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5. 16:45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비가 오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신중현 님의 노래로 알려진 「빗속의 여인」이다. 비가 내릴 때에 이 노래만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비 오던 날에 내게 우산을 쓰여 준 한 여학생에 관한 추억이 이 노래를 떠오르게 한다.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 지금은 어디 있나
노오란 레인코트에 / 검은 눈동자 잊지 못하네~
다정하게 미소 지며 / 검은 우산을 받쳐주네.
내리는 빗방울 바라보며 / 말없이 말없이 걸었네.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
이 노래를 처음 불렀던 가수는 펄시스터즈로 알려져 있지만 신중현 사단이 처음으로 만든 록그롭 에드포의 서정길 님이 1964년에 맨 먼저 취입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노래여서 크게 각광받지 못했다가 70년대 이후에 큰 인기를 얻어, 펄시스터즈, 김추자, 이정화 등이 불렀고, 90년대에 김건모가 리메이크하여 크게 히트했다. 서정길 님은 30도 안 된 나이에 1971년 성탄절 대연각 화재 떼에 세상을 뜬 비운의 가수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우산이 아주 흔한 것이 돼서 아침에 비가 오다가 낮에 개면 교실에 놓고 간 우산이 한둘이 아니다. 장마철에는 다음 날 가져가기도 하지만 어쩌다가 아침에 비가 오고 그친 날은 쓸 만한 우산을 여러 개씩 챙긴다. 교무실에 가져다 놓았다가 나중에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가는 애들에게 주기도 하고, 다른 선생님들께도 준다.
예전엔 우산이 무척 귀한 것이었다. 1921년에 발표된 현진건 선생님의 「빈처(貧妻)」에 보면 집에서 글이나 쓰고 있는 주인공에게 은행에 다니는 사촌이 집으로 찾아와서 주인공의 아내에게 자기가 산 우산을 자랑하는 장면이 있다.
자기 부인에게 주려고 샀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주인공의 아내는 부러워하며, 내 팔자에 언제 그런 우산을 쓰겠냐는 푸념을 한다. 작은 목소리로 아내가 말하는 것을 들은 주인공이 그 사촌과 우산 때문에 속이 상해하는 부분이다.
그로부터 50여 년 가까이 지난 내가 어렸을 적에도 우산은 귀한 거였다. 우리 집에도 변변한 우산이 없었거니와 우리 동네에서 변변한 우산을 가진 집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시절엔 지우산(紙雨傘)이라고 해서 기름을 먹인 종이로 만든 우산을 가진 정도였다. 이 지우산은 뒤에 비닐우산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아예 없어진 것이 되었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우산 값이 너무 싸고 허접하다보니 중국산 우산이 1회용으로 바뀐 거였다.
지우산은 1회용은 아니었지만 여러 번 쓰고 나면 종이가 갈라져서 오래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 다닐 때 우산을 쓰지 못하고 비료푸대를 반으로 접어서 쓰고 다녔다. 장곡으로 다닐 때는 오리 길이 넘어 우산을 써도 다 비에 젖었고 광천은 시오리가 훨씬 넘는 길이라 아예 우산을 쓰고 다닐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비가 오면 그냥 맞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와서 재수를 할 때도 우산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시 양평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고종 사촌 누나에게 기숙하고 있으면서 종로 2가 YMCA건물 뒤에 있던 경일학원에 다녔다. 서울에서야 대부분 버스로 이동을 하니 버스 정거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목적지가 있어 우산만 있으면 그렇게 많이 젖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당시에 우산이 얼마 정도했는지는 알려고도 안 했지만 비닐우산은 300원 정도 했었다. 300원을 주고 비닐우산을 사면 한동안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인데도 우산을 돈 주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비가 오면 항상 우울하고 걱정이 앞섰다.
1978년 6월 1일로 기억한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철은 아니었으나 비가 며칠 이어 내렸다. 2일이 징병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이라 학원에서 오전 수업만 하고 조퇴를 하려고 했다. 아침에 종로로 나가는 누나와 함께 택시를 타고 종로 2가에서 내렸다. 누나는 비닐우산을 쓰고 갔고, 나는 반대 방향이라 종각 지하도를 건너서 나가 100m 정도만 가면 돼서 별 걱정 없이 나갔더니 비가 장대비로 내리고 있었다.
참 난감했다. 웬만하면 그냥 뛰어갈 수 있는 거리였으나 비가 워낙 거세게 내렸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지하도 출구에 서서 비가 좀 수그러들기를 기다고 있었다. 그런데 웬 여학생이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다가와, ‘어느 학원으로 가세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순간 당황하여 ‘경일학원인데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더니 같이 쓰고 가자며 나에게 우산을 씌어 주웠다. 얼굴도 쳐다볼 수가 없었고 뭐라고 말도 못하고 그냥 그 여학생이 걷는 걸음걸이에 맞춰 우리 학원까지 갔다.
가면서 나에게 ‘시골에서 오셨어요?’ 하고 묻길래, ‘네’하고 대답한 것이 전부였다. 그 학생은 나와 같은 학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 학원 문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고는 돌아서서 다시 가는 것이 아닌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는 했지만 고맙고, 당황스럽고, 신기하기도 하고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내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가관이었다. 머리는 소위 장발이었고, 상의는 군에서 입는 작업복(군복)을 걸쳤고, 하의는 물들인 군복인데다가 신발은 때가 덕지덕지 낀 흰 고무신에 당시에 ‘색’이라고 부르던 어깨에 들러 메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 첫눈에 봐도 시골 어느 산골에서 갓 올라온 촌놈 티가 역력히 났던 모양이다. 그런 초라한 모습이었으니 도시 여학생의 연민을 불러일으킨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같으면 이름과 전화번호를 묻는다든가, 어느 학원인지라도 알아서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게 두고두고 너무 아쉽다.
아니 지금이라도 그 여학생을 만나고 싶다. 만나서 술이 아니면 커피로라도 꼭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이다. 다른 사람에게 진 신세를 갚지 않으면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데 이 일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니 찾을 방법이 없다.
전설적인 무협소설 작가 김용 선생이 쓴 『천룡팔부』에 보면, 서하국의 공주가 혼몽 상태에서 만났던 남자를 찾기 위해 전국의 모든 결혼적령기 남자들을 대상으로 공주의 부마를 구한다는 방을 붙이고 엉뚱하게 그 자리에 온 당사자 스님을 만나 결혼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나야 그럴 정도는 아니지만 찾을 수만 있다면 꼭 만나고 싶다.
그 여학생도 지금은 쉰이 다 되었을 나이이니 30여 년 전에 웬 시골뜨기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던 일을 기억할 런지 알 수가 없지만 지금 만날 수 있다면 비 오는 날 약속을 하여 소주 한 잔은 꼭 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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