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시간은 반갑지 않았어도

2012. 3. 25. 16:51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나는 예체능을 비롯한 실기과목은 영 소질이 없다. 손이 조금 큰 편이기는 하지만 아주 투박하지는 않은데도 손재주가 전혀 없다. 그림 그리기, 판화, 꽃나무 접목 등 손으로 하는 것은 좋은 평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악기도 제대로 다루는 것이 없다. 남들은 학교에서 조금 배운 실력으로도 단소나 하모니카 등을 곧잘 불지만 나는 한 번도 제대로 해본 것이 없다. 내가 사진에 오래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마 그런 것에 대한 보상심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것은 못해도 보는 눈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대충 넘어갈 수 있지만 노래만은 그렇게 안 되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 다닐 때에 가장 괴로웠던 것이 음악 실기 시험을 볼 때였다. 지금은 고등학교의 음악 시간이 한 시간으로 줄었지만 내가 다닐 때는 2학년 때도 음악이 있었다. 2학년 음악 시간에 만난 분이 전병희 선생님이다.

 

전병희 선생님은 우리 고장 홍성 출신이셨다. 홍성읍이 지금은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인구 3만도 채 안 되었다. 홍성읍과 광천읍을 합하여 5만이 넘으면 홍광시홍주시로 되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 바람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 홍성에서 음대를 갔다는 것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선입관이지만 대개 예체능을 했다고 하면 공부를 못 한 줄로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색안경을 끼고 볼 생각이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선생님 어르신께서 어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셨다고 하는데 악기를 잘 다루시고 작곡도 많이 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그 아버님의 재능을 받으셨던 거였다.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은 어디 만화 속의 주인공 같았다. 얼굴이 예뻐서가 아니라 작은 체구에 얼굴 모습이 꼭 어디선가 본 느낌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만화 뽀빠이에 나오는 올리브를 닮은 모습이기도 했다.

 

하여튼 첫인상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애들을 대하는 태도는 작년에 보았던 여자 선생님들과 달랐다. 아이들에게 큰 누나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주셨다. 옷을 입는 것도 시원시원했고 농담도 잘 건네셨다. 처음엔 선생님의 그런 모습에 많이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식이 없는 선생님에게 반했다.

 

나는 노래도 못하고 악기도 다루지 못해 음악 시간에 실기시험을 볼 때마다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냥 노래시키지 말고 기본 점수만 주면 좋겠는데 꼭 노래를 불러야 점수를 주었고 그래봤자 기본 점수였다. 그러니 노래로 시험을 본다고 하면 언제나 불안했고 그 시간이 빨리 지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아무리 연습하고 노력해도 노래는 늘지가 않았고, 여러 애들 앞에서 음치임을 공개하는 것 같아 싫었다. 실기 시험이 아니라도 언제나 음악 시간은 부담이었다.

 

전병희 선생님이 큰 누나처럼 대해주셨다고 해도 노래 시험을 피해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선생님은 못하는 노래를 억지로 잘 하려 하지 말라고 하면서 부담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기본 점수는 다 주는 것이니까 할 수 있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대신 100점 만점에 60점이 아니라 70점 정도를 기본으로 주셨다. 필기시험에서 100점을 받으면 170점이 되고 평균이 85점은 되니까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우리 학교는 기말 성적이 평균 80점을 넘으면 수업료 전액이 면제가 되는 장학금을 주었는데 나는 2학년 1학기부터 졸업할 때까지 성적 우수 장학금을 받았다. 내 영어와 수학 성적도 좋지 않았지만 내 성적에 있어 가장 부담이 되는 과목이 음악, 미술, 체육, 독일어였다.

 

내가 못해서 성적이 안 나오는 과목들이라 시험 때만 되면 이들 과목 때문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을 넌지시 알고 있던 전병희 선생님이 음악에서는 부담을 덜어주신 셈이다.

 

어떤 선생님이든 자기 과목을 못하는 아이를 좋아하는 분은 드물다. 그러나 전병희 선생님은 그런 티를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 나를 담임하신 적도 없고, 내가 음악을 못해도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음악은 다른 과목과 달라서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 음악 시간에 뵙는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나는 반장이라고 교무실을 많이 드나들었던 덕택에 다른 애들보다는 선생님을 자주 뵈었다.

 

그때 교무실에는 우리가 아주 좋아하고 잘 따르던 수학 선생님이 계셨다. 그 선생님은 총각이셨고 아주 젊으셨다. 그런데 수학 선생님과 가깝게 지내는 아이들 얘기가 전병희 선생님이 그 수학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런 면에서 워낙 눈치가 없어 전혀 몰랐으나 아이들 얘기가 분명히 그렇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수학 선생님께는 좋아하는 분이 따로 있었다. 수학 선생님이 좋아하는 것인지 그 여자 분이 좋아하는 것인지는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수시로 편지와 선물이 오곤 해서 우리는 그 여자 분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면 괜히 알고 난 뒤에 상처 받는 것보다 차라리 그 사실을 알려주어 단념하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내가 전병희 선생님께 수학 선생님에게는 애인이 있다고 말씀을 드릴까 했었더니 친구들이 극구 말려서 그만 두었다.

 

친구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얘기 꺼냈다가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지 말라는 얘기들을 했다. 솔직히 내 생각으로는 모르는 체 하는 것이 더 가혹한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서지 않는 것이 낫다는 애들 말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괜한 오해를 사서 만들 필요는 없었다.

 

2학년 때 겨울방학 직전에 수학 선생님께 과외를 받던 아이들과 함께 수학 선생님을 모시고 오서산 등반을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전병희 선생님도 같이 가시자고 초대를 했더니 선생님이 쾌히 승낙을 하셔서 다들 좋아했다. 우리 남자끼리만 가는 것보다는 여자 선생님이 같이 가시는 것이 훨씬 유쾌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광천역 앞에서 기다리고 아이들이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함께 오서산에 올랐다.

 

오서산은 해발 791m 가 되는 산이라 그리 만만한 코스는 아니다. 담산리로 해서 정암사 방면으로 올라갔다. 그날이 권투선수 김태호가 라이트급 세계챔피언에 도전했던 날이다. 산에 오르느라 라디오로 중계를 들었다. 처음에 다운도 뺏고 해서 이길 줄 알았더니 나중에 KO패로 지고 말았다. 챔피언은 세라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권투중계를 듣느라 힘든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올라갔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지금도 몇 장이 남아 있다.

 

내려올 때는 내원사 방면으로 해서 우리 집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왔다. 어머니가 점심을 준비해 놓으셔서 선생님들께서도 맛있게 드시고, 우리도 아주 잘 먹었다. 두 분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떤 추억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의 유대감을 더욱 공고히 하는 일이다. 3학년이 되어 음악 시간은 없어졌어도 선생님과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어 좋았다. 수학 선생님은 우리가 3학년 2학기가 될 때에 서울로 전근을 가셨다.

 

졸업한 뒤에는 전병희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아주 오래 전에 선생님이 결혼을 하신다는 얘기를 얼결에 들었지만 가지 못했다. 선생님 댁에서 하숙을 했던 기석이는 선생님과 소식을 주고받고 있을 런지도 모르지만 기석이를 만난 지도 20여 년이 지났으니 다 지난 얘기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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