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까마귀라 그랬는지

2012. 3. 23. 21:46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풍산리 신병훈련소는 우리가 처음이었다. 우리 이전까지는 논산이나 후방 훈련소에서 기본훈련을 받은 신병들이 사단으로 전입이 되면 노동리 훈련소에서 필요한 훈련을 받고 각 연대로 배치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전방 사단마다 훈련소를 설치하고 아예 입영 장정을 받아 자기 부대에 맞는 훈련을 시키라고 해서 기존의 1개 대대 병력을 전부 다른 부대로 전출시키고 그 부대가 있던 곳을 신병훈련소로 급조해서 신병을 받았다.

 

춘천 103보충대에서 받은 내 군번이 33000152번이다. 군에서는 이 군번을 33군번이라고 했다. 33군번이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와 같이 입대한 병력부터 시작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처음으로 시작된 군번에서 내가 100번 밖이라는 것은 조금 의아했지만 어디 가서 따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우린 토요일에 입소해서 월요일에 신고식을 시작한 뒤에 바로 훈련에 돌입했다. 우리보다 앞선 병력들은 후방에서 전반기 4주 훈련을 받고, 다시 전입 부대에 가서 후반기 4주 훈련을 받았다고 들었으나 우리는 그대로 8주 훈련을 한 곳에서 받았다.

 

체중이 85kg이던 나는 뛰면서 하는 일은 언제나 힘에 부쳤다. 체중만이 문제가 아니라 운동신경도 아주 둔하고 몸동작도 굼떠서 어딜 가나 힘에 겨웠다. 아침에 기상해서 정신없이 침구 정리를 하고 연병장에 모인 다음 가벼운 체조를 한 뒤에 왕복 3km 정도 구보를 한 뒤에 청소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나는 침구 정리부터 늘 헤맸고 밥을 먹는 속도도 느려서 밥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아니 속도가 느려서가 아니라 그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70%에 보리쌀 30%로 시골에서의 자기 집 밥보다 쌀이 훨씬 많이 들어간 밥이지만 썩은 냄새가 나는 그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밥을 버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대부분의 훈련병들은 밥이 부족해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먹을 수 있을까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에 나는 밥이 넘어가지 않아서 남기는 웃지 못 할 일이 생긴 거다. 차라리 시골에서 하는 보리밥은 그냥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정부미로 한 밥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반장격인 향도를 맡아서 늘 우리 분대 분대장 식사를 함께 타 가야 했다. 그러다보니 내 밥은 다른 훈련병보다 더 많이 퍼주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그냥 조금만 주어도 될 것을 더 많이 줘서 못 먹고 남기니 내 짝인 공주 출신 훈련병만 늘 신이 났다. 그가 내 밥을 거의 다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지금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공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군에 온 순박한 농군이었다. 외워야할 것을 잘 외우지도 못하고 눈치도 빠르지 못해 늘 얻어터지고 얼차려 받는 친구였지만 식사시간만은 누구보다도 행복했을 거였다. 훈련소를 퇴소할 때까지 늘 내 밥을 더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파김치가 된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날마다 뛰고 달리니 몸이 견디어 내지를 못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훈련을 받으면서 다음에 절대 아들을 낳지 않겠다는 말들을 서슴없이 했겠는가? 훈련소가 있는 곳이 지대가 험하기도 했지만 처음 받은 훈련병이라 어디까지 훈련을 시켜야하는지 감이 안서서 더 훈련을 심하게 시켰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고된 훈련 생활이었지만 내게는 남이 알지 못하는 큰 즐거움이 하나 있었다. 나를 알아주는 분대장이 있어서였다. 우리 훈련소는 체제가 전투부대 편성이어서 조교가 곧 분대장이었다. 그 조교 중에 나는 우리 분대장도 아니고 우리 소대도 아닌 3소대의 박종륜 상병을 훈련소에서 만나는 인연을 가졌다. 이것이 내 군대 생활 중의 첫 행운이었다.

 

내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 새끼 네가 얼마나 잘 먹고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버티나 보자!”라고 악담을 한 분대장도 있었지만 훈련소에서 사람을 사람으로 처음 대해준 사람이 박종륜 상병이다.

