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 누나

2012. 3. 25. 16:30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서울에서 재수할 적에 내가 기거한 곳은 양평동이었지만 나는 많은 시간을 용산에서 보냈다. 학원이 끝나면 용산에 가서 저녁을 먹고 거기에 있는 한강독서실에 가서 공부하다가 늦은 시간이 돼서야 양평동으로 갔다. 내가 용산에 가서 공부하고 많은 시간을 용산에서 보낸 것은 거기에 용인이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친한 친구를 하나만 들라면 당연히 용인이다. 우리는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 중학교는 서로 달랐고 학년도 내가 한 해 위였으나 고등학교 1학년 때에 같은 반이 되어 친형제처럼 지냈다. 자주 뵙지는 않았지만 용인이네 부모님도 나를 친 아들처럼 대해주시기는 마찬가지였다. 용인이가 워낙 말이 없고 조용하다보니 조금은 나이가 더 먹은 나를 용인이 형처럼 생각해 주셨다.

 

용인이는 재수시절에 서부이촌동에서 누나와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인 용재와 셋이 자취를 했다. 용인이하고야 고등학교 3년을 그림자처럼 붙어서 지냈지만 누나와 용재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는데도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가깝게 대해주었다.

 

누나는 학교를 졸업한 뒤에 해태유업에 근무를 하고 있었고 용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울로 전학을 와서 누나와 함께 있었다. 용재를 좋은 학교로 진학시키기 위해 누나가 서울에 데리고 있으면서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누나의 이름은 경희였다.

 

당시 우리는 대학에 시험을 치기 위해서는 서울에 와서 며칠씩 묵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누나와 용재가 있던 집에 드나들었다. 서부이촌동은 골목과 집들이 다 비슷비슷해서 용재네가 자취하는 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었다.

 

골목을 찾을 때는 입구에 무엇이 있는지를 기억했다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집은 아주 비슷해서 다 그 집이 그 집 같았다. 이럴 때 내가 써 먹은 방법이 큰 목소리이름을 부르며 골목을 왔다, 갔다하는 거였다. 용인이를 부르며 몇 번을 돌다보면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용인이가 집에서 나오곤 했었다.

 

우리가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를 시작한 뒤에 용인이네는 거기서 방이 둘 있는 곳을 찾아 더 높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둘이서 지낼 수 있던 방이지만 용인이가 올라와서 셋이서 지내야 했으니 방 하나가 더 필요했던 거다. 지금이야 남의 집에서 자취를 한다는 것이 무척 낯선 얘기지만 그때는 서울 도심의 대부분의 집에서 집의 일부나 방 한두 개를 전세나 사글세로 놓아 살림에 보태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금 큰 집은 한 집에 세 가족이나 네 가족이 사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용인이야 원래 말이 별로 없는 친구지만 용재나 누나는 무척 살가웠다. 재수시절에는 누나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고 늘 용재가 라면을 끓였다. 학원에서 수업이 끝나면 서부이촌동 용인이네 자취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거기다가 밥을 말아먹고서 용인이와 독서실로 갔다. 공부하다가 시간이 늦어지면 나는 거기서 버스를 타고 양평동에 가서 잠을 자고 다시 아침에 서울역 앞 학원으로 가는 생활이 이어졌다.

 

경희 누나는 나보다 두 살이 더 위였다. 요즘으로 본다면 두 살 정도 연상이야 정말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그게 작은 차이가 아니었다. 나는 누나가 넷이나 되고, 양평동에도 고종사촌 누나가 둘이나 되어 누나가 없는 애들처럼 아무에게나 누나, 누나하고 따르는 성격은 아니어서 경희 누나를 대할 때는 조금 어려웠다.

 

나는 그때 남녀사이의 도덕적 관념에 대해 아주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서 여자 앞에서 허튼 소리를 하거나 농담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는, 조금 개방된 사고를 가진 사람이 보면 이해하기 힘든 아이였다.

 

그런 나에게도 누나는 무척 신선한 느낌이었다. 나이가 두 살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감히 결혼을 생각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끌리는 느낌이 있었다. 그때는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결혼을 전제한 것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을 때였다. 그리고 친구 누나면 내게도 누나인데 누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내 도덕적 잣대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어색한 감정을 누나는 물론 용인이나 용재도 알 리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나 혼자 속으로만 좋아하는 감정이었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면 그 감정이 겉으로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지만 누나에 대한 마음은 겉으로 드러날까 봐 늘 조심스러웠다.

 

여름 어느 날에 재수하던 친구들 몇이 용인이네 자취방에 모여서 수박을 사다가 화채를 해 먹은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자취를 하는 사람들은 냉장고가 드물었기 때문에 동네 가게에서 파는 얼음을 사다가 그것을 깨서 화채를 해먹는 게 일반적이었다.

 

수박과 얼음을 사다가 화채를 한답시고 얼음을 깨는데 그게 잘 깨지지를 않아 쌀을 씻는 양재기에 얼음을 넣고 식칼로 위에서 내리찍다가 그만 양재기 여러 곳에 구멍을 내고 말았다. 용인이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중에 누나가 오면 용인이가 꾸중을 다 들어야할 것 같아서 나도 같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친구들이 가고 저녁때 누나가 집에 와 그 이야기를 했더니 누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음을 깰 때는 바늘이나 못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웃으면서 알려주었다. 누나의 그런 마음이 얼마나 고마웠던지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

 

나는 어딜 가도 비위가 좋아 밥을 굶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를 듣지만 의외로 소심할 때가 많다. 특히 여자들 앞에서는 잘 그런 편인데 누나 앞에서도 그럴 때가 많아 무척 조심스러웠었다.

