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에 합격하다

2012. 3. 25. 16:27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나는 홍주고등학교 2회 졸업생 중에서 유일한 성적 우수 장학생이다. 그때 우리 학교에서는 전 과목 평균 80점이 넘으면 등록금 면제의 장학생이 될 수 있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성적 우수 장학생은 나밖에 없었다. 그때는 고등학교 성적이 대학진학 점수에 반영이 되지 않을 때라 학교에서 장학금을 준다고 해도 열심히 하는 학생이 없기도 했지만 나는 시험공부를 꽤 열심히 했다.

 

예비고사 성적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내가 영어 수학에 결정적으로 약점이 있다는 거였다. 이미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하질 않아서 그 두 과목은 두고두고 내 발목을 잡았다.

 

졸업하던 해에 서울과 충남지역 예비고사에 합격을 했지만 대전으로 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서울로 가면서 수학 본고사를 보지 않던 경희대학교 법대에 응시했다가 떨어졌고, 후기는 역시 수학을 보지 않는 국민대학교 법대를 봤다가 떨어졌다.

 

재수에 들어가서도 솔직히 기초가 없는 영어와 수학이 갑자기 늘 수가 없었다. 다른 과목들은 학원에 다니면서 그런대로 조금씩 늘어가도 영어와 수학은 전혀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대학마다 시험과목과 시험내용이 달랐지만 우선은 예비고사에 합격을 해야만 가고자하는 대학에 응시를 할 수가 있었다.

 

원래 예비고사는 말 그대로 예비고사여서 거기에 합격을 해야 대학 진학을 위한 자격이 주어졌다. 시도(市道)별로 대학 입학정원의 200%를 합격시켰고 응시자는 1지망과 2지망을 지원하여 두 지역에 있는 학교만 응시할 수 있었다. 나는 당연히 서울을 1지망으로 하고 갈 생각은 없어도 충남을 2지망으로 했다.

 

처음엔 대학지원 자격만 주던 예비고사를 대학마다 입학 성적에 조금씩 반영하더니 1978학년도 입시엔 대부분 대학들이 그 반영률을 50%까지 상향 조절했다. 예비고사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학교에 진학해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긴 그 시절엔 고등학교 성적에 신경을 쓰는 학생은 별로 없었고 도시 아이들은 예비고사도 신경 안 쓰고 오로지 본고사를 준비했다고 들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나 재수시절에 담배는 전혀 피우지 않았다. 선생님들의 영향도 있었고 담배 맛이 쓰다고 알고 있어서 별로 피우고 싶지 않았다. 재수시절에 당구장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당구는 싸가지 없는 애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절대 여자를 사귀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여자 때문에 중도에 망한 친구를 봤기 때문에 공부할 때 여자를 사귀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만 술은 고등학교 때도 많이 마셨고 재수 시절에도 많이 마셨다.

 

학원이 종로 2YMCA 빌딩 뒤에 있다가 서울역 앞으로 옮겨졌다. 1978년 여름에 종로와 광화문에 밀집해 있던 학원 전부를 사대문 밖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경일학원은 수도공고가 있던 자리로 갔다. 학원은 낮은 언덕 위에 있었고 언덕을 내려오면 다 술집으로, 똑같은 크기의 술집 수십 개가 큰 도로를 끼고 연이어 있었다.

 

나는 그중에 나그네라는 간판이 붙은 술집을 자주 다녔다. 학원이 끝나고 내려오다가 주머니에 돈이 있는 날은 나그네에 들어가서 돼지갈비 한 대와 소주 두 병을 시켜서 친구들과 마셨다. 그때 돈으로 1,000원이면 해결할 수 있었으나 그게 재수생에게는 흔한 돈이 아니었다. 대부분 까치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다.

 

내가 하도 자주 다니니까 나그네에서는 외상을 주기도 했다. 아마 재수생에게 외상을 준 집은 서울역 앞 나그네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군대에서 휴가 나와 찾아갔더니 내가 너무 변해서인지 아주머니가 알아보지 못해 서운했었다.

 

이렇게 술을 마시면서 공부를 했지만 고등학교 때보다 실력이 어느 정도 향상이 되었다. 술을 마셔도 취한 날은 극히 드물었고 바로 용산 독서실로 가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11월에 출신 지역인 충남 대전에 가서 예비고사를 봤다. 예비고사를 본 뒤에는 홍성에 내려가서 누나 회사의 야간 경비로 한 달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국어, 영어, 사회만 공부했다.

 

예비고사 점수가 발표될 때는 홍성에 있었다. 물론 서울과 충남에 다 합격을 하였고 점수가 아주 좋지는 않았어도 생각한 만큼은 나왔다. 대학입학을 위한 체력장에서도 20점 만점을 받았으니 수학을 안 보는 대학을 선택한다면 이번에는 충분히 합격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비고사 성적표를 받은 뒤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제 대학을 선택해서 응시원서를 내고 시험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보름 정도 되었는데 그때는 아예 용인이네 자취집으로 들어가서 입시에 관한 모든 것은 용인이와 둘이서 상의했다.

