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3. 21:51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79년도 3월 2일에 대학교에 입학을 하였지만 입학 전에 이미 입영 영장을 받았었다. 78년 6월 입대 신체검사를 받을 때에 나는 재수생임을 밝혀 입대 날짜를 최대한 늦춰 받았다. 그렇게 해서 4월 3일에 가게 되었다.
대학의 입학식이 끝난 뒤에 1주일동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받고는 바로 휴학을 했다. 서울에 있을 곳도 마땅치 않았고 또 대학수업을 들어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어서 적잖이 실망스러워 휴학계를 냈다.
휴학을 하고서 여기저기 친인척 집을 찾아다니며 군 입대 인사를 했다. 지금 관행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엔 이렇게 다니면서 용돈을 얻어 썼다. 다행히 대학에 합격을 하고서 군에 갔기 때문에 어딜 가나 좋은 대접을 받았다. 경후하고 같은 날 입대하게 되어서 둘이 같이 많이 돌아다녔다. 나나 경후나 양쪽 집안의 웬만한 친인척은 거의 알고 지내는 편이라 같이 다녀도 별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그런 풍속이 다 없어졌겠지만 그때는 누가 군에 간다고 하면 자기 집으로 불러서 밥을 한 끼 대접하였고 동네 어른들이 막걸리 잔치 정도를 해주었다. 그러니 군에 간다고 하면 한 달 정도는 날마다 술에 절어 지내는 것이 시골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도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얻어먹고 마시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아무 걱정 없던 시절이었다.
입영 일자인 4월 3일이 화요일이어서 3월 31일 밤에 정식으로 송별연을 마련했다. 친구들이 해준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준비했다. 주로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이 와서 같이 시간을 보냈는데 밤새 막걸리를 마시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놀았다.
나보다 훨씬 먼저 해병대에 입대했던 정혁이가 말년휴가를 나와 같이 놀아주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용인이, 대전에서 온 정재, 청주에서 온 재진이, 서부에서 온 용대, 결성에서 온 천범이 등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은 다 와서 밤 새워 놀았다.
일요일 낮에 다들 떠나고 집에 혼자 남았다.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고 다음 날 월요일에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경후와 함께 집을 나서 홍성으로 갔다. 누나와 막내아우가 홍성에서 자취를 하고 있어 거기서 하루 자고 아침에 바로 소집장소인 홍성고등학교로 가기로 했다. 지금은 다들 훈련소까지 알아서 가지만 그때는 한 곳에 집결하여 군용열차를 타고 같이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 사람이 입대를 하면 보통 친구가 두셋은 따라오니 606명 입영에 2,000명은 움직일 것이고, 대개 아홉 시에 모이기 때문에 하루 전날 홍성에 와서 자는데 그런 날이 홍성 명절날이었다. 입대하는 당사자나 따라온 친구들이나 밤새 마시고 떠들어도 누구 하나 간섭을 할 사람은 없었다.
나와 경후는 근 한 달 가까이 마시고 다닌 터라 그날은 술을 안마시고 일찍 잤다. 그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는 다음 날 기차를 타고 깨달았다. 가면서 먹으라고 누나가 빵을 한 보따리 사줘서 가지고 기차를 탔다. 차에 탈 때는 소지품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고 차에서 건빵 두 봉지를 나눠줬다. 그게 그날 점심이고 저녁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다들 전날 술을 많이 마시고 차를 탔기에 목이 마르고 화장실을 드나들려 했지만 차에는 물도 없어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입영장정들만 탄 차라 그런지 기차마다 있는 이동매점도 없었다. 누나가 사준 봉지에는 음료수가 들어 있어 나는 아무 고생도 겪지 않았지만 차 안에서 갈증으로 고생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들었다.
