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 그리고 남진

2012. 3. 25. 16:42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나는 음치다. 우리나라에 선천적인 음치는 없다고 하니까 태어날 때부터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음치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노래 잘 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노래방이 생겨서 훨씬 나아졌지만 예전에 노래방이 없을 때는 어디 가서 노래를 시키면 참으로 난감했다.

 

나는 늘 노래를 많이 부르고 연습을 하는 데도 왜 사람들 앞에 가면 노래가 잘 안 되는지 정말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노래방이 생긴 것이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다.

 

노래는 못했어도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지금 같으면 듣는 것으로 대신하겠지만 그 시절에는 노래를 들을 매체가 없었다. 그래서 서점에 가 노래책을 많이 샀다.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내가 산 월간 포켓가요는 수십 권이 넘는다. 신곡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매월 사야 직성이 풀렸다.

 

그 시절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가수는 남진이다. 나는 지금도 남진을 좋아한다. 나훈아도 좋아하지만 남자가수에서 하나만 꼽으라면 남진이다. 요즘에 와서 조용필, 나훈아지만 70년대 초로 돌아간다면 누구를 남진에게 갖다 댈 수 있겠는가?

 

가끔 인터넷사이트를 이용해서 남진의 옛 노래를 들어보면 그 음색이 정말 다양하게 나와 무척 신기하다. 노래 속에서 다양하게 변하는 음색을 비교한다면 조용필이나 나훈아는 남진에게 한참 못 미친다고 생각한다. 내 얘기에 의문이 가는 사람들은 한번 비교해 보기 바란다.

 

내가 많이 부른 남진의 노래는 님과 함께, 그대여 변치 마오, 서로 좋아해, 무엇 하러 왔니,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빈잔등이다. 그러나 이런 노래들은 남진의 음색이 제대로 살아 있지 않다. 그래서 내가 남진을 좋아하는 것만큼 남진의 노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는 거다.

 

남진과 나훈아가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 우리 가요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 둘이 물러설 때쯤에는 우리에게 생소한 갈래였던 포크송이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통기타 가수들이 몰려 나왔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정호 등의 가수가 등장하여 가요의 판도를 바꿔 놓게 되었는데 어쩌면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때 막 등장한 통기타 가수들보다 트롯가수를 더 좋아했다. 통기타 가수들이 대거 등장은 통기타를 유행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 당시에 웬만한 중고생들은 거의 기타를 치고 다녀 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라고 했다. 내가 그런 간첩 중의 하나이다. 내 나이 또래라면 시골서 자랐다고 해도 팝송을 모르는 사람은 드문데 내가 그 드문 사람 중에 속한다. 나는 대중가요밖에 모른다. 남들이 클래식을 이야기할 때 아는 것이 없어 부끄럽고 팝송을 얘기할 때도 할 말이 없다.

 

오래 전에 누가 비발디의 사계를 얘기할 때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얘기해서 자리를 웃음바다로 만든 적이 있다. 솔직하게 얘기한 것인데 사람들이 웃어서 더 무안했지만 우리가 얘기할 때 흘러나오고 있는 곡이 바로 사계였던 거다.

 

TV에서 팝송을 내보내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라디오에서는 팝송을 들려주는 시간이 가끔 있었다. 내가 어릴 때는 그 팝송을 들을 라디오도 없었다. 유선 라디오인 스피커에서는 팝송 같은 것이 나올 리가 없었고, 나중에 월부장사에게서 산 라디오는 단파는 나오지 않고 중파만 되는 라디오였다. 그러니 팝송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팝 가수 중에 내가 아는 유일한 가수는 엘비스 프레슬리뿐이다. 엘비스를 알게 된 것도 정말 우연이었다. 1977816일에 나는 서울에서 광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때가 고등학교 3학년 방학 중이었는데 무슨 일로 서울에 갔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홍성 누나의 심부름을 간 거였다.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열 시쯤에 버스를 탔다. 그날은 내게는 방학이었지만 휴일이 아니라서 버스에 탄 사람은 두셋 정도였었다. 버스를 타자마자 잠이 들어서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버스기사가 틀어주는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에서는 아주 유명한 팝 가수가 타계했다고 특집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 타계한 가수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고, 노래를 아는 것도 없던 엘비스 프레슬리를 그날에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그가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가수였다는 것도 그가 죽은 날에 처음으로 알았다.

 

내가 그날 놀랐던 것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얼마나 뛰어난 가수이며 그가 지금까지 활동한 어떤 가수보다도 가장 많은 히트곡을 내었고 음반을 가장 많이 판매한 가수였다는 거였다. 솔직히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노래가 그의 노래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잠이 깬 뒤로 라디오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억이 난 게,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남진이라고 했던 말이다. 남진이 미국에 갔을 적에 프레슬리를 만나 같이 사진을 찍은 것이 우리나라 잡지에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사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한동안 남진을 프레슬리에 비유해서 말하곤 했었다.그러나 엘비스 프레슬리를 잘 몰랐던 나는 어떻게 남진을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하나? 엘비스 프레슬리를 미국의 남진이라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만큼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라디오에서 계속 나오는 엘비스 얘기를 들으면서 세상에 이렇게 대단한 가수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러면서 나는 엘비스의 팬이 되었다. 솔직히 엘비스의 어떤 노래가 얼마나 좋았다기보다는 그가 판매한 음반의 숫자에 껌뻑 죽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유명한 가수들의 히트곡과 비교를 하면서 엘비스의 음반 판매고를 소개하는데 누구도 그와 비교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를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다행히 이름이라도 알 수 있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내가 만일 그날 버스를 안탔더라면 절대로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고 말하지 못했을 거다.

 

나중에 들으니, 남진이 미국에 가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보고 그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고, 엘비스와 같이 찍었다는 사진은 돈을 주고 같이 찍은 것이라는 얘기가 떠돌았다. 물론 그 얘기는 남진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나온 말들이다. 나는 그 얘기가 맞는다고 해도 남진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1970년대 초에 우리나라의 입지는 지금의 베트남보다도 못했을 거였다. 대한민국에서 아무리 잘 나가는 가수라 할지라도 미국에서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엘비스와 사진을 찍으려면 돈이라도 주고 찍을 수밖에 없었던 일 아닌가?

 

나는 그래도 돈이라도 주고 사진을 찍은 남진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 시절에 영어가 되지도 않았을 것인데 어떻게 용기를 내서 사진을 찍으려고 생각했을까?

 

이젠 남진도 예전의 남진은 아니다. 한창 때에 남진이 리사이틀을 한다고 하면 송곳을 세울 틈도 없이 꽉 들어찬 팬들이 소리를 질러 댔고, 지방에 가도 일찌감치 매진이 되어 표를 구하기가 힘들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나훈아의 관중 동원력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나훈아는 자기의 특집 콘서트가 아니면 아예 TV에 얼굴도 안 비치지만 남진은 전국노래자랑에도 나와서 노래를 부르니 서로 격이 달라졌다. 그렇지만 가수는 남진이다. 나훈아가 남진을 그 사람은 어디든 무대만 있다고 하면 달려가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이니 나하고는 서로 다르다말한 것처럼 그는 타고난 가수이다.

 

2006년도에 KBS 가요무대 선정 광복60, 대중가요 6010대 가수에 보면 김정구, 남인수, 현인, 배호, 최희준, 남진, 나훈아, 조용필, 이미자, 패티 김이 올라 있다. 이들이 동시대에 활동을 했다면 어떻게 비교가 될 수도 있겠지만 같은 시대에 활동한 것이 아닌 사람들을 비교 평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 남진이 최고였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제일 좋아했던 가수가 남진인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