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1. 20:12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군대에서 만난 상관만 계산해 봐도 상당히 많은 사람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먼저 훈련소에서 만난 우리 소대장과 중대장, 그리고 대대장, 자대로 전입 가서 만난 소대장과 중대장, 대대장, 하사관학교 시절의 구대장과 중대장, 대대장, 다시 훈련소로 와서 만난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까지 하면 열둘이나 된다.
직속상관이라고 하면 연대장과 사단장까지 포함이 되지만 실제로 그분들하고는 이야기를 나눈 기억조차 없다. 겨우 대대장이 내가 만날 수 있던 높은 분이다. 그 대대장도 전방에서는 높은 자리다. 그러다보니 내가 가장 많이 상대한 상관은 주로 중대장들이다.
물론 소대장이 더 가까운 위치에 있지만 소대장은 그렇게 상관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고 군대 생활에서 가장 많이 기억나는 사람들이 중대장들이다. 나는 중대를 네 번 옮긴 셈인데 내가 만난 중대장은 여섯 분이다.
8연대 ○중대에서 중대장이 한번 바뀌었고, 내가 분대장으로 있던 훈련소 ○중대에서 중대장이 다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들 여섯 분 중에 가장 기억에 남고 꼭 보고 싶은 분이 훈련소 ○중대 후임 중대장이었던 김춘만 대위이다.
김 대위는 부산출신이다. 처음에 가서 만나 중대장인 신 대위는 최고참이었으나 김 대위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결혼해서 신혼이었고 우리 중대장으로 왔을 때까지 아이가 없었다. 중대장님은 부대 바로 아랫마을에 단칸방을 얻어 살림을 했다.
김 대위를 처음 만났을 때의 소감은 한 마디로 ‘털털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미남은 아닌데다가 몸도 가꾼 티가 없는, 어디서 농사를 짓다가 왔다면 딱 맞을 모습이었다. 말도 세련되게 하지 못했지만 외모가 정말 군인 같지 않았다. 표정도 늘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어두워 보이는 얼굴이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처럼 보였다. 언뜻 보면 세상의 힘든 삶에 찌든 중년 남자의 모습 같았다.
사람이 외모가 세련되어야 꼭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처음에 만났을 때는 상당히 실망스런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좀 멋진 중대장이 와야 다른 중대에서 볼 때도 나을 텐데 우리 중대에서부터 별로라고 생각했으니 다 내 맘 같지 않았을까 싶다. 하기야 세련된 중대장이 오면 오히려 부대원들 군대생활만 더 고달프다는 것이 통설이라 겉모습만 보고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김 대위는 와서 이내 우리 중대원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같이 생활하게 되었으니 집에 와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얘기였다. 우리 분대장들을 부르기 전에 이미 소대장, 선임하사들과는 자리를 했겠지만 그렇게 다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칸방에서 살림하는 처지라 우리가 다 들어앉기도 비좁은 방인데도 불러서 사모님이 저녁밥을 지어 주셨다.
사모님은 무척 예쁘고 상냥해서 두 분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모님은 우리에게 ‘중대장님이 자상하지 못하고 일을 건성으로 할 때가 많으며 마음에 없는 말도 할 때가 있지만 마음은 여린 분이니 상처받지 말고 잘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중대장님 집에 다녀와서는 중대장님에 대한 선입견을 많이 바꾸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같이 생활해보니 여러 면에서 먼저 중대장과 비교가 되었다. 중대장님은 훈련을 나가도 훈련병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교육은 소대장과 우리에게 맡기고 더덕을 캐러 다니거나 나물을 뜯는 것이 일이었다.
탄띠에 대검을 차고 다니다가 더덕을 보면 그 대검을 뽑아 더덕을 캐니 칼날이 견뎌내질 못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툭하면 다른 대검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니 행정병의 원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중대장님의 그런 행동은 내가 봐도 많이 심한 정도였다.
어떤 때는 훈련병들 뛰어다니는 교장에서 낮잠도 잘 잤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겐 훨씬 편한 일이다. 조교들이 훈련병 다루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자고나서 하는 일이 그게 다인데 간섭하는 것보다 그냥 맡겨두는 것이 오히려 나은지도 몰랐다.
중대장님이 부임해온지 얼마 안 된 때에 오소리를 한 마리 잡아왔다. 어미는 아니고 어디서 조금 자란 새끼 한 마리가 냄새를 맡고 내려왔다가 운이 없어 우리 중대장에게 잡힌 거였다. 이것을 토끼집 같은 나무상자에 넣어 기르려고 오소리 집을 만들었으나 며칠 못 가서 죽고 말았다.
