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3. 21:49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군에 갈 때는 내 체중이 꽤 불어 있었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늘 58kg을 넘지 않아서 날씬한 것이 아니라 빼빼한 정도였다가 서울에서 1년 재수를 하면서 체중이 85kg까지 불어났었다.
자취를 했고, 점심은 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으며, 저녁은 대부분 라면으로 때웠는데도 체중은 거침없이 불어났다. 그때만 해도 비만에 대해 지금처럼 신경을 쓰지 않을 때라 몸이 대책 없이 불어도 그저 그런가보다 정도로 생각했었다.
군에 갈 때 춘천 103보충대에서 체중을 재니 정확히 85kg이었다. 그때 내 키가 179cm였으니 통통하게 보일 정도는 아니고 몸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보충대 입대 동기가 606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중에서 내 키가 열대여섯 번째로 컸다. 옷은 그런대로 맞았으나 전투화가 대부분 작은 것이어서 보충대에서 신발을 받을 때 애를 먹었다.
나는 발이 조금 큰 편인데다가 볼이 두꺼워서 신발을 좀 큰 것으로 신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인지 크다고 내어주는 전투화가 대부분 발에 작았다. 내가 보통 신는 등산화가 285mm이니 전투화도 이 정도는 되어야할 것인데 280mm보다 큰 것이 없었다. 내가 신발이 작아서 맞지 않는다고 하니까 거기 보급병이 화를 내면서 발에다 신발을 맞추지 말고 신발에 발을 맞추라고 말하다가 보충대 연대장에게 걸려서 되게 혼나는 것을 구경했다.
순시를 나왔던 연대장이 보고 있다가 지금 시대가 어느 군대인데 그런 몰상식한 소리를 하느냐고 보급병을 크게 꾸짖는 거였다. 결국은 신발을 그날 받지 못하고 다음 날인가 다른 곳에서 가져다주어 간신히 신을 수 있었다. 보충대에서 별로 하는 일도 없이 4박 5일을 머물면서 신체검사를 다시 받고 소양교육인가를 받았다.
처음 가던 날은 점심과 저녁을 건빵으로 주더니 다음 날 아침부터는 소위 군대 짬밥이 나왔다. 나는 역겨운 냄새가 나는 밥이라 아예 처음부터 조금씩 담아서 별 문제가 없었지만 배가 고프다고 생각 없이 많이 퍼 담은 장정들은 그 처리 문제로 아주 애를 먹었다. 절대 밥을 버리지 못하게 하여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보충대에 입소한지 사흘이 지난 저녁에 입영장정들이 갈 부대가 발표되었다. 풍문으로 듣기는 동해경비사령부가 제일 좋고, 그 다음이 화천 7사단이라고 했으나 보충대 안에서는 누구에게 물을 사람도 없고 그저 가라는 대로 갈 뿐 아닌가? 그날 밤에 자신들이 입고 왔던 옷과 신고 왔던 신발을 포장해서 고향으로 보낸다고 포장할 수 있는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군에 오기 직전에 좋은 곳으로 빼주겠다고 내가 어느 부대에 배치되어 있는지만 꼭 알려달라고 말씀한 분이 있어서 내가 입고 있던 상의 안쪽에 화천 7사단으로 간다고 큰 글씨로 써서 보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알고 읽었겠는가?
다음 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여기저기 부대에서 입영 장정들을 싣고 갈 군용트럭이 속속 도착했다. 아침밥을 먹자마자 방송으로 이름을 부르고 서로 인사도 못 나눈 채 트럭에 실려 다들 떠나갔다. 그래도 우리 7사단과 동해경비사령부는 점심까지 먹이고는 군용 트럭이 아니라 버스가 와서 태우고 갔다.
7사단이 화천에 있다는 것은 보충대에서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지만 화천이 어느 곳에 박혀 있는지는 전혀 몰랐고, 다만 38선으로 나뉘었을 때는 화천이 북한에 속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었다. 화천에 그 유명한 화천발전소가 있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으니 그 언저리 어디에 있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비포장도로로 북한강을 끼고 두어 시간 가까이 간 것 같다. 그때까지는 시계를 차고 있었으니까 초조한 마음에 자주 들여다보았다. 버스가 화천읍내로 들어서 길래 이젠 다 왔나보다 했더니 다시 거기서 강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는 거였다. 밖에 부슬비는 내리고 날은 이미 어두워져 가는데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계속 올라가 민통선 통제간판이 붙은 지역 속으로 들어갔다.