차가 홍성역을 출발하려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플랫폼에 나와 손을 흔들고 울고 하는 모습이 보여서 많이 우스웠다. 내게는 저렇게 눈물을 흘릴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개운하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다. 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셨고, 내가 홍성역으로 들어갈 때에 배웅 나온 누나도 눈물을 흘렸지만 차창 밖에서 눈물 흘리며 손을 흔드는 여자들하고는 전혀 다른 거였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홍성역을 벗어나자 갑자기 창밖 풍경이 새롭게 보였다. 늘 기차를 타고 다니던 길이지만 언제 다시 이 길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어머니 앞에서도 누나 앞에서도 웃음을 보이며 나왔건만 막상 그런 생각이 드니 눈물이 나왔다. 그것도 잠시, 이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창밖 풍경을 열심히 보고 싶었다. 한 번도 졸지 않고 용산역까지 왔다. 용산역에서 서빙고역, 청량리로 돌아 기차는 춘천으로 달렸다.
입영장정들이 다 근심어린 얼굴로 앉아들 있으니까 책임자로 온 장교인지 대위 한 분이 이런 저런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며 우리들 긴장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다. 전혀 알지 못하는 분이지만 무척 고마웠다.
그 와중에 사진을 찍으라고 권하는 하사관 아저씨도 있었다. 부대로 배치받기 전에 사진이 나온다면서 사진을 찍으라고 권하는데 사진 값이 시중의 배나 되었다. 그래도 찍는 사람들이 많았고 나도 광석이와 둘이 찍어 그 사진이 지금도 집에 있다.
우리가 춘천역에 내린 것은 저녁 여섯 시가 넘어서였다. 가로등이 많지 않아서인지 많이 어두웠다. 내리자마자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이 나와서 건빵을 달라고 소리치고 다녔다. 나도 출발하기 전에 받은 건빵이 두 봉지가 있어서 별 생각 없이 하나를 소리치는 아이들에게 던져 주었다.
건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물결처럼 왔다가 사라진 뒤에 우리를 데리러 온 장교들이 건빵을 준 장정들에게 저녁식사로 준 것인데 그것을 남을 줬다고 화를 내었지만 이미 다 엎어진 물이었다.
지붕을 씌운 군용트럭에 20명씩 태워서 103보충대가 있는 소양댐 아래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가운데 이번엔 차를 운전하는 운전병들이 빈 담배 곽을 창 뒤로 보내면서 거기에 담배를 채워서 달라고 했다. 나야 담배가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 그런 부탁을 누가 거절하랴! 그 빈 담배 곽을 채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뜯지 않은 새 담배도 여러 곽이 내려갔다.
드디어 부대에 도착했다. 다들 배가 고팠으나 출발할 때 준 건빵 두 봉지가 우리가 그날 지급받은 식량의 전부였던 모양이다. 건빵을 먹을 수 있도록 물은 가져다주었으나 이번엔 먹을 건빵이 없었다. 그러고는 그날 밤부터 우리 입영장정에게 불침번을 세우며 잠을 재웠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4박 5일간 보충대에서 생활을 했다. 거기서는 군인신분이 아니었다. 아침에 기상해서 운동 조금하고 밥을 먹고 나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검사를 받거나, 혹은 몰려다니며 담배를 피우곤 했다. 다들 같은 지역에서 왔으니까 끼리끼리 놀았고 군에 대한 무슨 정보라도 얻으려고 애를 썼지만 다 거기서 거기였다.
우리 내무반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 여○○ 병장이었다. 병장이 만날 건빵을 입에 달고 다녀서 속으로 우습게 생각했다. 나중에 들으니 보충대에 있는 사병들은 다 뒤가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 여 병장을 한참 뒤에 우리 훈련소에서 보았는데 아마 우리 입대할 때에 이등병 정도였던 것 같다. 이등병이 병장 계급장을 달고 폼을 잡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군에 가서 보니 이렇게 가짜 계급장을 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전방 철책에서는 이등병이 오면 다 상병 계급장을 달고 근무를 서게 하였다. 북괴군이 이등병이 온 것을 알면 심리전을 편다고 가짜 계급장을 달게 했다. 이렇게 낮은 계급이 높은 계급으로 위장하는 것을 ‘말가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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