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같았지만

2012. 3. 25. 16:54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나는 천성이 따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수학을 못하나 모양이다. 초등학교 때 산수를 제외하고는 수학 성적이 항상 안 좋았다. 학교를 진학할 때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수학이었다. 수학을 싫어하니 당연히 공부도 하지 않았고 그러니 성적이 잘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수학을 열심히 했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게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선생님이 무서우면 하기 싫은 과목이라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시험을 보고나서 몇 점 이하를 때리든지 먼저 시험보다 떨어졌을 경우 호되게 두들기면 맞는 게 두려워서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 그 시절에는 맷집으로 버티기가 힘들 정도로 두들기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이 그랬다. 담임을 맡았던 김동기 선생님은 수학과목이셨는데 정해 놓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무섭게 두들기셨다. 그래서 꼼짝없이 수학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생님이 중간에 다른 학교로 떠나셨다.

 

담임도 임시로 맡은 분이 하셨고 수학시간은 한동안 자습으로 때우다가 다른 선생님이 오셔서 가르쳤다. 한동안 놀고 안 한데다가 선생님이 무섭게도 하지 않으셨으니 그러잖아도 하기 싫은 수학은 그때부터 문제가 더 커지고 말았다.

 

2학년이 될 때에 문과로 선택을 한 것은 수학이 싫어서만은 아니다. 내 천성이 과학이나 수학보다는 사회나 역사를 훨씬 좋아했기 때문에 생각할 것도 없이 문과를 선택했다. 2학년이 시작된 뒤 거의 2주 정도는 수학 선생님이 안 오셔서 수학시간은 자습으로 때웠다. 시골 학교는 학기 초에도 선생님이 늦게 오시고 중간에 다른 학교로 가는 경우도 많아서 자습으로 때우는 시간이 많았다.

 

3월 중순에 오신 수학선생님은 서울에서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오신 이상규 선생님이셨다. 얼굴이 얼마나 앳되었는지 옷만 바꿔 입으면 고등학교 학생이라고 해도 좋을 동안이셨다. 서울에서 오신 선생님들은 툭하면 중간에도 떠나는 경우가 많아서 오래 계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첫 눈에 선생님이 좋았다. 나는 2학년이 되면서 학급 반장을 맡아 교무실을 내 집 드나들 듯 할 때라 수업시간이 아닌 때에도 선생님을 자주 뵐 수가 있었다.

 

그때는 학교 선생님에게서 과외를 받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때라 우리 반 아이들 중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 몇을 묶어서 영어와 수학을 과외 받기로 팀을 짰다.

 

영어는 담임선생님께 받기로 이미 얘기가 끝난 뒤였고 수학은 수학 선생님께 받자고 얘기가 되어 내가 대표로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처음엔 안 하시겠다고 하셨지만 쉽게 그만 둘 나도 아니어서 몇 차례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선생님께 부탁을 해서 간신히 승낙을 받았다.

 

수업이 끝나면 우리가 먼저 수학 선생님 하숙집에 가서 놀고 있다가 선생님이 오시면 한 시간 반 정도 과외를 받고 집으로 갔다. 날마다 선생님 하숙집은 우리 때문에 소란스러웠고 선생님 방에 있는 먹을거리는 우리가 다 먹어치워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다. 한번은 누군가가 선생님 드시라고 가져다 놓은 포도주를 내가 다 마시고 취해서 슬쩍 집으로 도망을 쳐 오기도 했다.

 

내가 수학을 열심히 한 적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한번 뿐이다. 수학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상규 선생님이 좋아서였다. 수업시간에도 열심히 들었지만 집에서도 수학 공부를 많이 했다. 모르는 것은 통째로 외워서 시험을 볼지라도 성적을 올리고 싶었다.

 

내 취약과목이 영어·수학이라고 했지만 영어는 담임선생님 과목이라 안 할 수가 없었고 수학은 이상규 선생님이 좋아서 했으니 문과에서는 내가 항상 1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1등을 하니까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계속 공부를 해야 했다. 그렇게 이어져서 나는 문과에서 1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학교에서도 우리 문과반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실 만큼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셨고, 아이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무시하지도 않으셨다. 어떤 때 보면 오히려 우리보다 더 나이가 덜 든 것 같은 표정이라 애들이 많이 놀려대기도 하였다. 수업시간에 명쾌하게 풀고 설명을 재미있게 하시니 수학을 잘 모르는 아이가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경기도 용인이 고향이셨다. 서울 누님 댁에서 학교를 다니셨다고 들었다. 우리 학교에 계시면서도 대학원에 다니셨고 금요일에 올라가시면 월요일 아침 기차로 내려 오셨다. 우리는 그때 선생님이 대학교수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떤 소문으로는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도 들었다. 행정고시 1차에 합격하고 2차를 준비하는 중이라는 얘기가 근거 있는 사실처럼 흘러 다녔다.