 

누나는 이소룡·성룡의 영화에 나왔던 묘가수(苗可秀)를 많이 닮았다. 묘가수는 이지적이면서 차가운 얼굴이라고 할 수 있지만 누나는 겉보기와는 달리 결코 차갑지 않았다. 나는 차가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묘가수가 나온 영화를 볼 때면 늘 누나 얼굴이 겹쳐서 떠올랐다. 내가 재수하던 시절에는 이소룡의 영화가 아니라 성룡의 영화에서 묘가수를 보았고, 묘가수를 볼 때마다 나는 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비고사 성적이 발표되고 대학입학원서를 쓸 무렵에 나는 아예 용인이네 자취집으로 옮겨서 한 보름을 용인이, 누나와 같이 지냈다.

 

그 무렵에 누나를 좋아하는 남자가 집으로 찾아 온 적이 있었다. 누나와 잘 아는 사이는 아니고 누나를 좋아해서 찾아왔다는 거였다. 그때 누나는 없었고 용인이와 나만 있었다. 그 남자는 어디 산에서 내려온 것 같은 세련되지 못한 용모에 허름한 옷을 입고 구멍이 뚫린 양말을 신고 있었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듯한 세련되지 못한 모습이 싫었다. 적어도 누나에게 어울릴 남자라면 그래도 멋진 신사였으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건방지게도 싫은 소리를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우습고 미안한 일이다.

 

그 일 때문인지 시골에서 용인이 어머님께서 올라오셨다. 어머님도 아마 그 남자 얘기를 들으셨던 것 같다. 저녁에 어머니께서는 누나와 용인이와 내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남자를 고르려면 영주 같은 사람을 고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누나 앞에서 얼마나 무안하고 흐뭇했는지 모른다. 누나를 속으로 좋아하고 있어서 무안했고, 어머님께서 인정해 줄 만한 사윗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흐뭇했었다.

 

내가 누나하고 한 살 정도만 차이가 났더라면 나는 누나에게 청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살이나 위라는 것은 내가 넘지 못할 벽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두 살 정도 연상이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 큰 차이로 느껴졌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래서 더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두 살이나 어린 동생의 친구가 누나에게 사랑 어쩌구 했으면 얼마나 우스웠을지 모를 일이다. 하여튼 그렇게 누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겉으로 한 번도 표현하지 않은 채 내 가슴 속에 소복하게 쌓여갔다.

 

내가 누나에게 편지를 했던 것은 군에 가서이다. 내가 누나 편지에 사랑한다는 말을 썼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여러 번 했었다. 서울에서 얼굴을 맞대고 지낼 때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최전방 철책선 앞에서는 나도 간덩이가 부었었는지 모른다. 그때 내가 누나에게 보낸 편지는 여나믄 통 정도이고 받은 것은 단 하나 뿐이다.

 

 

영주야 읽어주렴

 

잔뜩 찌푸린 날씨, 마음까지 우울해지는 아주 지루한 하루란다.

그동안도 몸 건강히 군복무에 열중이라니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답장이 늦어진 점 이해할 수 있겠니?

할 수 없다고 해도 억지루라도 이해하여 주렴.

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군인생활이 아주 재밌는 모양이지? 예전엔 나도 한 번쯤 입대해보고 싶은 곳이라 생각도 했었는데…… (하지만 이젠 늙었는걸)

이제 영주도 가을이 오니까 무엇인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나 보지? 아무튼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니까…… 마음껏 좋아해라.

그리고 영주 있는 곳이 그렇게도 아름답다고 하니 가보고 싶어지는데 한 번 구경시켜 줄 수 있겠어?

이곳의 가을은 그렇게 절실히 느낄 수가 없어 항상 안타까운 마음뿐이야. 시원한 바람과 높푸른 하늘이 보이니까 가을이 왔나 보다 그 정도야.

너무나 자연과 거리가 멀지 않겠어? 영주도 잘 알면서……

언제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교외선을 타고 길가에 줄지어 늘어선 코스모스를 보며 시골길을 달릴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보낸단다.

친구들은 이제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고 무슨 재미가 있겠니?

영주가 군 생활 동안에 재미있었던 일 자세히 적어 보내 좀 즐겁게 해줘라. .

내 편지가 그렇게 받아보고 싶었다는데 이제야 쓴다는 게 꼭 죄지은 것만 같구나. 받아본들 실망은 더 크겠지만 말이야.

학교 다닐 때부터 문장실력도 없고 글씨 못쓰기로 소문났었으니까 뭐!

영주도 편지는 좀 가끔 하고 귀뚜라미 울음소리 벗 삼아 책 좀 많이 읽어. 모두 마음의 양식이 되니까.

난 학창시절 때 책 많이 보지 못했던 것이 가장 후회스러워.

지금에 와서 책을 보려고 하니까 머리 속에 복잡한 잡념만 떠오르고 책에만 집중할 수가 없게 돼요. 읽어도 무엇을 읽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나쁜 것만 빼고 무엇이든 열심히 해봐.

후회는 가장 못난 사람이 한다고 하잖아?

우리 재미있는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그럼 오늘은 이만.

몸 건강히 군복무에 열중하길 빌어줄게.

안녕………

79. 9

누나

 

 

'시우 수필집 > 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곧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면  (0) 2012.03.25
행운유수  (0) 2012.03.25
경희대에 합격하다  (0) 2012.03.25
입영 전후  (0) 2012.03.23
훈련소에 가다  (0) 2012.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