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책에서 10・26을 보다

2012. 3. 23. 21:32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전방의 봄은 늦게 오지만 가을은 무척 빨리 왔다. 이미 9월 중순이면 아침, 저녁으로 차가운 날씨가 시작되고 멀리 보이는 북녘 땅 금성천에서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거기 물안개는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처음엔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아주 가냘프게 시작을 하고는 점점 두꺼워지고 짙어져서 나중엔 남북한 휴전선을 안개로 다 덮어버리고 만다. 그럴 때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꼭 바다 위에 있는 섬 같아서 배만 있으면 북한 땅으로 쉽게 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내가 시인이었다면 정말 멋진 시를 쓸 광경이었다.

 

내가 백암산 철책에서 근무를 서던 1979105일 추석날 북한 간첩이 철책선으로 침투를 했다. 우리 소대는 대간첩작전 비상근무를 서다가 작전에 의해 바로 ○○사단과 접한 부근인 서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때 경험한 일이라 아직도 생생한 것이, 간첩이 넘어와서 발각이 되면 우리 군이 너무 우왕좌왕한다는 거다. 간첩 둘을 잡기 위해 무려 10만이 넘는 병력이 투입이 되고 밤낮으로 간첩을 수색하다보니 나중에는 설령 간첩이 눈앞에 나타난다 해도 총도 쏘지 못할 만큼 지치게 되고 말았다.

 

우리 부대는 철책근무가 주 임무이니 밤에는 근무를 서고 낮에는 자야한다. 그런데도 낮에 잠을 안 재우고 모두 다시 철책으로 투입해 경계를 섰다. 그렇게 며칠 지나니까 다들 지쳐서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밤낮으로 간첩작전을 하다가 전혀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여 대간첩작전이 종료되었다.

 

10·26 박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넘어 온 간첩 중에 한 명은 사살되었고, 한 명은 잡지 못한 채 종료가 되었지만 그 간첩도 북으로 넘어가지는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넘어 갔으면 북한에서 넘어 왔다고 떠들어대는데 그 뒤로도 전혀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 땅속에서 얼어 죽지 않았나 싶다.

 

나는 1026일에 철책에 서 있었다. 그날은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한다. 26일에 우리 소대가 있는 곳으로 이동 매점이 왔었다. 25일이 월급을 받는 날이니까 26일에 이동 매점이 온 거였다. 이동 매점이란 매점이 없는 전방에 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차에 주로 먹을거리와 생활 소모품을 싣고 다니며 판매하는 차를 말한다.

 

그 차가 오면 개인적으로 사 먹기도 했지만 분대원끼리 돈을 모아 공동으로 사기도 했다. 물론 다 먹을거리였다. 부대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건빵뿐이었으므로 이동 매점이 오면 아이스크림이나 그때 유행하던 샌드위치 과자를 많이 사 먹었다.

 

근무를 나갈 적에 먹을 것을 가져갈 수는 없게 되어 있지만 나도 가져갈 정도였으니 다 주머니 속에 과자를 잔뜩 넣어가지고 나갔을 거다. 그때 같이 근무를 섰던 고참은 부산 출신의 김영국 일병이었다. 동아대학교를 다니다가 온 고참이었는데 내게 아주 잘 해주어 정말 내가 친형처럼 따른 사람이다.

근무 초소와 초소 사이는 원래 50m 기준이라고 하지만 산세가 험해서 보통 70, 80m 거리이고 좀 먼 곳은 150m 가까이 되는 곳도 있었다. 처음에 투입이 되면 밤 새워 거기만 서 있고 밤에 한두 차례 분대장이나 소대장들이 순찰을 돈다.

 

그러니 근무지에 나가면 두 사람만의 세계가 된다. 근무 초소라고 하니까 안에 들어가서 근무를 서는 것 같지만 그런 곳은 아예 드물고 보통은 다 밖에서 날밤을 새며 서 있다.

