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2012. 3. 21. 20:23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든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때문이라고 들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사람 속에서 살아야하지만 그 사람 속이라는 것이 개개인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것이 꼭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만났어도 좋은 사람이 있고, 어쩔 수 없이 만났어도 싫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어떤 곳보다 군대생활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전부 사람과의 관계 때문이다. 그저 윗사람 잘 만나는 것이 최고라는 곳이 군대이다. 그 윗사람은 상관일 수도 있고 고참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윗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군대 생활이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질 수도 있으니 결국 군대생활의 최고 관건은 어떤 만남이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원주 하사관학교에 차출당해서 갔지만 솔직히 지원해서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함 대위가 중대장으로 있는 부대에 더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있던 김 대위는 육사출신으로 장군이 되기 위해 대학을 다니다가 늦게 육사를 졸업했다는 사람이었다. 카리스마가 넘쳤고 나름대로 자신의 프라이드가 강해 사병들이 충분히 인정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후임으로 온 함 대위는 삼사출신으로 우리 중대 1소대 분대장과 고등학교 동기라고 들었다. 그러니 우리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서인지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아니 그 중대장과 긴 시간을 같이 생활을 한 것은 아니어서 내가 그 사람을 정확히 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른 중대원들에게는 좋은 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적응을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나는 육군 제1하사관학교 소총분대장반 제 226기로 하교대 대대 ○○중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중대장 이 대위는 삼사출신으로 말년이었고 내가 속한 1구대 구대장은 삼사출신 이 중위였다.

 

우리는 하사관후보생으로 보통은 하후생이라고 불렀고 밖에서는 단풍하사라고 했다. 우리가 달고 있는 하사 계급장이 빨간색 작대기 네 개에 노란색 V가 결합되어 있어 그렇게 부른 거였다.

 

하사관학교에서 만난 윤 중사는 우리 부구대장이었다. 서울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들었고, 자기 동생이 무슨 정신지체가 있어 그 동생을 위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하사관으로 장기지원을 했다고 했다. 잘 웃고 농담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13주 교육을 받으면 하사관학교를 떠날 것이고 거기를 떠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이였으니, 하사관학교 사람들에 대해 자세한 것을 알 필요도 없고 관심을 둘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 윤 중사와 정말 악연으로 만났다고 생각한다.

 

당시 우리 중대 하후생 중에 대학생은 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때의 대학생이라면 대학에서 교련교육을 받아 군 복무기간을 단축 받았기 때문에 하사관학교에 올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 병력들이 대부분 충청도 병력이라 고졸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 병력이 오면 학력이 높지만 지방, 특히 농촌 출신들은 고졸 이상이 드물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야 말이 대학생이지 대학에 입학만 하고 바로 갔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면 고졸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신상명세서에 최종학력을 쓸 때는 대학재학으로 쓰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윤 중사에게 박힌 첫 번째 미운 털은 대학생이라고 얘기한 것 때문이라 확신한다. 괜히 시샘하는 것처럼 윤 중사는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잘 비웃고 면박을 주곤 했다.

 

그렇다고 뭐라고 항의할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늘 당하고만 있었다.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고 주변에서 보는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비춰서 부구대장이 나타나면 늘 내게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동기들이 있었다. 게다가 부구대장의 신임을 받는 후보생을 구대 기수로 만들려고 먼저 기수를 하고 있던 하후생을 기수에서 밀어낸 적이 있었다. 내가 직접 항의할 일은 아니었고 또 감히 부구대장에게 대들 수도 없는 일이라 직접 말을 못했지만 그 친구를 위로하고 새 기수를 욕하고 다닌 것이 다 부구대장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학교에 사격장이 없고 학교에서 16km 정도 떨어진 서석이라는 곳에 사격장이 있어 그리로 사격을 하러 갔었다. 그때가 2월 중순이었지만 산 속이라 무척 추워서 야간 사격을 하러 나갈 때에 나는 군용 벙어리장갑을 가지고 나갔다. 대기하고 있을 때에 장갑을 끼었다가 달밤이라 부구대장에게 걸려 버렸다.

