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1. 20:09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훈련소에서 조교를 한다는 것은 각양각생의 훈련병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후방의 논산훈련소나 예비사단훈련소는 조교가 따로 있어 자기 주특기만 교육하면 되니까 훈련병이 들어와도 같이 만날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전방 전투사단훈련소는 그대로 전투부대 편성이라 훈련병이 입소한 날부터 퇴소하는 시간까지 같은 막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모든 훈련을 다 함께 한다. 즉 자기 주특기에 관계없이 제식훈련부터 시작하여 훈련병이 받아야하는 모든 훈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시켜야 했다.
그러다보니 조교와 훈련병의 관계라기보다 합숙하는 코치와 선수의 관계 같았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가르치는 나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고 훈련을 받는 훈련병의 입장에서는 더 힘이 들고 부담이었을지도 모른다.
훈련병 스스로 배우겠다고 온 것도 아니고 밖에서라면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나 훈련소는 강제로 시키고 못 하면 못한다고 두들겨 패니 하루라도 더 빨리 나가고 싶었을지 모른다. 서로 입장이 다르면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는 없지만 나는 훈련소에서 만난 사람들을 무척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분대장이 되어 훈련소로 가니 우리 ○중대에는 강원도 병력이 들어와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훈련병이 태순이다. 태순이는 나중에 내가 근무했던 8연대 ○중대로 가는 인연까지 겹쳤고, 거기서 내 훈련소 동기였던 삼흥이와 변재홍 하사를 만나 잘 지냈으며 오래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 다음에 온 병력이 충청도 병력이다. 중학교 동기와 고등학교 동기가 한 명씩 왔었고 고등학교 친구의 친구도 몇 만났다. 송기범, 구준서, 이재화 등이 기억나는 얼굴들이다.
정이 들면 서로 헤어질 때 가슴이 아픈 것은 남녀사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훈련병의 입장에서 훈련소를 퇴소할 때 울고 떠났던 내가 분대장이 되어 훈련병을 보낼 때에도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애들을 붙잡고 큰 소리로 우는 나를 보고 독한 줄 알았더니 여리다고 말한 후배가 있었다.
중대장님이 그 얘기를 듣고는 진정한 정은 남자의 정이라고 편을 들어주기도 했지만, 떠나면서 눈물을 흘리는 훈련병을 보면 마치 공들여 키운 자식을 험지로 내보내는 심정이 되어 걱정이 되고 눈물이 나서 그때마다 많이 울었다.
그렇게 눈물로 작별을 했던 훈련병이 여럿이다. 나는 훈련병에게 아주 엄격했다. 우리 중대로 훈련병이 입소할 때는 늘 내가 나가서 인수했다. 버스에서 웃으며 내리거나 자기들끼리 떠들면 바로 선착순부터 시작해서 땀에 흠뻑 젖게 만들고 대대본부에서 중대까지 200m 정도의 길을 올라오면서 전투화 코가 다 벗어질 정도로 돌리곤 했다. 잠시만 한 눈 팔면 뺨을 올려쳤고 조금만 어정거리면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렇게 초반에 겁을 주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풀어주곤 했다.
훈련병들을 만나다보면 이상하게 정이 가는 애가 있고, 사사건건 눈에 걸려 자주 터지는 애도 있다. 가급적 후자는 만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너무 약삭빠르게 눈치를 보는 애들은 내게 걸리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훈련병들이 한두 번 잘못하는 것은 봐 줄 수 있지만 약은 짓하다 걸리면 호되게 다루었다.
내가 이런 방식으로 하니까 애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잘 따랐다. 나는 훈련병이 들어오면 이틀이면 다 이름을 외웠으나 그 애들은 일주일 뒤에도 몇 안 되는 분대장들 이름을 외우지 못해 나에게 호되게 당하곤 했다.
그렇게 하면서 훈련병들과 정이 들었고 서로 이해하면 다 통할 수 있었다. 내가 가르쳤던 훈련병들이 다 나를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고 나 또한 많은 숫자를 기억하지는 못한다. 훈련소를 떠난 뒤에 편지 한두 통 정도를 주고받은 훈련병은 꽤 많지만 다들 오래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전역한 뒤에 전역해서 만난 훈련병도 여럿이나 지금은 다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렇게 잊혀 간다는 것이 많이 아쉬운 일이나 가는 세월을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할수록 보고 싶고 궁금한 얼굴들이 많지만 이미 그 사람들에게도 내가 잊히어진 얼굴일 거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 설령 잊혀졌다고 해도 꼭 한 번 보고 싶은 사람이 백남국이다. 남국이는 전북 병력이었다. 김제와 부안, 고창, 익산, 완산 등지에서 온 그 병력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다가 온 사람들로 학력도 낮은 편이었다.
학력이 낮다는 얘기는 다른 의미가 아니라 대학에 다니다온 사람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얘기일 뿐이다. 이미 그 시절에도 대한민국 군인이 되려면 보통 고졸이상이었고 중졸은 전체의 10%도 안 되었다.
