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지만

2012. 3. 25. 16:39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우리 속담에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이 있다. 쓸 만한 나무는 다 재목이 되어 베어나가거나 팔려나가지만 상품 가치가 없는 굽은 나무는 아무도 베지 않아 거기 그대로 남아 있다는 데서 온 말이다. 이 말은 여러 뜻으로 확장이 되어 쓰이기도 한다.

 

정확한 연원은 알 수가 없지만 내가 알기로는 이 말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 같다. 조선왕조 말기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에 왕명(王命)으로 권문세가들의 선산에 있는 나무를 징발할 때에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다보니 우리나라 곳곳에 쓸 만한 나무가 없다. 재목으로 쓰기엔 소나무가 제일인데 우리나라 소나무들은 굽은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소나무는 원래 굽은 줄로 안다. 그러나 경상북도 봉화, 춘양에서 시작하여 백두대간을 타고 올라가면서 보면 거기 소나무들은 전부 올곧게 자라서 미끈미끈하다. 그런 소나무들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후련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소나무를 금강송이라고 부르고, 북한에서는 금강산의 소나무들을 미인송(美人松)이라고 부르고 있다. 백두대간의 소나무들은 재목으로 아주 훌륭하지만 대원군 시절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여기 나무를 가져갈 수 없었던 거다. 이 나무의 씨앗을 가져다가 전국의 온 산에 심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곧은 나무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자라면 틀림없이 곧은 나무가 된다. 굳이 품종 개량을 할 필요가 없다. 이런 나무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소나무가 원래 굽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무나 풀도 자기 부모를 닮는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 같다. 흔히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들은 어미가 새끼를 낳아 조금 자랄 때까지 보게 되니까 어미를 그대로 닮는다는 것을 알지만 나무나 풀 같은 식물도 유전자에 의해서 그 부모를 닮는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식물도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사진을 찍는다고 여러 곳을 자주 돌아다니게 되면서, 좋은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에는 그 느티나무를 닮은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보은의 유명한 정이품송(正二品松)에서 씨를 받아 키운 소나무들이 모두 그 어미를 그대로 닮은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렇다. 모든 것은 다 부모를 닮는다.

 

형제 중에서 조금 떨어지는 사람이 고향에 남아 부모를 모시는 것은 예로부터 있어왔던 일이다. 그래서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을 곧잘 여기에 빗대어 말하곤 한다. 똑똑하게 잘 가르친 자식들은 다 부모 곁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고 못난 자식만 고향에 남아 부모를 모시고 산다는 말이다.

 

다른 자식들은 다 나가서 있으니까 부모를 봉양하는 것도 못난 자식이 하고 부모가 돌아가실 때 임종을 하는 것도 이 못난 자식이 하기 쉽다. 비록 못났다고 부모로부터 온갖 지청구를 다 들었어도 마지막까지 부모 곁을 지키는 것은 이 못난 자식이다. 그러니 부모에게는 못난 자식이 효도를 더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요즘은 조금 배웠다하면 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기 때문에 농어촌에는 젊은 사람이 드물다. 도시에 나가 막노동판에서 일을 해도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농촌이나 혹은 어촌에 남아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도 위로 차원에서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이 말을 써왔는데 이게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비하하는 말 같기도 하고, 또 굽은 나무는 별 볼일이 없어서 남겨진 것이었는데 오히려 선산을 차지했다는 뜻으로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는 굽은 나무는 굽은 나무 역할밖에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젊은 나이에 큰 꿈을 가지고 도시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 온 사람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요즘 풍습이지만 오죽 했으면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겠냐는 비아냥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별 생각 없이 웃으며 넘겼으나 근래에 와서는 이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느 대학이나 저명한 교수님들이 한 분 한 분 정년을 하시고 물러난 자리를 그 학교 동문 제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 곳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 공부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이 대학에 남아 있다고 한다.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대학시절에 공부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은 다 어디론가 떠나가고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교수라고 명함을 내미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박사가 되느라 피눈물이 나게 공부를 했겠지만 내가 조금 아는 대학의 젊은 교수들 이름을 보면 조금은 갸우뚱한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올챙이가 자라서 개구리가 되고, 이무기가 용이 된다고 하지만 굽은 나무들만 남아 선산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학에 남아서 어떻게든 뭉그적거리다가 늙은 은사 물러나면 그 자리를 물려받는 일이 허다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요즘 지방에 가면 시골사람들이 텃세가 너무 심해서 땅만 사고는 살러가지 못한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작은 동네의 사람들이 너무 폐쇄적이고 이기적이어서 살러 갔다가 다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도 생판 모르는 동네가 아니라 자기 고향에 가서도 그런 꼴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하니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나 혼자서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는 일이다. 굽은 나무가 많은 곳에 다른 나무는 뿌리를 내리기가 힘든 것 같다.

 

나야 아직은 시골에 내려갈 생각을 않고 있지만 만약 내려간대도 고향에 가서 굽은 나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굽은 나무가 돼서 고향을 지키면 다른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야 나는 굽은 나무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때 굽은 나무로 보면 나 역시 굽은 나무가 되고 만다.

 

세상은 쓸모 있는 것만 원하는 것이 아니다. 쓸모가 없는 것도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쓸모가 있어서 쓰이는 것은 괜찮은 일이지만 쓸모가 없던 것이 쓸모가 있게 되면 그것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혜자가 제자와 함께 여행을 할 적에 어느 시골에서 하루를 신세지게 되었다. 별로 넉넉지 못한 집이었는데 저녁 밥상에 당시로는 귀한 닭을 삶아 내왔다. 혜자가 놀라서 웬 닭이냐고 물었더니, 주인이 말하기를 그 닭은 울지 않아서 쓸모가 없는 닭이라 손님을 대접하려고 잡았다고 했다.

 

혜자가 저녁을 먹은 뒤에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무는 쓸모 있는 재목감만 베어내니 굽은 나무는 쓸모가 없다고 오래 남지만, 오늘 저녁 밥상에 오른 닭은 쓸모가 없다고 잡았으니 세상 이치가 다 이런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얘기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쓸모가 없는 것은 없다. 다만 언제 어떤 곳에 필요한 것인가가 다를 뿐이다. 그렇다 해도 나는 굽은 나무는 되고 싶지 않다. 일찍 베어져 재목으로 나간다 해도 굽은 나무로 선산을 지키기 보다는 차라리 재목이 되는 것이 나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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