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준비

2012. 3. 21. 20:06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입대했던 첫 겨울은 전방에서 보냈다기보다 원주 1하교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아서 월동준비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원주에 간 것이 12월 말이라 전방에서 겨울을 맞이한 셈이지만 그땐 철책 근무라는 특수 상황이었고 바로 부대 이동이 있어 이미 월동준비가 다 끝난 상황이었다.

 

내가 부대에 있을 때 부대에서 몇 명인가 선발되어 월동준비를 하러 갔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신참이라 군대의 월동준비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잘 몰랐었다. 내가 다시 풍산리 훈련소로 가서 근무하며 80년 겨울을 맞았을 때야 비로소 월동준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부대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우리가 겨울을 나기 위해 하는 것은 화목(火木)과 싸리비 만드는 것과 김장이었다.

 

훈련소를 떠나서 백암산에서 철책 근무를 설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다시 훈련소로 오니 가을이 되면 월동 준비로 화목(火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쉽게 얘기하면 땔 나무를 베어다가 겨울에 땔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화목이었다.

 

나는 79년 겨울의 대부분을 원주 1하교에서 보냈다. 거기서는 내무반 난방을 탄가루를 물에 반죽해서 태우는 소위 페치카를 이용했었다. 페치카당번은 훈련도 안 나가고 늘 난방만을 책임을 지게 했지만 내무반 기온이 2도 정도여서 목표온도인 20도에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당직사령이 감사를 나오면 불침번을 서는 후보생들이 입김으로 불어 기온을 올렸을 정도였다.

 

훈련소에도 와서 보니 가을이 되면 탄가루가 보급이 되어 마사토라는 흙을 섞어 반죽하여 구공탄도 찍고 그것으로 내무반 난방을 하였다. 그리고 전방 부대에는 난방용 기름이 나오기 때문에 굳이 나무를 베어다가 땔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무가 왜 필요한지 의아해 했더니 화목은 우리가 땔 것이 아니라 중대장과 선임 하사 등 부대 밖에서 살림을 하는 직업 군인들에게 필요한 거였다.

 

각 중대마다 중대장 한 사람에 인사계 한 명, 선임 하사가 넷이니까 여섯 명의 집에서 땔 나무가 필요하다. 소대장들은 대부분 부대 안에 머물기 때문에 따로 나무가 필요 없지만 대대참모들은 다 나무가 있어야 했다. 그렇게 계산하면 우리 훈련소에 4개 중대가 있으니까 거의 3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화목이 필요했다.

 

거기다가 화천 사단본부나 풍산리 연대본부에 있는 참모들 나무까지 해야 했다. 자기 부하가 있는 지휘관들은 자기 부하들을 시켜서 나무를 베면 되지만 그것이 안 되는 사람들은 안면이 있는 선· 후배 지휘관들에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화목으로 가장 좋은 나무는 갈나무였다. 갈나무는 도토리가 여는 신갈나무와 그 사촌 격인 떡갈나무, 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등이 다 포함이 돼서인지 우리나라 산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개체 수가 가장 많은 나무가 소나무라고 알고 있지만 갈나무가 더 많다고 한다.

 

화천부근의 산에서는 소나무는 보기 드물고 가장 흔히 눈에 띄는 것이 참나무 종류였다. 이런 종류의 나무들은 나무가 단단해서 화력이 강하고 쪼개기가 쉬워서 화목으로 각광을 받았다. 보통 한 사람에게 8톤 트럭으로 한 차 정도를 가져가니까 해마다 땔감으로 갈나무 수십 차량 분이 베어져 나간다. 이것이 어디 한두 해에 국한된 문제였겠는가?

 

이러니 해마다 전방에서 땔감으로 베어져나가는 나무가 얼마나 되었을 것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게다가 탄을 때는 것보다 나무를 때는 것이 화력이 훨씬 좋다는 것은 군대에 다녀온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니, 날이 매우 추울 때는 페치카에 탄을 넣지 않고 나무를 때는 것이 어느 부대에서나 상식으로 통했다.