 

그날 내가 얼마나 맞고 얼차려를 받았는지 곁에서 본 동기들은 다 알고 있다. 주먹과 발로 얼굴과 다리를 수도 없이 패고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은지 맨땅 위를 얼마나 기어 다니게 시켰는지 모른다. 무려 한 시간 이상을 맞고 얼차려를 받았다.

 

어떻게든 피해 다니고 윤 중사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이상하게 잘 걸렸다. 하교대서는 일요일에 종교 활동을 나갈 수 있어 불교와 개신교, 천주교 중에 하나를 택해서 나갈 수 있었다. 종교 활동을 나가지 않으면 내무반에서 시간을 보내기가 무료하고 자칫 작업병력으로 차출되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개 하나를 선택해서 나간다.

 

나는 불교신자라고 자처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불교라고 절에 다녔다. 절에 가면 다 좋은데 예불시간에 앉았다, 섰다를 자주 반복해서 잠을 자기가 불편한 것이 흠이었다. 그래도 딱히 갈 곳이 마땅하지 않아서 일요일이면 늘 절에 가는 팀에 끼었다.

 

어느 일요일에 절로 종교 활동을 갔다 왔더니 가깝게 지내는 동기가 그날 교회에서 성경 암송대회가 있다며 가자고 했다. 내가 외우는 것을 잘 하니까 가서 조금만 잘 하면 선물도 받을 수 있다고 유혹했다. 저녁에 무료하게 내무반에 있는 것보다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서 저녁 먹고 교회에 가겠다고 신고를 하러 갔다가 당직을 서던 부구대장에게 걸렸다.

 

오전에 불교 행사를 갔다가 온 놈이 왜 저녁에 교회에 가냐는 거였다. 그런 저런 일로 걸린 동기가 여섯인가 되었다. 다짜고짜로 뺨을 몇 대 후려치고는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한참 굴리더니 이젠 옷을 벗기고 목봉체조를 시켰다.

 

여섯이서 목봉체조를 하는 것은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인데도 잔인하게 웃으며 우리를 괴롭혔다. 전부 땀을 뻘뻘 흘리며 목봉의 무게에 힘이 빠져갈 때 웬 지프가 조용히 우리 앞으로 왔다. 학교 주번 사령인 중령이 순시를 나왔다가 밤에 체조하고 있는 우리를 보고 놀라서 쫒아온 거였다.

 

중령이면 학교 대대장급이다. 윤 중사는 가혹행위라고 호되게 꾸중을 듣고는 우리를 들여보내더니 다시 행정반으로 불러 얼마나 팼는지 모른다. 우리 때문에 자기가 책임을 묻게 되었다고 화풀이까지 해댔다. 이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나는 정말 이를 갈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원망한 적은 있어도 남을 증오한 적은 없었는데 이 윤 중사만은 정말 증오했다. 그러면서 하사관학교 졸업할 날만 기다렸다. 나도 그에게 보복을 하고 싶어서였다.

 

끝나고 나가면 헌병대에 소원 수리를 할 작심을 했다. 내게 어떤 불이익이 온다고 해도 저런 작자를 군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때 내 생각이었다. 나 말고도 윤 중사에게 이를 가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나올 때는 소원 수리를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헌병대까지 찾아가서 얘기할 것은 또 아니지 않은가?

 

나는 웬만한 사람과의 감정은 오래 두지 않는다.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지만 윤 중사는 지금 만나도 전혀 반갑지 않을 것 같다. 아니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사람이 웃으며 손을 내밀어도 나는 외면할 수 있을 거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지금 만나면 내가 어떻게 대하게 될지는 솔직히 모르는 일이다.

 

그 사람도 이제 옷을 벗을 때가 돼 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