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1. 20:14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군에서 만난 사람은 무척 많다.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도 많고 기억하기조차 싫은 사람도 있지만 내가 군대에서 만나 가장 오래 가깝게 지낸 사람이 감자하사다. 감자하사의 본명은 ‘김근화’였다. 김 하사에게 ‘감자’라는 별명은 내가 붙여준 것으로 같이 전역할 때까지 우리 중대에서는 ‘감자하사’로 통했다.
감자하사는 예산군 신례원 출신으로 훈련소 동기지만 하사관학교는 나보다 조금 빠르게 입학을 했다가 졸업은 같이 한 좀 특별한 인연이다. 감자가 하사관학교 입학동기들하고 같이 임용이 되었더라면 나하고 다시 만날 일이 없었을 터이나 훈련 중 몸을 다쳐 하사관학교에서 조금 지체한 덕(?)에 서로 같이 만나 훈련소에서 함께 근무하며 좋은 인연으로 지냈다.
감자하사는 신례원에서 농사를 짓다가 군에 왔다. 누나 한 분이 예산농협에 근무하고 있을 때에 내가 풍산리에서 첫 휴가를 나왔다가 감자 심부름으로 누나를 만난 적이 있었다. 누나는 얼굴이 둥글고 예뻐서 사과 같더라고 했더니, 자기도 예전엔 사과 같았다고 얘기해서 ‘네 얼굴이 무슨 사과냐? 감자지’라고 받아 친 것이 그대로 굳어서 감자가 되었다.
○중대에 우리 동기들이 그를 다들 감자라고 불러 고참들도 감자하사로 불렀다. 감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원래 별명이라는 것이 부르기는 좋아도 본인은 듣기 싫은 것이 대부분이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다들 감자라고 부르다보니 간혹 훈련병들조차 ‘감자 분대장님’이라고 하여 웃은 적이 많다.
감자는 무엇이든 외우는 것을 싫어하고 이론을 익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냥 하면 된다는 방식이다. 그러니 훈련병에게 설명이 필요할 때가 제일 고역이었다. 그런 것이 있으면 슬쩍 내게 와서 나더러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사정을 내가 잘 알기에 그런 때는 두말없이 내가 해주었다. 그럴 때면 슬그머니 뒤에 빠져서 듣다가 실습을 할 때는 앞으로 나와서 시킨다.
외우는 것은 싫어했지만 일을 하는 것은 우리 동기 중에서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우리 행정관이 조금 까탈스런 분이라 비위 맞추기가 힘들었으나 감자가 하면 항상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만큼 감자의 작업에 대해서는 정말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장작 패기부터 바둑판이나 다탁(茶卓)용 괴목을 캐오는 일, 화목이나 울타리 칠 말뚝 만드는 일 등 훈련과 관계가 없는 일은 다 감자가 도맡아서 했다. 같이 일을 나가도 우리는 구경만 하면 되었고 일은 감자가 스스로 하거나 아닐 때는 훈련병들 시키고 감자가 감독하면 더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같이 ○중대에 근무한 동기 넷 중에서 힘든 일은 다 감자가 맡아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야 늘 말로 하는 일이나 잘 했지 몸으로 움직여서 하는 것은 뒤로 쳐졌고 정 하사는 훈련 실습은 잘 했지만 역시 힘든 일은 감자에게 못 미쳤다.
이 하사는 체구도 작고 약해보이는 데다가 태생이 거친 일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여 아예 시키지도 않았다. 그때야 다들 한창 때니까 솔직히 못할 일은 없었지만 잘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다 나설 필요가 없었다.
훈련소 동기라고 해서 여럿이 다 마음이 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밖에서 만났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만났기 때문에 조금씩의 갈등은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넘어간 것이 많았다.
사람관계에서 둘이면 잘 통하고 셋이면 늘 하나가 갈린다고 한다. 넷도 마찬가지여서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 했지만 우리 넷은 그런 모습을 겉으로 드러낸 기억이 없다. 무엇이든 같이 상의하고 서로 의견일치를 봐서 움직였다. 그렇게 할 수 있던 데는 감자하고 이 하사가 많이 양보했기 때문이다.
