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5. 16:34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신촌으로 버스를 타고 지날 때마다 관심을 가지고 보던 ‘이을행외과’가 보이지 않아 많이 궁금하다. 나는 그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는 ‘이을행’이라는 이름이 ‘사람이름’인지 확인해 본 적도 없고 내가 아는 사람인지도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이름이라고 추측하면서 그 이름이 내가 아는 친구 ‘운행’이의 형 이름이 아닐까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운행이는 대학 재수 시절에 종로 ‘경일학원’에서 만난 친구이다.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때는 재수 학원도 시험을 쳐서 갔다. ‘종로학원’이 가장 어려웠고, 그 다음은 ‘대성학원’이었다고 들었다. 그 다음 학원들은 거의 엇비슷했다.
나는 2월부터 학원을 다닌 것이 아니고 4월 초에 서울에 와서 학원에 가느라 그때 재수생을 추가모집을 하던 경일학원으로 갔다. 경일학원에는 3월부터 용인이, 정재, 순흥이 등 우리 홍주고등학교 친구들이 여럿 다니고 있어 서울에 있는 학원이라고 해도 그리 낯설게 생각되지 않았다.
나도 시험을 쳐서 소위, 연고대반에 들어갔다. 거기는 친구가 없고 나 혼자였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입시학원이 종로에 밀집되어 있었고, 한반에 100명 내외가 들어가는 콩나물 시루였다. 조금 늦게 가면 맨 뒷자리에 앉게 돼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늘 중간에 앉았다. 앞에 앉으면 질문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종합반은 그래도 대개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다시피 해서 자기가 앉던 곳으로 가면 거기가 비어 있을 때가 많다.
5월 어느 날, 내 옆자리에 처음 보는 아이가 와서 앉았다. 그 아이는 전라도 사투리로 이것저것 학원에 대해서 묻더니 자기는 오늘 처음 학원에 몰래 들어온 사람이라고 밝히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 아이가 운행이다. 우리 학원에 자기 친구가 다니고 있어서 와 봤다고 하며 자기는 광주에서 왔다고 했다.
처음에 만나서 그렇게 물을 정도면 붙임성이 좋다고 얘기해도 괜찮을 거였다. 그렇게 만났는데 다음 날도 오고 며칠을 몰래 다니다가 학원에 등록을 해서 정식으로 다니며 가깝게 되었다. 그때 같이 어울린 친구들이 광주에서 올라온 운행이 친구인 용무, 포항에서 온 광우, 대전에서 온 희엽이 등이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서울 친구도 하나 있었다.
우리 여섯은 점심시간이면 늘 밥을 같이 먹었고, 학원이 끝나고 나갈 일이 있으면 같이 돌아다녔다. 나야 고등학교 친구가 여럿 같은 학원에 있으니까 그들과도 잘 어울렸지만 운행이도 고향에서 온 친구가 여럿 있었다. 운행이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 친구도 몰래 데리고 들어와서 같이 수업을 받기도 하고 같이 놀러 나가기도 했다. 붙임성이 좋다고 해야 할지 오지랖이 넓다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변죽이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가깝게 지내면서 얘기하다보니 형제자매가 11남매나 되고 아버지는 광주에서 교감 선생님으로 재직 중이시라고 했다.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 있고, 바로 위로 누나가 있었는데 남매들 중에서 그 누나만 대학에 안 갔고 형, 누나 여덟이 대학을 졸업했거나 다니고 있었다. 아버님이 조선대학교 병설 고등학교에 계셔서인지 여덟 중에 여섯이 조선대를 다녔다고 한다.
운행이는 조선대에 들어갔다. 같이 재수했던 친구들이 다 대학에 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바로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제대로 소식을 알지 못하고 끊어졌다. 요즘 TV를 보다보면 사진기자로 ‘이희엽’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혹 우리와 재수를 같이 했던 그 희엽이가 아닐까 궁금할 때가 있다.