도시에서 온 병력은 대부분 학력이 높아 훈련을 시키기엔 편하지만 작업능력은 많이 떨어진다. 작업이 많은 가을철에 도시 병력이 들어오면 월동준비에 아주 애를 먹기 때문에 어느 중대든 다 시골 병력을 원했다. 시골에서 온 병력들은 훈련을 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지만 일을 시키면 두 번 얘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 해내서 특히 가을에 들어오면 환영이었다.
남국이는 가을이 아니라 봄에 왔다. 훈련병이 처음에 들어오면 조금 똑똑해 보이는 아이를 하나씩 선정해서 분대장의 잔일을 돕게 한다. 이것이 규정에 있는 것은 아니나 훈련소에서는 묵시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전속 당번이다.
이렇게 선정된 훈련병들은 분대장의 옷을 세탁하고 군화를 닦고 분대장이 해야 할 사소한 것들을 맡아서 했다. 이에 대한 대가는 작업을 나갈 때에 빼주고, 분대장 것을 손질할 때에 자기 것도 하면 되니까 손해를 보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고참 분대장들이 일을 시키는 훈련병은 얼차려를 줄 때도 눈치껏 빼주니 손해가 아니라 득이었다.
그렇게 고른 아이가 잘 하면 문제가 안 되지만 똘똘하지 못하면 늘 지청구를 먹고 다른 애에게 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남국이는 키가 작은 편이고 눈에 띄게 행동하는 아이가 아니어서 처음엔 잘 모르고 지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훈련을 나갔다가 두릅이 핀 것을 보고 한 자루 따가지고 들어왔다. 나는 계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어디에 먹을 것이 있는지를 다 기억하고 있던 터라 훈련 마치고 오던 길에 두릅나무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제대로 핀 것만 골라서 땄다. 두릅나무는 대개 모여 있어서 한 곳만 알아두면 충분했다. 다들 입맛을 다시며 저녁에 한잔하자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내가 따왔으니 내가 처리해야 될 것 같아서 훈련병이 다 모인 자리에서 ‘데칠 줄 아는 사람’을 찾았더니 여러 훈련병이 손을 들었다. 그 중에 한 훈련병에게
“야 데치는 것이 무어냐?”, “예, 채소를 끓는 물에 살짝 삶아내는 것입니다.” “그래? 그럼 네가 데칠 줄 안다는 거지?” “예 사회에서 해봤습니다.” 이렇게 해서 데치게 시켰더니 식용유통을 사용해서 두릅을 데치고 깔끔하게 다듬어왔다.
그 훈련병이 백남국이다. 그 한 번 데치는 일로 내 마음에 쏙 들어 남국이가 내 전속당번으로 차출이 되었다. 군대라고 해도 지휘관들에게만 전속당번이 있는 거지만 훈련소이다 보니 우리 분대장들도 묵시적으로 전속당번을 두고 일을 시켰다.
남국이는 무슨 일이든 스스로 알아서 했다. 내가 빨래를 하라고 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빨아오고, 군화를 닦으라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닦았다. 밤에 늘 술을 마시니까 아침이면 냉수를 떠다가 내가 마실 수 있게 배려했다. 훈련병 중에 내가 마음에 들어 한 아이들이 여럿 있지만 정말 남국이처럼 매사에 신경을 쓰는 아이는 보지 못했다.
자기 귀여움 자기가 받는 거라고, 남국이가 그렇게 잘 하니까 나도 보이게, 보이지 않게 배려를 해주곤 했다. 내가 잘 해주면 내 아래 분대장들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 군대 생리였다. 남국이는 내게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감자에게도 칭찬을 들을 만큼 잘 해서 얼차려 받을 때에 살짝 일을 시키곤 했다.
애들을 호되게 다루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남국이가 끼여 있으면 적당히 넘어갈 정도로 내가 귀여워했다. 남국이는 훈련을 마치고 자대로 간 뒤에도 편지를 자주 보내오고 나도 빠지지 않고 답장을 해주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정말 정이 가는 친구였다.
군대에서의 만남은 나이 차가 많이 나지 않는다. 특별하게 늦어진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한두 살 차이밖에 안 난다. 훈련소에서 조교와 훈련병 사이라고 하면 꽤 차이가 날 것 같아도 계산해 보면 잘 해야 두 살 이상은 차이가 없다. 그러니 밖에서 만나면 다 친구라고 할 사이지만 군대니까 아래와 위가 있을 뿐이다.
내가 전역을 한 뒤에도 남국이와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다. 내가 대학 1학년 때에 남국이가 휴가를 나와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 시절에 강서구 등촌동 고종사촌누님 댁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남국이 누님이 목동 동신아파트에 살고 있어 그 집에 가서 만났다. 서로 편지를 주고받다보니 주소를 보고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국이 자형이 통합병원에 군의관으로 있다고 했다. 맥주 몇 병을 마시며 반갑게 얘기하다가 헤어졌다.
그 뒤로 내가 등촌동을 떠났고, 남국이도 군에서 전역을 하여 소식이 끊기었다. 지금도 학교에서 신입생이 들어오면, 남국이 생각이 나서 아이들에게 묻는다. “외삼촌이 백남국인 사람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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