나하고 정 하사는 목소리가 큰데다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 쉽게 굽힐 줄을 몰랐다. 군대야 무슨 일이든 짬밥 순이라고 하지만 하사계급장까지 달고서 틀린 것을 옳다고 따라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끔 내가 정 하사하고 찌그럭거릴 때도 있기는 했지만 서로 오래 가지 않았다. 나나 정 하사나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다가도 틀린 것을 알면 쉽게 수긍했고 또 끝까지 자기주장을 내서 억지로 할 일도 없었다.
우리가 훈련소로 전입을 갔을 때는 갓 1년이 지난 정도라 매사에 조심하고 고참들 눈치를 보면서 행동했지만 한 반 년이 지나면서 웬만큼 입지가 굳어지자 우리 식으로 움직였다. 훈련소는 민통선 안에 들어 있어서 밖으로 나가도 민간인 마을이 없다. 훈련소 정문에서 큰 도로를 따라 10여 분 걸어가야 마을이 있고 거기에 구멍가게가 서너 군데 있고 술집을 겸한 식당이 세 곳 있었다. 그런 집들은 다 군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곳이었다.
민통선 부근이라고 해도 훈련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훈련소 위로 올라가면 군데군데 부대가 많았다. 우리는 그런 부대에 갈 일이 전혀 없었지만 거기 군인들이 외출이나 외박을 나갈 때는 훈련소 앞으로 해서 그 마을을 반드시 거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오며가며 들르는 군인을 상대로 술과 음식을 팔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가게 중 한 곳에서 외상을 가져다 먹었다. 처음에 가니까 고참이 데리고 나가서 인사를 시키고 거기만 이용하라고 얘기를 했다. 외상을 가져오는 것이야 전부 술이지만 장부에 우리 이름이 다 있고 가져 온 것을 기록했다가 월급을 주는 날 행정관을 통해서 미리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어떤 때는 행정관에게 부탁을 해서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몰래 나가서 사오기도 했지만 거의가 다 외상으로 가져오고 월급날 행정관을 통해서 갚았다.
하사 월급이 병장보다 배는 더 돼서 소주만 마신다면 그래도 꽤 많이 마실 수 있었다. 안주는 취사반에서 얻어와 먹었으니 소주만 사오면 되었다. 우리 넷 중에서 술을 안 마시는 이 하사만 빼고는 돌아가며 술을 사 날랐다. 우린 거의 날마다 술을 마셨다. 나중에는 고참들이 술을 그만 좀 마시자고 사정을 할 정도로 끊임없이 술을 사 날랐고 마셔댔다.
그렇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감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자는 깊이 생각하는 것을 싫어했고 무엇이든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고참들이 술 좋아하니 술을 사다가 같이 마시면 좋겠다는 것이고 그것을 남에게 부탁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시작했다. 주량이야 다들 소주 한 병은 마실 정도로 엇비슷했으니 술값 가지고 다툴 일도 없었다.
나도 매사에 잔 머리를 굴리는 편은 아니지만 감자가 훨씬 더 직선적이고 행동에 옮기길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남을 배려하기를 좋아했다. 사실 군대에서 그것도 몇 안 되는 식구사이에 머리 굴리며 계산을 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나도 단순한 사람이라 감자하고는 서로 잘 맞았다.
감자는 휴가 다녀 올 때면 늘 용산이나 청량리를 들러서 오고는 내게도 늘 그것을 권했다. 하루 저녁을 같이 자는 여자들에 대해서도 사람을 무시하거나 ‘돈으로 샀다’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순정파였다. 휴가를 다녀오면 갔다 온 얘기를 내게 소상히 전해주면서 내가 총각이라는 것에 대해서 늘 아쉬워하며 자기하고 같이 휴가를 나가면 확실하게 안내를 하겠다고 장담을 했지만 한 번도 같이 휴가를 나간 적은 없었다.
전역을 할 때에 밖에 나가서도 자주 연락을 하자는 얘기는 수없이 많이 했지만 전역한 뒤에는 서로 연락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신례원에 갈 일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찾아서 만났을 것이나 거기는 늘 지나가는 길이었다. 기차를 타고 신례원을 지날 때면 감자하사 생각이 나지만 아직 어떻게 찾아서 만날 방법은 찾지 못했다.
'시우 수필집 > 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풍산리 훈련소로 가다 (0) | 2012.03.21 |
---|---|
장교에서 강등된 하사 (0) | 2012.03.21 |
서로 닮아서였을까? (0) | 2012.03.21 |
내게도 전속당번이 있었다 (0) | 2012.03.21 |
월동준비 (0) | 2012.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