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풍산리 훈련소로 가다

2012. 3. 21. 20:20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남들이 보기엔 그저 군에서 휴가 나온 것이지만, 휴가를 나온 군인들이 느끼기엔 마치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은 기분이 첫 휴가이다. 내가 그 기분을 느껴 봤다. 전방으로 가서 사람 구경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하사관학교에 가서 배 쫄쫄 골며 터지고 뛰어다니다가 서울에 오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청량리역으로 마중을 나온 용인이를 따라 잠시 제기동 가고파 백화점 앞에 있는 별 다방에 갔었다. 거기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길래 기다렸지만 다들 바쁜 탓에 몇 사람 만나지 못했다. 다방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렇게 먹고 싶던 꽃다발빵을 사서 먹었다. 얼마나 먹고 싶었던 꽃다발이던가?

 

다들 왜 빵을 먹느냐며 배가 고프냐고 물었지만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하사관학교 시절에 가장 많이 먹었고 또 먹고 싶었던 것이 삼립식품에서 나온 꽃다발빵이었다. 그게 군대 매점에서는 하나에 80원이었는데 밖에 나오니 100원이었다. 하후생 시절에는 그 빵을 한 자리에서 열 개를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었다.

 

술을 조금 마시고 용인이가 자취하고 있는 봉천동으로 갔다. 서부이촌동에서 자취를 하던 용인이와 경희 누나, 용재가 봉천동으로 옮겨가 자취를 하고 있었다.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차 시간도 맞지 않고 또 친구들을 보느라 하루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가 해준 아침을 먹고는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바로 광천으로 갔다. 광천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장곡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 가다보니 소라실고개 앞에서 우리 동네 사람들이 비럭질을 하고 있었다. 일일이 다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갔다.

 

거의 1년 만에 집에 돌아온 셈이다. 어머니는 자형을 시켜서 집에서 키우던 돼지를 잡아 주셨다. 나는 하사관학교에 배를 곯던 생각을 하며 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마다 않고 먹었다.

송별회에 왔던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아서 밤새 퍼마시고 놀았고, 가까운 친척 집은 다 돌며 인사를 다녔다. 꽤 길 줄 알았던 열흘 휴가는 그렇게 먹고 마시는 사이에 꿈결처럼 흘러가 버리고 귀대할 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받은 용돈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졌고 이제 먹고 마시는 것도 웬만큼 돼서 처음 입대할 때보다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설 수가 있었다. 나는 서울로 바로 가지 않고 청주로 갔다. 청주에서 충북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재진이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고모님 댁에 짐을 놓고는 충북대학교로 찾아갔다.

 

재진이가 어디서 수업을 받는지 알지도 못했지만 학교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여기저기 묻고 다니다가 강의실에서 나오는 재진이를 만났고, 둘이 다시 조치원을 거쳐 중촌에 있는 정재네 이모 집으로 찾아가서 정재를 데리고 나왔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셋이 서울에 와서 용인이를 만났고 다시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불러내어 내가 가진 용돈으로 여관을 잡아놓고 밤새 퍼마셨다. 다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시고 다음 날 나는 마장동에서 춘천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춘천에서 다시 화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작년에 갔던 길을 가면서 추억을 더듬었지만 그때는 완전히 쫄아서 갔기 때문에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화천 7사단 신병대기소에 가서 우리 하사 동기들을 다 만났다. 대부분 작년 훈련소 동기였다. 하사를 달 때까지는 좋았지만 이제 어느 부대로 가느냐 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연대는 바뀌지 않지만 중대는 다른 곳으로 바뀌어서 가야 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대부분이 신병교육대 조교로 가게 될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렇게 불안한 시간이 지나고 이틀인가 뒤에 우리는 다시 풍산리 신병교육대로 전입을 명령받았다.