 

화목으로 적당한 크기는 높이가 3m 정도 되고 굵기는 어른 발목 정도가 좋았다. 화목을 할 때가 되면 연대나 사단 참모들이 톱을 새 것으로 사서 보낸다. 톱의 날 길이가 꼭 60cm가 되는데 나무를 이 톱으로 재서 전부 60cm가 되게 자른다. 그 정도가 부엌에서 다루기도 좋고 차에 싣기도 좋았다.

 

갈나무가 이 정도 자라려면 10년이 넘게 걸릴 것은 분명한데 겨울마다 이런 나무를 수십 트럭씩 베어내니 나중에는 잘라낼 나무가 없어 점점 먼 곳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먼 곳으로 가면 그 나무를 중대까지 가져오기가 힘이 들어 이중으로 고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큰 나무를 베어내면 다시 나무를 쪼개야 돼서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중대에서 화목을 하러가는 것은 우리 동기 넷의 임무였다. 나는 톱질을 잘 하는 편도 아니고 나무를 많이 베어 본 적도 없었지만 넷이 같이 나가면 서로 힘을 합하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어 꼭 같이 나갔다. 이 하사도 일을 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돼서 나하고 늘 뒷전에 있었고 감자하사와 정 하사가 다 했다.

 

화목은 우리 중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서 남들보다 먼저 좋은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했다. 적어도 며칠 일을 할 곳을 찾아내어 계속 베어야하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번에 다 할 수 있는 곳이 나았다. 서로들 그러니까 좋은 곳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침에 취사반에 가서 화목을 나간다고 얘기를 하면 우리가 먹을 쌀과 부식을 내어준다. 취사반에서 병력을 동원할 일이 있으면 늘 우리 중대가 도와줬기 때문에 우리가 밖에 나간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좋은 부식이 나왔다.

 

양고기 통조림을 큰 것으로 하나 주거나, 팔뚝 굵기의 소시지를 큰 것으로 주는데 거기다가 김치만 얻어오면 충분했다. 식용유 빈 통을 두 개 준비해서 가져다가 하나는 밥을 하고, 다른 하나는 김치와 고기를 넣고 찌개를 끓인다. 이런 것은 언제나 정 하사가 아주 잘 했다. 나는 밥이나 반찬을 해본 적이 없어 먹기만 했다.

 

가자마자 하얀 쌀밥에 고기가 듬뿍 든 김치찌개로 포식을 하고는 움직일 힘도 없어 양지쪽에 누워서 한잠 실컷 자는 것이 일이다.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서는 나무를 베다가 다시 찌개를 데워서 또 실컷 먹는다. 그리고는 또 누워서 배가 꺼질 때까지 놀다가 시간이 많이 간 것을 알고는 부지런히 베어낸다.

 

날마다 검사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농땡이를 부려도 간섭할 사람이 없었다. 어쩌다가 행정관이 슬쩍 나와서 보지만 나무를 많이 베어놓은 것 같으니까 얘기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훈련을 마친 훈련병들이 나무를 가지러 오면 아예 톱을 내주고 베어서 가지고 가라고 한다.

 

중대장이나 인사계, 선임 하사들은 나무가 부족하면 한 겨울에도 화목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때는 참견하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나무를 베어다 놓고는 차에 싣기 좋게 60cm 정도로 잘라야 하니까 산에서 나무를 베어오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실어 보내도 우리에게는 쓴 소주 한잔 돌아오지 않았지만 화목을 할 때는 산에 올라가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늘 지원했다.

 

싸리비는 눈을 치우기 위해 필요한 도구였다. 싸리나무는 꺾어내도 그 자리에서 다시 싹이 나와 1년이면 빗자루를 만들 만큼 자라기 때문에 해마다 엄청 난 양을 꺾어서 써도 별 문제가 없었다. 내가 풍산리 훈련소에 있을 적에 우리 중대에서만 1년에 수백 자루의 싸리비를 만들었다.

 

그 전에 철책에 있을 때도 수백 자루의 싸리비를 만들어 자매학교에 보내는 것을 보았다. 자매학교에 싸리비를 한 트럭 실어 보내면 오는 것은 겨우 애들 베개만한 위문품 몇 가지였다. 그 적은 량에 너무 실망이 커서 싸리비 수백 자루가 겨우 요거냐고 물었더니, 학교에서 보내는 위문품들이 상급부대에서부터 다 잘라 먹고 막상 실제로 전달해야할 부대에는 남은 찌꺼기만 와서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다.