버스에서 불안과 초조한 마음으로 떠들던 입영장정들은 차가 계속 산 속으로만 들어가자 더욱 불안해했지만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호송병이 하나 있을 뿐이고 운전기사가 전부인 버스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묻는다는 말인가…….
누가 다 왔다고 해서 앞을 보니 “환영 입영장정”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부대 정문이 보였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우리는 벌써 하얗게 얼어 있었다. 내리자마자 선착순 돌리기가 시작되었고 반쯤 얼이 빠져서 우리가 사용할 중대막사로 갔다. 거기서 101명의 훈련병이 다시 4개 소대로 나뉘었는데 나는 4소대격인 화기소대 1분대에 소속되었고 키가 크다는 이유로 향도가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 바로 앞의 입영장정들은 논산이나 지방 예비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전방으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훈련병들이 자기가 근무할 부대에 가서 처음부터 훈련을 받아 그 부대에 맞는 훈련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 우리 군에서도 검토를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그 방법을 도입하기로 해 우리부터 전방부대로 바로 들어갔고, 우리 7사단 훈련소는 민간인 통제선 안에 위치해 있어 그리로 간 거였다. 부대편제도 훈련소 형식이 아니라 유사시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일반 전투부대와 똑같이 되어 있었다.
훈련소는 4개 중대로 편성되어 일반 대대와 같았다. 각 중대는 다시 일반 전투중대와 마찬가지로 편성이 되어 있어 거기에 있는 분대장들이 조교 임무를 맡고 있었다. 다만 분대장들이 다 하사가 아니라 병장과 상병도 꽤 있었다. 이들은 각 부대에서 선발된 정예 요원이라고 들었다.
소속이 정해지자 자기 짐을 순서에 따라 내려놓고 바로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그래도 보충대에서는 자유롭게 먹었지만 여기서는 자기 번호 순서대로 줄을 서야했고 식사 시간 3분을 준수해야했다. 조금만 어긋나면 바로 주먹이 날아오고 여기저기서 “시정하겠습니다.”가 반복되고 식당이 아니라 연병장 같았다.
군대에서 손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작부터 실감했다. 군에서 지급 받은 모든 물품을 관물(官物)이라 하는데 이것을 관물대에 일정한 규격에 맞춰서 정비해 놓아야했다. 나는 원래가 둔했지만 여기서는 더 안 되어 밤이 늦도록 해도 안 되니까 할 수 없이 우리 분대장님이 정리를 해주셨다. 그분이 엄봉근 하사이다. 나중에 보니까 훈련병들이 자기 분대장을 챙겨야 했지만 우리 분대는 분대장이 훈련병을 챙긴 셈이 되었다.
나는 동작이 굼뜨고 느려서 어디 가도 환영을 받지 못할 훈련병이라 여겨 그 대신 남들보다 더 많이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남이 한 번에 할 일이라도 나는 두 번에 하면 되니까 눈치 보지 말고 더 열심히 움직이는 것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생각만큼 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이 통했는지 육체적으로 많이 힘이 들었어도 다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에 다니다 온 훈련병이 별로 없던 때라 입학만 하고 간 엉터리 대학생인데도 웬만큼 사정을 봐주었다. 그것은 훈련병 동기들도 그랬고, 우리 교육을 맡고 있는 분대장들도 그랬다. 나는 그 덕에 그래도 낙오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고마워하고 있다.
처음엔 도저히 못 견딜 것 같던 훈련도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이 되어 갔다. 정말 각개전투 훈련을 받을 때는 너무 힘이 들어서 쓰러질 번하기도 했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니 다른 것들은 그래도 나았다. 내가 훈련을 받으며 흘린 땀을 그릇에 담았다면 드럼통으로 몇 통은 되고도 남을 것 같다. 그만큼 많은 땀을 흘리며 군인으로 변모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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