 

1년 전에 훈련병으로 입소해서 땀 깨나 흘리던 곳으로 이제는 교육을 시키는 분대장이 되어 귀대를 하게 된 거다. 그때는 다들 어쩌고 하면서 불만스러워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보다 더 좋은 명령이 있을 수는 없었다. 부대에 가서 일반 사병들과 부대끼고 갈등을 갖느니 훈련소에 가서 신병을 교육시키는 것이 백번 나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11명인가 되는 신임하사들이 군용트럭을 타고 풍산리 신병교육대에 도착한 것은 저녁때였다. 대대본부에 가서 신고를 하고 각 중대로 배속을 받았다. 나를 비롯한 네 명은 9중대로 가고 각각 몇 명씩 중대별로 나뉘어졌다.

 

대대장에게 신고를 하고 가야한다고 해서 본부 행정실 밖에 짐을 들고 서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있을 때에 안에서 웬 소령이 한 명 나왔다. 경례를 해야 마땅했지만 갑작스런 일이라 다들 우물쭈물하다보니 기회를 놓쳤다. 그 소령이 우리를 보고 군기가 빠졌다고 짐을 지고 연병장을 돌라고 해서 한 30분을 뛰었다. 나중에 보니 그 사람이 부대대장이었다.

 

우리가 배속된 중대는 예전에 우리가 훈련을 받았던 ○○중대와는 멀리 떨어져 언덕 위에 있었다. 그래도 동기가 네 명이나 되는 것이 위안이었고, ○○중대가 아니라는 것도 다행이었다. 만약에 ○○중대로 갔더라면 우리를 훈련시킨 예전 분대장들 중에 하사가 아닌 병들이 아직 남아 있으니 그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생활하는 것이 아주 고역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훈련을 받을 때는 각 중대에 하사가 4, 5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병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사가 많이 들어와 대부분의 분대장을 하사가 맡고 있었다. 중대로 함께 간 하사 동기는 예산의 김근화, 대천의 이치형, 그리고 태백에서 온 훈련소 후배가 하사관학교 동기로 함께 했다. 가서 보니 우리와 훈련소 동기였던 정익희 하사가 하사관학교는 우리보다 3주 정도 빨리 나와 선임으로 와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우리 동기는 넷이 되었다.

 

우리 중대장인 신한홍 대위는 무척 깐깐한 분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삼사출신으로 말년에 가까웠다. 다른 중대장들이 상대하길 거북해할 정도로 몸가짐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다방면으로 지식이 많아 누구도 그 앞에서는 아는 체하지 못한다고 했다. 훈련병을 직접 대하는 일이 없고 소대장이나 선임하사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정말 장교다운 장교였다.

 

솔직히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훈련소 분대장쯤 되면 이론이나 실기나 상당한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인데 내가 가서 보니 그런 사람은 딱 하나 뿐이었다. 나는 가자마자 훈련 이론을 혼자 맡아서 할 정도였다. 내가 훈련소와 하사관학교에서 배운 것을 거기 있는 소대장들이나 선임하사들은 건성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나보다 낫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대장과 금 하사 정도였다. 나는 체력으로는 아니었어도 군에 가기 전부터 군사적인 지식에 관심이 많았고 또 많이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항상 시험에서 1등을 하려고 외우라고 내어주는 것은 다 외웠다. 하사관학교에서는 8절지 석장을 하루 저녁에 외워 다들 외우라고 잠을 안 재울 때에 혼자만 먼저 자는 행운을 누린 적도 있다.

 

훈련소에서도 그랬지만 하사관학교에서 배울 때에 무조건 외우기만 한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암기를 잘 한다고 훈련소와 하사관학교에서 이름을 날린 것도 사실이긴 하나, 그냥 암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알고 하니까 재미있고 쉽게 외워졌다.

 

그 덕에 고참들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신참이 되었다. 실기에는 정익희 하사가 강했고, 작업에는 김근화 하사가 뛰어났다. 이치형 하사는 대천에서 공무원을 하다가 와서인지 문서 작업에 뛰어났다. 이런 연유로 우리 동기들은 이내 중대의 중심 세력으로 자릴 잡을 수 있었다.

 

중심 세력이 된다는 것은 군대 생활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거기서 전역을 할 때까지 집합을 한 번밖에 안 당했다. 돌이켜 보면 다 추억은 아름다운 거라고 하지만 추억이라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정말 즐겁게 생활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