 

우리가 훈련소에 입소한 지 일주일쯤 지난 뒤에 점호가 끝난 뒤에 불침번이 와서 분대장이 나를 부른다고 했다. 점호 전 얼차려에서 이미 혼이 반이 나간 상태라 정신없이 뛰어가서 “83번 훈련병 이영주 분대장님 부름 받고 왔습니다.”하고 소릴 질렀다. 그랬더니 ! 조용히 해라, 편히 쉬어이러면서 플라스틱 컵을 불쑥 내미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머뭇거리니까 이거 한 잔해라라고 하면서 곁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정말 놀랐다. 대체 한 번 얘기한 적도 없고, 아는 사이도 아닌데 지금 이 상황은 납득이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얼떨떨해 하니까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떨지 말고 잠깐 앉아라, 너 술 잘 마신다며? 네 자기소개서 다 봤다. 언제 밖에 나가면 한 번 붙어보자.”라고 하면서 그 잔을 비우라고 했다. 그 플라스틱 컵에 술이 2/3정도가 들어 있었다. 얼른 한 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새우깡 두 개를 주면서 안주는 이게 다다. 가서 자라.”라고 했다.

 

그 소주의 힘이 내 몸을 머리위에서 발끝까지 알싸하게 만들었다. 바로 잠이 들 수가 없었고, ‘소주가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술을 무척 많이 마신 편이지만 그날 밤에 내가 느꼈던 그 기분은 한 번도 다시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시작이 되어 매일 저녁은 아니지만 하루건너 한 번 정도는 소주를 마실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군대에 가서 보면 가장 많이 따지는 것이 지연(地緣)이다. 서로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라도 같은 도 출신만 되면 괜히 반갑다. 거기다가 같은 군이라도 되면 더 말할 나위가 없어서 친구, 친척 다 이름을 대면서 무엇인가 서로 연결할 끈을 찾는다.

 

혈연(血緣)이나 학연(學緣)도 무시할 것은 아니지만 가장 먼저가 지연이었다. 박종륜 상병은 고향이 충북 괴산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고향 얘기를 서로 나눈 적이 없었고 다른 사적인 얘기도 같이 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잘 대해 준 것을 보면 무엇인가 끌리는 정이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어딜 가나 인복(人福)이 많아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도움을 받는다. 삭막한 훈련소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박 상병과의 만남은 고된 훈련을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되었다. 사격장에서 엄청난 얼차려를 줄 때에도 내가 있으면 슬그머니 빼줘서 크게 힘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훈련소 생활이 내겐 정말 고되고 힘이 들었지만 그런 생활을 별 탈 없이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박 상병의 따뜻한 마음 덕이라고 생각한다. 잘 먹지 못하고 많이 움직이니까 살이 빠져서 8주 훈련이 끝난 뒤에 내 체중은 정확히 20kg이 줄어 65kg으로 바뀌었고 이 체중은 나중에 전역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훈련소에 입소할 때에 나는 거금이라고 할 수 있는 돈 5만원을 가지고 갔었다. 그것을 집으로 다 송금할 때에 송금하지 하고 예치시켜두었다가 훈련소 퇴소 전날 찾았다. 내가 그 돈으로 제일 먼저 한 일이 우리 소대 회식자리를 마련한 일이다.

 

인사계님과 선임하사님들에게 부탁을 드려 약간의 술과 안주를 사 올 수 있었고 그것으로 조금 취하면서 즐길 수 있었다. 우리도 처음 입소한 훈련소였고, 거기 분대장들도 처음 훈련을 시켜 내보내는 자리라 정말 정을 많이 나눌 수 있었다. 밤이 늦도록 마시고 취했고 즐거웠고 아쉬웠다.

 

우린 훈련소를 떠나면서 다들 울었고, 우리를 보내는 분대장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무섭게 다루고 힘든 훈련을 한 곳이었지만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 헤어짐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박종륜 상병과의 작별이 너무 아쉬웠다.

 

다음날 나는 8연대로 배속이 되어 군용트럭에 실려 연대 본부로 갔다. 그 뒤로 박종륜 상병과 편지 한 번을 주고받고는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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