것 같다. 나는 경후 옆에 앉아서 밥을 먹다가 경후 숟가락에 고기가 얹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채 틀어 내 입에 넣었다. 이 얘기가 퍼져서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경후하고는 초등학교 6년을 한 반에서 지냈고 또 집에서 제일 가까우니 남들이 말하는 ‘친한 친구’의 사이를 넘는 관계였다. 비록 중학교 때부터는 학교가 달라졌지만 늘 같이 다녔다. 성벌에서 광천까지 이십리 가까운 길을 걸어 다닐 때에 오가며 시간에 쪼들렸다 해도 늘 붙어 다녔다.
새뜸에서 이사 온 기종이가 동살뫼에 살면서 우리 셋은 늘 같이 몰려 다녔다. 경후와 기종이는 광천중학교였고 나는 광흥중학교여서 같이 다니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늘 같이 했다. 성벌에서 광흥중학교에 같이 간 길순이와 선교는 오히려 웃말이라 같이 다닐 수가 없었다.
경후는 바둑을 잘 두었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했으나 어렸을 때는 공부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에 공부를 더 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조금만 더 배웠더라면 크게 출세를 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다.
경후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집안 형편 때문이었을 거다. 줄줄이 동생이 있는데 혼자서 상급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이 다른 가족에게 미안하게 생각되어 그랬을 거였다.
내가 서울에서 재수할 때 경후는 인천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학원 다니다가 힘들면 가끔 경후를 찾아 인천으로 갔다. 그때 우리 수준에 술집에 다닐 형편은 못 되었고 가게에서 소주와 맥주를 사다가 소맥을 만들어 마셨다. 한 말들이 주전자에다가 맥주 4병, 소주 2병을 섞어 맥주 컵으로 마시곤 했다. 경후는 지금도 술을 거의 못 마시지만 그때도 그랬다. 선천적인지 한 잔만 하면 얼굴이 금방 달아오르고 어지러워했다.
우리는 군에 갈 때도 같이 갔다. 춘천에 있는 103보충대까지 경후, 광석이, 장룡이와 함께 갔던 것이다. 거기서 4박 5일을 보내고는 나는 화천 7사단으로, 경후는 양구 12사단으로 갔다. 헤어질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경후는 형 때문에 의가사 제대를 했다. 우리보다 먼저 군에 갔던 주보 형이 크게 다친 일 때문에 경후 아버지가 신청하여 바로 전역을 했다. 사실 이 일도 다른 사람 같으면 어려웠을 것이지만 경후 아버지여서 가능했다고 믿고 있다. 삼밭에 쑥이 나면 쑥도 키가 큰다지만 쑥밭에 삼이 나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가 보다.
내가 죽어 염라부에 가서 염라대왕을 만날 때, 나더러 지옥에 같이 갈 친구 한 사람만 고르라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경후를 지명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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