 

그 시절에는 대학 진학에 특차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예비고사 성적만 가지고 본고사를 보기 전에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였다. 특차 전형은 예비고사 성적으로 1차 합격자를 판정하고 면접을 통해 최종합격자를 가린다고 했지만 1차에 합격을 하면 대학 진학이 보장되는 아주 솔깃한 제도였다.

 

고대는 재학생만 선발했으나 경희대와 중앙대는 처음 이 제도를 시행하면서 재수생도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경희대학교의 입시요강을 보니까 모범학생 선발도 있었다. 영어 수학을 못해서 본 고사에 약한 나는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특차로 대학에 갈 방법을 찾기로 했다. 아무래도 본고사가 부담이 되어서였다.

 

용인이는 나보다 점수가 더 좋아서 경희대 공대와 중앙대 공대에 특차 원서를 내기로 했고, 나는 경희대 문리과대학에 모범학생 특차를 내기로 결정했다. 점수가 더 높은 법대를 피하고 문리과대학을 선택했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홍성에 가서 용인이와 내 원서를 작성하여 가지고 와 제출했다.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목욕도 안 갔고 술도 한 잔 안 마셨다. 혹 부정 탈까봐 매사에 조심하고 밖에도 안 돌아다녔다. 합격자 발표가 같은 날 있었다. 그날은 둘이 목욕을 갔었다. 아침에 생각해보니 이미 합격자가 정해졌을 것인데 더 이상 조심하는 것은 너무 소심한 짓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나는 내가 원서를 낸 경희대에 발표를 보러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용인이가 경희대로 가고 나는 용인이가 원서를 낸 중앙대로 갔다. 합격자 발표 시간이 오후 두 시였지만 한 시간이 넘게 지연이 돼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한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 발표된 명단에는 용인이가 맨 뒤에 있었다. 그래도 합격을 한 것이 뿌듯하여 마치 내가 합격한 것처럼 좋았다. 용인이와 만나기로한 시간보다 늦었다고 헐레벌떡 용산에 있는 약속한 다방으로 갔더니 용인이가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을 더 기다려도 용인이는 오지 않았다. 내 속은 시커멓게 타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내가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졸이면서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정말 본고사를 다시 봐야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에 다방 문이 열리면서 용인이 웃는 얼굴이 들어왔다. 특유의 백제의 미소를 띠우며 우리 합격 했어하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왜 이렇게 늦었어?”, “합격자 발표 시간이 늦어져서 그랬어.” “나는 내가 떨어져서 못 오는 줄 알았다!” “떨어지긴 왜 떨어져? 자 여기 합격증서야.” “그래 하여튼 다행이다. 여기 중앙대 합격증서 가져왔어. 나가서 저녁 먹자떨리는 가슴이 진정이 안 되었지만 아까와는 다른 거였다.

 

바로 나와서 순대국에 소주를 걸치며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기 전에 홍성 누나에게 전화를 해서 합격소식을 알렸고, 바로 홍주고등학교로 전화해서 우리 둘이 특차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용인이도 누나에게, 집으로 전화해서 합격 소식을 전했다. 무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떨렸다.

 

밥을 먹고 나서 궁금해 할 여러 사람들에게 다 전화를 했다. 용인이더러 중앙대는 그만두고 이왕이면 같이 경희대로 가자고 했더니 그러자고 해서 우리는 경희대에 가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더 시험을 볼 필요도 없고 다만 면접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다른 학생들이 본고사를 보기 위해 책을 접지 못할 때에 우리는 실컷 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용돈을 얻어냈다. 재수해서 대학에 합격을 한 거지만 재수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닌 시절이어서 어디 가도 좋은 얘기만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대학에 원서를 넣기 전에 이미 입대영장을 받았다. 확정 영장이 아니라 영장 나갈 날짜를 미리 전해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임시영장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43일에 입대해야 한다고 해서 어떻게 연기할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대학에 합격을 하고 군에 가는 것과 그냥 떨어지고 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합격을 했으니 어디로 간다고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면접을 보고 신체검사를 한 뒤에 정식으로 합격증이 나왔다. 합격증을 받고 등록을 한 뒤에야 비로소 대학생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때 등록금이 교복 값을 포함해서 32만원인가 했다.

 

32일에 입학하고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직후에 휴학을 했다. 어차피 복학을 할 때도 1학년 1학기로 시작해야 할 것이니 굳이 더 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군에 가서는 대학생으로 통할 수 있었다. 내가 함께 입대한 병력이 충청도 홍성, 청양, 예산, 공주 출신이었는데 거기는 대학생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입학만 하고 온 대학생도 대학생으로 대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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