 

내가 지금까지 담배를 안 피우는 이유는 선생님의 영향이다. 물론 우리 담임선생님도 담배를 피우시지 않으셨지만 이상규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이룰 때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스스로 다짐했다고 하셔 나도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이룰 때까지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그때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어 그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선생님께 과외를 받던 친구들은 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술은 드셨기 때문에 나도 술은 끊지 않았다. 고등학교 2·3학년을 담임하신 오규한 선생님이 아버지 같았다면 이상규 선생님은 바로 위의 형님 같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혹 선생님이 중간에 떠나시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이미 결혼하시어 애들이 둘이고 홍성에서 사시니까 그냥 학기 중에 떠나실 리가 없지만 젊은 선생님들은 학기 중간에도 떠나시는 분이 많았었다.

 

다른 과목도 다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수학 선생님이 중간에 바뀐 경험이 있던 터여서 늘 그게 걱정이었다. 우리가 3학년이 되었을 때에 선생님은 문과가 아닌 이과를 맡으셨다. 그것은 싫었지만 학교에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였다.

 

그렇게도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3학년 1학기가 끝나고서다. 선생님이 서울로 가신 거다. 배신감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가시는 길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학기 도중은 아니라고 하지만 고등학교는 학기제가 아니라 학년제이기 때문에 마무리를 못하고 떠나셨다.

 

선생님도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늘 말하던 것이 현실이 된 것이 가장 난처했을 일이다. 그런 일이 있을까봐 여러 번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볼 때 우리가 바라는 대로 홍성에 계속 계시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이 서울로 가시고 얼마 안 돼서 내가 서울에 갔다가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건국대학교 앞에서 만났다. 선생님이 그때 만나고 계시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나와 친구들은 얼굴은 본 적이 없어도 이름은 알고 있었다. 그분도 함께 나오셔서 건대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건국우유를 사 주셔서 마셨다.

대학 우유라고 해서 맛이 다른 줄 알았더니 그게 그 맛이었다. 선생님은 저녁 때 명동으로 나를 데리고 나오셨는데 도통 복잡하기만 했고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마 한일관인가 하는 곳에서 갈비탕을 사주셨던 것 같다.

 

그 뒤에도 서울에 올라가면 선생님께 연락을 드려서 뵙고 왔다. 마포 만리동에 사시는 선생님 누님 댁에 자주 가서 거기서도 나를 알아볼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이 누님 댁에서 더부살이는 하는 셈인데도 눈치 없이 자주 드나든 것이 우습고 죄송스럽지만 그때는 그렇게 해도 괜찮은 줄 알았다. 재수할 때는 오히려 자주 뵙지 못하였다. 대학에 진학하고서 뵐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바로 군에 가서 만나 뵐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들으니 우리 고등학교 동기들이 여산에 있는 제2하사관학교에 차출이 되어 갔을 때에 거기서 선생님을 만났다고 한다. 우리 친구들보다 군대에 늦게 가셨던 모양이다. 아니 나보다도 군대는 늦게 가셨다고 들었다.

 

세상 인연이라는 것이 참 알 수가 없어서 선생님이 하사관학교에서 군부대로 실습을 겸한 견학을 나가셨는데 같이 근무를 섰던 군인이 내 중학교 동창인 철종이였다. 둘이 경계 근무를 서며 얘기를 나누다가, 선생님이 홍성에 있는 홍주고에서 재직했다고 말씀 하시니까 철종이가 그럼 거기 이영주라는 학생을 아느냐고 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내 얘기가 나와 둘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선생님 사모님은 당산동 부근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학교에서 무슨 얘기 끝에 선생님 말씀을 하다가 사모님이 당산동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했다고 했더니 어떤 학생이 자기가 그 선생님께 배웠다고 얘기해서 놀랐다.

 

세상이란 이렇게 넓고도 좁은 모양이다. 우리는 선생님이 학교에 계실 때에 선생님께 오는 편지라든가 선생님 하숙방에 있는 사진 같은 것을 다 들추어 보았고 선생님께 어느 분에게서 연서가 오는지도 알고 있었다.

 

내가 교사가 된 뒤에도 선생님을 몇 번 뵈었다. 선생님도 고등학교에 근무하시고 계셔서 우연히 소풍을 가서도 뵈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나이가 들지 않은 모습이라 같이 만나서 얘기할 때면 다들 친구로 알 정도이다. 감히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선생님은 정말 형님으로 모셨어도 좋을 분이셨다.

 

선생님도 이제 연세가 드시는지 요즘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술도 마다하시어 뵙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