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제 1 하사관학교에 가다

2012. 3. 23. 21:28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내 어렸을 적 꿈 중에 훌륭한 장군이 되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한 때는 육군사관학교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운동신경이 둔하고 신체적으로 고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이 힘들 것 같아서 일찌감치 그 꿈을 접었다.

그런데 군에 가서 해보니까 어떤 훈련이든 못할 것은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내가 직접 현장에서 장교들을 보니까 솔직히 그들보다는 내가 훨씬 나을 거라는 확신도 갖게 되었다. 정말 내가 생각하는 참 군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부대가 철책근무(GOP)에서 완전히 빠져 훼바(FEBA)로 나온 것은 그해 12월 초였다. 전방 전투사단은 3개 연대 중에서 1개 연대가 철책근무를 서고 2개 연대는 뒤에서 받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다. 우리 8연대가 빠져 나오면서 5연대가 들어가·· 철책임무를 교대했다.

 

10·26이후 사회의 어수선함이 군에까지 파급이 되지는 않았던 때지만 전방에서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그런대로 많이 해소되었다. 이것들이 쳐내려올 계획이었다면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에 왔을 것이지 우리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다한 뒤에 오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와중에 우리 중대장이 바뀌었다. 120여 명이 되는 중대원을 중대장이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새로 온 중대장과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 소위 찍혔다고 생각했다.

 

중대장은 오자마자 내무사열을 취한다고 난리를 떨었는데 우습게도 내가 거기에 걸렸다. 내가 담당한 일은 관물대 위에 있는 것을 정리하는 거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다 치우고 닦고 했기에 아무 걱정 없이 사열을 받았다. 그랬는데 어떤 고참의 반합 속 뚜껑 안에서 고춧가루 마른 것이 나왔다. 그 책임을 내게 물어 영하 10도가 넘는 밤에 빰빠라를 시켰다.

 

나 혼자는 아니고 여섯 사람인가 걸려나와 팬티바람에 연병장을 돌고 나중에는 철모에 물을 떠다가 셋씩 마주 서서 상대에게 물을 뿌리게 했다. 다른 곳은 견딜 만 했으나 철모를 들고 있는 손이 얼고, 팬티가 얼어서 몸을 움직이면 마치 칼로 살을 베는 것처럼 통증이 왔다. 이게 내 군대생활에서 겪은 유일한 빰빠라다.

 

이렇게 30분을 시켰으니 온몸이 다 얼었다. 나중에 내무반에 들어가니 고참들이 뜨거운 물에 수건을 짜서 한 30분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런 덕에 다행히도 동상(凍傷)에 안 걸리고 넘어갔다.

 

그 뒤에 우리 중대가 사격장에 가서 사격을 했을 때에 90%를 명중시키지 못했다고 자갈밭을 주먹 쥐고 엎드려 기게 시킨 적이 있다. 다들 손바닥으로 기었으나 나는 오기로 주먹을 쥐고 기었다가 양 손가락 뒤가 다 너덜너덜하게 되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으나 마치 걸레조각처럼 찢어졌다.

 

고참들이 바로 의무대에 데려갔는데 거기서 꿰맬 수도 없다며 페니실린주사를 매우 고단위로 놓아주었다. 이것은 가혹행위로 보고가 되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주사를 계속 몇 대를 맞고는 가라앉았지만 우툴두툴한 흉터가 손가락마다 다 생겼다. 지금은 거의 가라앉았지만 아직도 손에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런 저런 일들이 내 남은 군대생활을 어렵게 하게 될 것이라는 조짐 같아서 영 마음이 놓이지 않을 때에 하사관학교 차출 명령이 왔다. 말로야 가기 싫다고 했지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없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이젠 자신 있게 군대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신체검사를 받고는 소식이 없어 혹 못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늦게 연락이 왔다. 그게 1223일이었다. 내일 아침에 신고하게 새벽에 연대본부로 오라는 거였다. 밤에 짐 꾸리고 새벽에 중대장에게만 보고하고 바로 부대를 떠났다. 그동안 정든 사람도 많고 인사를 꼭 해야 할 사람도 있었지만 누가 잡을까봐 두려운 것처럼 서둘러 부대를 떠났던 터라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사람들이 많다.