 

3중 철조망으로 구성되어 있는 철책선 뒤로 교통호가 죽 이어져 있고 교통호 중간 중간에 두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는 곳에서 앞을 보고 서 있다. 근무를 서는 공간에 가 보면 위에는 총을 거치해 놓을 수 있도록 Y자형 나뭇가지가 있고, 그 아래는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이 작게 있다.

 

앞에 크레모어가 설치되어 있으면 거기에 발사 잭을 연결할 수 있는 코드가 있어 초병이 투입되면서 잭을 연결시킨다. 그리고 수류탄을 꺼내 놓고는 소총만 가지고 앞을 본다. 간첩이 언제 넘어올지 모르는데 밤새 총을 들고 서 있기가 힘이 드니까 총은 거치대 위에 올려놓고 두 사람이 권투도 하고 장난도 하면서 밤을 보낸다.

 

교통호 뒤로는 콘크리트로 만든 벙커가 설치되어 있지만 거기에 들어가서 근무를 서면 시야가 좁아지고 잠이 온다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간혹 고참병들이 거기 들어가서 잠을 자고 졸병들만 혼자 세워놓았다가 걸리면 영창에 간다고 들었다. 같이 근무를 서는 고참을 잘 만나면 밤새 이야기하고 이야기에 지치면 교대로 눈을 붙일 수도 있지만 성질 더러운 고참들은 저만 실컷 자고 졸만 세워놓는 일도 많다고 들었다.

 

철책에 나가면 우선 가져온 것들을 다 제 자리에 놓고 철책에 무슨 이상이 있는 지 살핀 다음에 자기 위치에 선다. 그게 철책 근무의 시작이다. 우리는 그날 여섯 시쯤에 나갔으니 아마 여섯 시 반쯤부터는 정식 근무에 들어갔을 거였다. 나는 가지고 나간 과자를 열심히 먹고 있는데 갑자기 김 일병이, “야 영주야 저기 하늘을 봐라. 아주 큰 별똥이 떨어진다!” 하고 소리를 쳤다.

 

그래서 얼른 바라보니 정말 큰 대접만한 별똥이 붉은 빛을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별똥 중에 그보다 큰 것은 보지 못했다. 김 일병은 별똥이 떨어지면 사람이 죽는다고 했는데 오늘 저렇게 큰 별이 떨어졌으니 누군가 위대한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나야 과자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어 건성으로 , 하고 대답만 했을 뿐이다.

 

그 밤이 지나고 아침에 철수하여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치워야 잠을 잘 수가 있으니까 우리 바로 위의 고참들이 부지런히 식기를 닦고 있었고, 아직 식기를 닦을 군번이 안 된 우리는 그렇다고 먼저 잘 수가 없으니까 곁에서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졸병들이 도우면 더 빨리 끝날 수도 있지만 자기 군번이 할 일이 아니면 끝내겠다고 거들 수도 없었다.

 

그러고 있을 때에 내무반 청소를 담당하는 나보다 두어 달 늦은 서건석 이병이 뛰어와서 대통령이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고 물으니까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 대통령이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잠시 뒤에 일이 다 끝나서 내무반으로 몰려 들어가니 소대장이 혼자서 듣는 독수리표 카세트라디오에서 잔잔한 음악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이거야 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아닌가?

 

미국 대통령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통령이 서거한 거였다. 그 방송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냥 다 모포 속에 누워서 라디오 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나는 27일 오후에 주간 근무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자야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오후 근무는 점심밥을 먹고 바로 나가서 오전 근무자와 교대를 해야 했었다.

 

다들 지금 잠을 자고 일어나야 오늘 일과를 할 수가 있을 텐데 아무도 잠에 들 지 않은 것 같았다. 소대장이 계속 자라고 얘기해도 누구하나 눈을 감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 다 전쟁에 대한 걱정이 앞섰을 일이다. 전쟁이 난다면 우리는 바로 그 현장에 서야 하는 거가 아닌가?

