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책선에 서 보다

2012. 3. 23. 21:43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8주간의 훈련이 사람을 아주 바꿔 놓았다고 하면 조금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훈련소의 훈련이 몸과 마음을 많이 단련시켜 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나는 완전히 변해서 훈련소를 나섰다. 훈련을 마치고 바로 8연대에 배속을 받아 군용트럭에 실려 연대 본부로 갔다.

 

연대 본부에서 이틀 자고는 다시 트럭을 타고 주파리에 있는 대대본부로 갔다. 부대가 하급 부대로 나누어질 때마다 우리 동기는 따로 떨어져서 같이 가는 숫자가 점점 작아졌다. 많은 수가 움직일 때는 서로 격려도 해주고 의지가 되었건만 뿔뿔이 헤어져서 불과 몇 명씩 이동하게 되니 불안과 초조감이 갈수록 더해갔다.

 

이미 연대본부 자체가 민통선 안에 들어있어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는데다가 우리가 가는 곳은 민통선 안에서도 아주 깊이 들어가 철책선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47일에 입대해서 8주간의 훈련을 받고 이동을 하였으니 6월 초라 후방 같으면 초여름에 가까운 계절일 텐데 거기는 이제 한창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길가에 지천으로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갔고 한국전쟁 이전에 사람이 살았을 빈터에는 뽕나무가 무성했다. 뽕나무에는 까맣게 익은 오디가 탐스럽게 달려 있어 길 가는 사람들을 유혹했지만 어디 눈길이나 줄 수 있으랴? 사람이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는 도로 외에는 전부 지뢰지대 표지가 붙어 있어 누구도 감히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여섯 명이 같은 중대로 배치가 되었고 그 중의 한 명과 같은 소대가 되었다. 나와 같은 소대로 간 박삼흥 이병은 홍성 출신이었고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하다가 온 친구로 훈련소에서도 같은 소대에 있었다. 삼흥이는 외우는 것 빼고는 무슨 일이든지 다 잘 했는데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자대에 배치된 것도 같은 중대 같은 소대였다.

 

부대에 신병이 들어오면 마치 친 동생이 찾아 온 것처럼 모든 친절을 다 베푼다. 우선 처음에는 간단한 작업이나 심부름만 시키고 어려운 일에는 부르지도 않는다. 전방에는 보급품이 풍부해서 그런지 무슨 일을 시킬 때면 늘 건빵을 내어줬다.

 

그때까지는 다른 곳의 군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어디나 다 그런 줄 알았고 전방에서 건빵은 어디서나 흔했다. 무슨 일만 시키면 건빵을 주고 먹고 싶으면 달라고 하라고 얘기해서 군대가 이렇게 좋은 곳인가 하고 착각까지 할 정도였다.

 

살이 빠져서인지 부대에 간 뒤부터는 밥도 잘 먹었다. 증기로 찌는 밥이 아니고 나무로 불을 때서 하는 밥이라 그런지 냄새도 덜 났고 먹을 만 했다. 그제 서야 나는 정상적인 육군 이등병이 된 거였다.

 

처음엔 단순한 작업만 시키더니 하루 이틀 지나니까 조금 먼 곳으로 가는 일에도 동참시켰다. 거기는 전부 단검을 차고 실탄이 장착된 탄창과 소총을 가지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 간첩이나 공비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방어용으로 무기를 휴대시켰다. 부대에서 하는 작업에만 동원되다가 하루는 철책선에 가야한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우리 중대에서 6km쯤 걸어서 도착한 철책선 부근에 가서 돌 나르는 작업을 하고 왔다.

 

그날 처음으로 철책선을 구경했다. 610일쯤으로 기억한다. 다 산악지대지만 우리가 당도한 곳은 높은 산꼭대기에 위치한 곳이었다. 거기서는 북한 쪽 땅이 멀리까지 보였고 우리 산하도 아름답고 선명하게 보였다. 산 아래로 군데군데 넓은 들도 보였고 그 들판 사이로 흐르는 큰 내도 보였다.