 

그해 크리스마스는 불도 안 들어오는 사단 휴양소에서 보냈다. 하사관학교에 가면 고생한다고 배려해서 휴양소에 보내 준 것이지만 겨울이라 사람이 없어 제대로 관리가 안 되어 창고 같았다.

 

그래도 좋았다. 거기서 만난 차출자들과 함께 차가운 냉방에서 뒹굴다가 우리는 1228일인가에 원주 육군 제1하사관학교로 갔다. 마침 연말이라 연초까지 불안한 마음으로 머물다가 드디어 12일에 정식으로 입교를 하고 13주의 훈련에 들어갔다.

 

하사관학교는 우리가 나온 훈련소와 달라서 우리가 머무는 중대에는 계급이 대위인 중대장 1명과 중위인 구대장이 2, 부구대장으로 중사가 각 1명씩 있고, 교육과정을 도와주는 하사가 각 한 명 그리고 행정병이 하나인 단출한 구성이었다.

 

우리에게 직접 교육을 담당하는 조교는 다른 곳에서 기거하면서 각 중대의 일정에 따라 현장으로 투입되는 방식이었다.

 

하사관학교에서 어려움은 딱 두 가지였다. 밥이 적다는 것과 훈련이 너무 많은 거였다. 예전 훈련소에서는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주는 밥도 다 먹지 못했건만 어떻게 된 것인지 하사관학교에 가니까 날마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자나 깨나 먹을 것만 생각하게 되고, 식사시간이 돼도 밥을 먹다가 말 때가 대부분이라 즐겁지가 않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후보생들이 다 걸신이 들린 것처럼 먹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나는 먹는 문제가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거기서 처음으로 뼈저리게 경험했다. 게다가 훈련은 또 어찌 그리 많은지 낮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야간 훈련도 13주 중에 8주가 넘었다. 먹는 것은 적고 훈련은 많으니 다들 배고파하는 것이 당연하다. 훈련은 부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밖에 나가서 받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바로 나가 치악산 아래를 누비고 다니다가 밥을 먹을 시간이 되면 정신없이 뛰어와야 하고, 밥을 먹고 나면 다시 야외교장으로 뛰어갔다. 그러니 먹은 밥이 훈련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다 소화가 되었고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매일 아침에 왕복 4km의 구보를 했다. 기온이 영하 5도이하면 내의를 입고 뛰고, 그 이상이면 상의를 다 벗은 채로 뛰었다. 그 해 겨울이 엄청 추웠지만 원주 시내 온도가 날마다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갈 수는 없는 일이라 옷을 벗고 뛰는 날도 많았다. 차라리 기온이 더 내려가서 옷을 입고 뛰는 것이 훨씬 나았다. 아침 기온이 겨우 그 경계선에서 왔다, 갔다하여 옷을 벗고 뛰려면 얼마나 선뜩선뜩한지 해본 사람들만 알 수 있다.

 

훈련이 원래 12주였으나 우리는 폭동진압훈련을 1주 더 받게 되어 13주를 받았다. 12일에 시작하여 329일에 끝난 하사관 훈련을 마치고 내가 받은 군번은 84110131이다. 훈련도중에 전방부대에서 얼차려 받을 때에 다친 손 때문에 동상이 걸렸었다. 손이 심하게 부은 것을 본 중대장이 퇴소시키겠다고 해서 얼마나 쫄았던지.

 

하사관학교 훈련조차 못 받고 돌아간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볼 것인가? 그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중대장에게 손이 발이 되게 빌면서 훈련받게 해달라고 사정도 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거기서 끝을 내고 싶었다. 다행이 더 악화가 되지 않은 덕인지 퇴교 당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13주의 훈련을 무사히 마치면서 하사를 달고 열흘간의 특별휴가를 받았다. 입대해서 한 번도 가지 못한 휴가를 하사관학교 훈련 덕에 받았다. 원주에서 청량리로 가는 군용열차를 탔을 때는 정말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나는 그냥 부대에서 병장으로 진급하여 제대하는 것보다 하사라도 달고 제대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비록 장교는 아닐지라도 일반 사병보다는 한 끗발 위여서 어딜 가도 자신 있게 육군하사로 전역했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