 

훈련을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훈련병들이 싸리나무를 꺾어서 가져왔다. 싸리나무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먼저 나무를 꺾어다가 보여주고 그런 것으로 백 개씩을 꺾어서 제출하라고 한다. 그리고 칡이 좋은 곳을 찾아서 매는 줄로 쓸 수 있게 칡을 끊었다. 빗자루 매는 일은 정 하사와 감자 하사가 주로 맡았다. 이 일도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는다. 보통 2주 정도는 거기 매달렸다.

 

다행히 훈련소 우리 중대는 자매학교가 없어, 우리가 쓸 빗자루만 확보하면 되었다. 겨울에 눈을 치우기 위해 만들어야할 싸리비가 매년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대체 이것을 언제 다 쓸 것이냐고 투덜댔지만 봄이 지나고 보면 거의 다 없어져서 빗자루 보관창고가 텅 비었다.

 

자갈밭이 대부분인 훈련소 경내와 우리 중대 부근의 눈을 치우다보면 얼마 안 써도 몽당 빗자루가 되어서 그런 것은 라면 끓일 때에 썼다. 싸리나무는 연기가 나지 않고 화력이 좋아서 밖에 나가 작업을 하다가 라면을 끓이는 데는 최고였다.

 

화목과 싸리비 준비가 다 되어 갈 때면 김장철이 다가온다. 풍산리 훈련소에서는 훈련병들 먹을 김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소 위에 있는 여러 부대의 김장까지 같이 했다. 보통 배추와 무가 각각 트럭으로 열다섯 대 분량이나 되었다.

 

김장 지원을 나가라고 해서 한번 따라가 봤더니, 화천 북한강 주변의 밭에서 배추와 무를 트럭에 싣는 일이었다. 흥정이 끝나기 전까지는 매운탕에 막걸리를 주면서 대접이 좋아 지원 나가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더니 계산이 끝난 뒤에 차에 배추와 무를 싣는데 그게 장난이 아니었다. 겨우 여나믄 병사가 열다섯 트럭 분량을 싣다보니 어깨가 빠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싣고 온 배추와 무를 차에서 내려놓으면 연병장이 꽉 찰 만큼 많은 양이다. 김장을 할 때는 대대장 사모님을 비롯해서 부대 장교와 하사관 부인들이 다 와 김장 속을 준비하고 양념 등을 버무렸다. 하나 납득이 안 가는 것은 김장을 담글 때에 준비되는 재료들은 부잣집 김장하는 것보다 더 풍성하지만 담가서 먹을 때 보면 맛있는 것은 다 어디로 갔는지 구경조차 못한다는 거였다.

 

내가 듣기로는 김장할 때 속에 넣으라고 조기도 몇 상자씩 왔다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맛본 적이 없다. 2, 3일 준비하다가 당일이 되면 훈련병들의 훈련도 중지한 채 전부 동원되었다. 절인 배추를 씻는 곳에 가보면 훈련병들이 맨발로 물에 들어가서 떨면서 일하고 있고, 여기 저기 다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겨우내 먹을 무를 묻는 일도 큰일이었다.

 

무 묻을 구덩이를 120개 정도 파야 했는데 한 구덩이에 훈련병들 하루 먹을 량을 묻었다. 처음엔 몰라서 구덩이를 새로 파려다보니 너무 힘이 들어서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해에 무를 묻었던 구덩이의 흙만 긁어내고 다시 거기에 무를 묻었다. 그것도 양이 많으니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장이 끝나고 며칠은 그래도 먹을 만했다. 분대장들이 여기저기에 양념과 고춧가루 등을 감춰 두었다가 꺼내어 놓았다. 그리고 김장이 끝난 직후에는 부대에서 나오는 반찬도 괜찮아서 군대 좋아졌다는 말이 수시로 나올 만 했다. 하지만 김장이 끝나고 일주일 쯤 지나면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

 

화목과 싸리비, 김장까지 끝나면 전방에서도 큰 걱정이 없었다. 날이 추운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겨울을 지낼 준비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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