 

아직 봄이라 초목이 크게 자라지 않아 먼 곳까지 내려다보이는데 뭐라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치밀어 올라왔다. ‘여기가 휴전선이라니……. 비록 이등병, 가장 졸병으로 서 있는 것이지만 내가 이 나라 우리 국민을 위해 여기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우리 대대는 그 해 상반기에 철책선을 지키고 교체를 해 나와 우리 중대가 다시 철책에 설 일은 없다고 했다. 2개 대대가 6개월씩 교대로 철책을 서고 철책에 서지 않는 2개 대대는 바로 뒤에서 철책 서는 대대를 받치고 있는 형태였다. 전방에 들어가 있는 연대는 훈련보다는 작업을 많이 했고 철책에 서 있는 부대를 지원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우리 중대가 하는 일 중의 가장 큰 임무는 북괴군이 땅굴로 침투를 해 올 때에 그들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우리 부대가 위치한 곳은 중동부 전선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큰 도로가 있던 곳으로 북괴군이 침투를 해온다면 주 침투로가 될 가장 유력한 곳이라고 했다. 거기서 초반에 잡지 못하면 그대로 뚫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휴전선까지 이어지는 도로에는 유사시에 지뢰를 매설하기 위해 대전차지뢰와 같은 크기의 통나무가 여러 곳에 묻혀 있었다. 그 나무를 빼어내고 거기에 그대로 지뢰를 끼워 넣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거였다.

 

그때는 휴전선 곳곳에서 경쟁적으로 땅굴을 찾으려고 애를 쓰던 시기였다. 우리 부대에서도 어떤 하사관이 밤에 굴착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녹음해서 상부에 보고를 했더니 땅굴이라고 판명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땅굴을 찾기 위해 석유시추를 하는 기계를 가져다가 이를 잡듯이 땅굴 시추를 하고 있었다.

 

그 땅굴이 발견되거나 땅굴을 이용해서 북괴군이 침투를 해온다면 즉시 출동을 해서 진압을 하는 훈련을 자주 했다. 조금 우습지만 작업을 하다가 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훈련시간을 알려주고 비상이 걸리면 즉시 출동을 하는 식이었다.

 

4km 정도 떨어진 곳에 가상 침투 장소가 있었다. 비상이 걸리면 단독무장으로 거기까지 구보로 이동해서 작전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나는 처음에는 뛰는 것이 무척 어려웠지만 부대로 간 지 한 달 정도 지난 뒤에는 그 정도는 자신 있게 뛸 수 있었다.

 

살이 빠진데다가 아침에 하는 구보에 익숙해지니까 웬만한 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렇긴 해도 구보로 4km를 뛰어가서 작전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다들 지쳐서 헉헉거리는데 무슨 수로 북괴군 특수부대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작전이 끝나고 나면 대대본부에서 나와 여러 가지를 점검하고 사병들에게 건의사항을 물을 때가 있었다. 나는 비록 가장 졸병인 이등병이었지만 차량 문제를 건의했다.

 

기동타격대의 생명은 시간 단축인데 어떻게 뛰어가서 적을 진압할 수 있겠는가? 보병부대라 차량이 없고 구보로 이동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임무가 다르면 거기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게 장비가 제공되어야 임무수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딴에는 제법 건설적인 의견이었다고 생각했으나 고참들에게 건방지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누가 몰라서 가만히 있는 줄 아냐면서 군대 생활 편하게 하려면 무조건 입을 다물고 지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나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다녔다.

 

거기서 두어 달이 지난 다음에 우리 소대는 철책 근무를 지원하기 위해 백암산을 넘어 금성천 부근으로 갔다. 복이 많아서인지 내 생애에 철책 근무를 제대로 해보게 된 거다. 그 전에 하루나 이틀씩 지원을 나가기도 했지만 소대 전체가 한 지역을 맡아 근무를 서게 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우리 소대가 거기로 이동을 한 것은 8월 초였다. 거기는 그때도 밤에는 난로를 피우고 있었다.