 

당장 나부터도 전쟁이 난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먼저 떠 오른 걱정이었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소총과 실탄, 수류탄이 다인데 훈련소에서 배운 북괴군의 무기가 넘어오면 바로 우리 코앞에서 부딪쳐야 했다.

 

잠을 자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이 오질 않아 뜬눈으로 오전을 보냈다. 그러고는 바로 근무 교대하러 나갔다. 오전에 막사에 들어오지 않고 근무를 섰던 두 사람이 교대를 나온 우리에게 저것들이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고 하는데 대체 무슨 얘긴가?’ 하고 물었다. 우리는 아는 대로 대통령이 죽었다고 말을 해 주고 근무에 들어갔다.

 

전에는 밤에만 떠들어 대던 북괴초소에서 계속 악랄한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떠들고 있었다. 밤에는 더 잘 들리지만 낮에도 그쪽 초소에서 소리 지르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거리였다.

 

나도 맞받아서 김일성이 총에 맞아 죽었다고 외쳐댔다. 그렇게 서로 주고받다가 밤이 되었다. 우리는 근무조가 나온 뒤에 막사로 가서 저녁밥을 먹고 다시 초소로 나갔다. 우리는 27일에 부대가 가지고 있던 대부분의 탄약을 근무 초소로 옮겨다 놓았다.

 

우리 철책선에는 동쪽에서 서쪽까지 6백리에 걸쳐 군데군데 취약지역에 전등을 켜지만 북한 초소는 내가 본 동안은 한 번도 불을 켠 적이 없었다. 그러나 27일 밤에는 그들의 GP(GUARD POST) 부근을 낮같이 밝혀 놓았다. 언제 전기공사를 했는지 본 적이 없었으나 갑자기 전깃불을 켜 놓은 거였다. 그러고는 끊임없이 동무들~, 악랄한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리를 질러대었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될 때 상호 비방을 않기로 합의가 되서 전방에서 서로 사용하던 24개 묶음의 스피커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저들의 목소리는 아주 뚜렷하게 들려왔다. 우리는 주로 장판지를 오려서 만든 깔때기를 사용했으나 그 소리는 북측에 비해 아주 미약했다. 그래도 우리 소대에서는 내 목소리가 제일 커서 가끔 내가 소리를 질러대곤 했었다.

 

그날은 나도 소리를 많이 질렀다. ‘눈에는 눈이라고 김일성이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반복해서 목이 쉬라고 외쳐댔다. 그럴 때에 갑자기 우리 부대 옆의 ○○사단과 북괴 측의 실탄공방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누가 쏜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양쪽에서 계속 기관총을 쏘아댔다.

 

우리 기관총은 다섯 발의 실탄에 예광탄이 하나씩 끼여 있어 밤이라 불이 날아가는 것이 잘 보였다. 그 실탄들이 누구를 겨냥해서가 아니라 세 배의 원칙에 따라 쉬지 않고 불을 뿜었다. 저 쪽에서 하나가 오면 우리는 세 배로 갚아야 하는 것이고, 저들도 우리가 한 발 보내면 세 발을 보낼 때니 그 공방전은 한참 동안 계속 되었다. 그러고 날이 밝았다.

 

28일에 후방 어느 광산에서 매몰사고가 일어나 1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도 북괴GP에서 우리에게 전달해 준 뉴스였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수선한 가운데서 하루, 이틀 시간이 흘러갔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는 차츰 냉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전쟁이 날 거라는 우려가 점점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부대 뒤에는 중장거리 포대와 미사일 부대가 이동해 배치가 완료되었고 모든 대비가 끝난 상태였다. 전쟁이 날 것 같으면 우리가 정신없어 할 때에 났지 이렇게 준비가 된 뒤에는 저들도 쉽게 못 내려오리라는 것을 우리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일촉즉발의 순간에 저들과 마주 보는 현장에 서 있었다. 솔직히 전쟁이 발발할까봐 걱정도 했지만 우리가 맡고 있는 지역만은 확실하게 지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