운행이가 광주로 내려가서 대학에 다닐 때 나는 입영통지서를 받고 휴학을 했다. 1979년 4월 3일에 입대를 하게 되어, 대학에 입학하고 학교에 나간 지 1주일 만에 그만 두고 군대 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내가 휴학을 하고는 여기저기 친인척 집에 인사를 다니다가 광주로 놀러 오라는 운행이의 편지를 받고 경후와 둘이서 광주로 운행이를 찾아갔다.
광주에 갈 때 주소만 가지고 찾아갔으니 전화로 상세하게 물었으면 좋을 것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쉽게 생각했다가 한 시간은 넘게 헤맸다. 우리는 집을 찾지 못해 조바심이 났지만 결국은 전화를 하지 않고 간신히 집을 찾아 들어갔다.
운행이와 그 친구들이 아주 환대를 해서 즐겁게 놀다가 왔다. 광주는 그때 처음 가봤다. 무등산에도 올랐고 운행이 여동생 얼굴도 보고 왔다. 같이 재수하던 용무는 운행이하고 어려서부터 친구이고 양쪽 집안이 잘 아는 사이였다.
내가 운행이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얼굴도 보지 못했던 운행이 동생을 늘 농담 삼아, ‘네 동생은 내가 찜했다’고 하면 용무가 없을 적에 나더러 ‘그 애는 용무가 좋아하니 네가 이해해라’라고 했었다. 물론 나도 농담이었고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뒤에 운행이 여동생과 잘 되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군에서는 편지를 많이 보내도 답장이 그만큼 오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는 얘기다. 운행이는 내가 보낸 편지에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준 몇 사람 중의 하나이다. 다들 대학생이 되어 자기 생활에 바쁘다보니 군에 간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건만 재수 시절에 몇 달 만난 사람이 그렇게 해주기는 지금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운행이는 ROTC에 지원하여 학교를 휴학하지 않고 계속 다녔다.
1981년 여름에 말년 휴가를 나와서 부산, 마산, 진도로 한 바퀴 돌았다. 부산에 가서는 후성이를 만났고, 마산에 가서는 전투경찰로 훈련 중이던 용인이를 잠깐 보고, 진도에 가서 역시 전투경찰인 정재를 면회하고 올라왔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천범이가 같이 갔지만 진도로 갈 때부터는 나 혼자였다. 진도에서 정재를 만나 하루 자고는 광주로 올라갔다. 광주항쟁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어 군복을 입고 광주에 가는 것이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운행이를 만나고 싶어 그리로 갔다.
군에 있었어도 운행이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었다. 우리야 전방에 있으니 제대로 알 수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하고, 군이 투입되어 사태가 진정이 되었다고 알고 있으니 광주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다 불안하고 걱정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도 편지가 끊이지 않아서 운행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번엔 그리 헤매지 않고 집을 찾았다. 바로 위의 누나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운행이는 학군단 일로 바쁘다고 늦게 들어와서 나는 혼자 저녁을 먹으며 기다렸다. 운행이가 밤늦게야 들어와서 둘이 술을 조금 많이 마셨다.
다음 날 운행이가 자기 여자 친구를 불러내어 셋이서 무슨 계곡에 있는 유원지에 갔다. 백숙을 시켜서 아주 맛있게 먹었는데 거기서는 닭발을 칼로 저며서 소금을 찍어 먹도록 내놔서 놀랐다. 그 뒤로 이것을 먹고 싶어 했지만 서울에서는 제대로 하는 곳이 없어 아직 못 먹고 있다.
운행이가 보령 화력발전소에 근무할 적에 대천으로 찾아가서 만난 적이 있다. 운행이 결혼식이 광주에서 있었을 때에 가지 못해 미안했다. 운행이는 내 결혼식에 왔었다고 하는데 나는 운행이를 보지 못했다. 분명 축의금 봉투는 있었으나 운행이 얼굴은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이 녀석이 혹 자기 누님이나 형에게 대신 봉투를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운행이 형 중에 한 분이 전남대학교 의대를 나왔다고 들었다. 형제들의 항렬이 ‘행’이어서 뒤의 자가 ‘행’으로 되어 있으면 운행이네 형제가 아닌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이을행외과’를 보면 운행이 형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내 수첩에는 늘 운행이 이름이 빠지지 않고 남아 있다.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좋은 추억을 함께 하고 있는 좋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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