중대장님은 이 오소리의 쓸개가 필요하다고 잡아달라고 했다. 이런 일은 나보다 감자하사가 전문인데 감자가 잡기를 싫어해서 내가 잡았다. 다들 못한다고 하면 처음 온 중대장에게 개긴다고 할까봐 그냥 내가 처리했다. 오소리 쓸개는 멧돼지 쓸개보다는 못하지만 귀한 약재로 쓰인다고 했다. 이 일이 있고나서 나와 중대장님은 보다 가까워졌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대장님을 가깝게 생각한 것은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나를 보내서 돕게 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중대장이면 다 당번병이 있어서 부대 안에서나 밖의 일까지 당번병이 살림을 도왔지만 훈련소에서는 그렇게 할 여력이 없었다. 분대장은 대부분 하사였고 사병은 중대에 배속이 되어있어도 훈련소의 일을 돕기 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모님이 혼자서 하기 버거운 일은 비공식적으로 부대원을 보내서 도와야했다.
그런 일에 늘 내가 다녔다. 내가 원해서 간 것은 아니고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사모님이 나를 보내달라고 했다고 했다. 나도 사모님에게 무척 호감이 가서 부탁을 받으면 기꺼이 가서 도왔다. 한 번은 중대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야 이 하사, 우리 집사람이 이 하사에게 취나물을 뜯어달라고 얘기하라더라.’ 하셔서 훈련병들 휴식시간에 잠깐 뜯게 했더니 금방 한 푸대가 넘었다.
집에서 나물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나도 틈틈이 고사리를 뜯어서 중대장님께 드렸고, 한번은 느타리버섯을 한 주전자 뜯어다 드렸다. 이렇게 나물을 보내면 얼마 안 있어 우리를 집으로 초대하여 저녁을 차려주셨다.
술이야 늘 마실 수 있으니까 크게 고마워할 것은 아니지만 군대에서 사제(私製)밥을 먹는 것보다 더 반가운 것은 없을 정도였으니 그렇게 신경을 써 주시는 사모님이 늘 고마웠고 그래서 무엇이든 도와드리고 싶었다.
추석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아침에 중대장님이 불러서 갔더니 사모님이 화천에 일이 있어 나가야하는데 내가 가서 도와주면 좋겠다고 해서 혼자서 사모님을 따라 화천으로 갔다. 추석 장도 보고 고장이 난 TV를 수리해야하는데 혼자서 들고 나가기가 무거웠던 모양이다. 나야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것이니 나쁠 것이 없었다.
우리 훈련소가 있는 풍산리에서 화천읍내에 나가려면 버스를 타고 30분이 조금 넘게 나가야한다. 풍산리에서야 늘 우리가 큰소리치지만 화천은 우리 칠성사단의 본부가 있는 곳이라 풍산리하고는 비교가 안 되고 헌병들도 많아서 나가면 늘 조심스러웠다.
여기 저기 따라다니면서 일을 보고 점심은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맡겼던 TV를 찾고 일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버스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다가 헌병에게 걸렸다. 일과시간에 사적인 일로 외출을 나왔다고 걸고 넘어져 별 수 없이 헌병에게 외출증을 넘겨주고 말았다. 일이 그렇게 되어 상당히 미안했고 그게 혹 중대장님에게 누가 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없이 끝났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로 나는 중대장님과 사모님을 더 가깝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정말 가족처럼 여겼다.
전역을 하고서 훈련소로 편지를 몇 번은 했던 것 같다. 그때 중대장님에게 편지를 보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적어도 한번은 보냈던 것 같고 답장은 못 받은 것 같다.
내가 군 생활을 같이 한 사람 중에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감자하사이고 그 다음은 중대장님 가족이다. 중대장님도 지금쯤은 전역을 했을 것이고 그때까지 없었던 자녀도 낳아 군에 다녀왔을 거라 생각한다.
'시우 수필집 > 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교에서 강등된 하사 (0) | 2012.03.21 |
---|---|
감자가 된 사과 (0) | 2012.03.21 |
내게도 전속당번이 있었다 (0) | 2012.03.21 |
월동준비 (0) | 2012.03.21 |
사나이 가슴에 불을 당긴다 (0) | 2012.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