 

우리 중대에서 우리 소대만 지원을 나갔다. 우리 소대장은 삼사출신으로 거기서는 ROTC출신 장교보다 신임을 받고 있었다. 솔직히 삼사출신 소대장을 누가 알아주랴마는 전방이다 보니 소대장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였다. 거기서 육사출신 소대장이나 중대장은 거의 본 적이 없지만 드물게 우리 6중대 중대장은 육사출신의 김○○ 대위였다.

 

우리 중대장은 우리 연대나 대대에서 인정받는 대위라고 들었다. 서울대에 다니다가 다시 육군사관학교 시험을 봐서 군인이 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시 연대장은 갑종장교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우리 중대장과 소대장을 무척이나 신임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소대가 철책선 지원을 나가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신임을 받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왕 전방에 간다면 철책근무가 더 편하다. 밤 새워 근무를 서고 아침에 철수하여 밥을 먹고 오전에 잔다. 점심 때 일어나서 밥을 먹고는 오후에 조금 작업을 하면 하루가 간다. 비록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이기는 해도 시간은 잘 간다.

 

늘 소총과 실탄을 휴대하기 때문에 고참이라고 해서 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뿐더러 하루 200원인 생명수당도 나온다. 200원 중에서 100원은 부식비로 들어가고 100원만 현금으로 주지만 그것도 적지 않은 돈이었다. 같은 전방에 근무해도 철책선을 맡은 부대가 아니면 생명수당이 없다고 들었다.

 

, 겨울에는 정말 못할 것이 철책근무라고 고참들이 얘기했다. 밤이 길고 춥기 때문에 겨울에 철책을 지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산 아래에서 기나긴 밤을 꼬박 새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가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다행히 나는 초가을 무렵에 가서 초겨울까지만 철책에 섰기에 좋은 구경도 하고 힘들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1979년 가을에 철책선으로 넘어 온 간첩을 잡기 위해 비상이 걸리기 전까지는 군대 생활도 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9105일 추석날에 중동부지역 휴전선에 비상이 걸리면서 그 철없던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북한 간첩 두 명이 철책선을 넘어 오면서 휴전선 부근에 묻은 자루를 군용견이 찾아내어 그날부터 대간첩작전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게 얼마나 사람 잡는 일인지 확실하게 경험했다.

 

우리 소대는 대간첩작전 중에 백암산 아래에서 서쪽으로 상당부분 이동하였다. 우리 소대가 맡은 지역은 ○○사단과의 접경지역으로 우리 좌측은 ○○사단 병력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

 

전방 철책을 지키고 있는 사단은 그 현장에서, 그리고 바로 아래의 교육사단과 전투사단이 총 출동하여 10만 명에 이르는 군인들이 간첩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으나 한 명만 사살하고 하나는 잡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작전이 종료되기 전에 1026이 발발하면서 모든 것이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그 뒤에 우리 소대는 중대로 복귀했다가 연대 전체가 이동할 때에 험악한 고지로 이동을 했다. 우리 중대가 주둔한 곳은 거기서는 보통 칠성장벽이라고 불렀다. 거기는 정말 힘든 곳이었다. 먹을 물을 뜨러 가는 길이 내려가는 길인데도 10분이 넘게 걸렸으니 물을 뜨러 갔다가 오면 30분은 족히 걸렸다.

 

소대에서 날마다 물 당번 두 명을 지명하여 종일 물을 떠다가 막사에 있는 드럼통에 채웠고 물을 떠 나르면서 빨래를 해야 했다.

 

부대는 산 위에 있고 길은 차가 다니지 못하니 정말 부대 밖으로 나다니는 것이 힘든 일이었다. 날마다 부식을 수령하러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비탈길을 오르내리느라 정말 힘이 들었다. 7사단 근무지 중에서 수리봉과 함께 가장 험악한 곳으로 쌍벽을 이룬다고 들었다. 거기는 정말 삼국시대의 국경 주둔지 같았다.

 

난 그 험난한 곳에서 군대 생활을 어렵게 할 줄로 생각했지만 다행히 하사관학교로 차출이 되어 그 곳을 떠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