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지는 않았으나

2012. 3. 25. 16:48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고등학교 3학년 초봄에 월요애국조회를 하기 위해 준비를 할 때였다. 건물 중앙 현관 앞에서 학도호국단 중대장들이 조회를 할 때에 갖추는 장신구들을 착용하고 있는데 아가씨가 한 분 오셔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할 것인지, 그냥 들어가야 할 것인지를 망설이고 서 있었다.

 

그 분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학교로 오신 손님이라 생각하여 내가 선생님들 신발장에 준비되어 있는 슬리퍼를 가져다 드렸다. 그 아가씨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교무실로 들어갔다.

 

조금 뒤에 운동장 조회를 할 때에 교장 선생님이 새로 오신 선생님이라고 소개하여 보니 아까 보았던 그 아가씨였다. 교장 선생님은 그 아가씨가 충남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시고 우리 학교에 수학선생님으로 오셨다고 소개를 하셨다. 그 분이 명수일 선생님이고 나는 그런 인연으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명수일 선생님은 1학년 수학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우리 수업을 들어오진 않으셨지만 내가 교무실에 자주 들랑거리니까 늘 뵐 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선생님은 당시 홍성교육청의 교육장님 따님이라고 했다.

 

여름방학을 하던 날, 오전 수업으로 끝나고 천범이, 정재, 재진이, 후성이, 대웅이, 순흥이 등과 학교에서 얼쩡거리다가 명 선생님을 만났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내가 선생님 아이스크림 사주세요했더니, 따라 오라고 하셔서 우리는 선생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갔다. 교문 앞 가게로 가시는 것인가 했더니 거길 지나쳐 그대로 홍성읍내로 계속 걸으셨다.

 

우리는 선생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가며 혹 선생님이 우릴 놀려주려 그러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도 했지만 나는 선생님이 애들을 놀려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를 놀릴 만큼 장난기가 있는 분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걸어서 선생님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무슨 아이스크림 대리점이었다.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우리 여나믄이 앉아서 먹기에는 충분한 곳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더러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이것저것을 한 보따리 들고 오셨다.

 

그때는 아이스 바가 보통 50원 안팎이고, 콘은 100원에서 200원 정도할 때다. 그리고 통에 들어있는 것이나 상자에 들어있는 것은 우리가 감히 사 먹지 못했었다. 선생님은 콘과 통에 들어 있는 것, 곽에 들어 있는 것을 잔뜩 가져다 놓고 먹으라고 권하셨다.

 

그렇게 많은, 그리고 고급인 아이스크림은 내가 생전 처음 구경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같이 간 아이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정말 우리는 배를 두들기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부족하면 더 가져다 먹으라고 하셨지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넘쳐났다.

 

그날에서야 선생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자취를 하고 있다고 하니까 선생님 댁으로 와서 김치와 밑반찬 등을 가져다 먹으라고 하셨고, 방학 중에 놀러오면 수박이라도 내어 줄 것이니 꼭 놀러 오라고 하셨다. 그 말이 빈말일리야 없겠지만 빈말이라고 해도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나뿐이 아니라 같이 간 아이들 하나하나 이름을 묻고 이것저것에 대해서 같이 얘기하고 즐거워 하셨다.

 

이렇게 해서 명수일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고등학교 3학년이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여유가 없었다. 늘 쫒기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보내는 것이 시험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아니던가? 그렇게 정신없이 2학기가 가고 대입 예비고사를 봤다. 예비고사가 끝나고 발표까지는 한 달이 더 걸리지만 그 기간이 가장 여유롭고 놀만한 시간이었다. 예비고사에 떨어지면 아예 대학에 시험을 볼 자격을 안 주니까 불안하면서도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했다.

 

시험을 치고 온 며칠 뒤에 애들과 상의해서 영화구경에 명수일 선생님을 초대하기로 했다. 그때 홍성극장에 무슨 하이틴 영화가 들어와 상영되고 있을 때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시간이 되신다고 해서 시간약속을 하고 극장 앞에서 뵙기로 했다. 선생님은 내가 말씀드리러 갔을 때에 몇 명이나 같이 가냐고 물으셔서 선생님까지 포함하면 아홉 명이 될 거라고 말씀 드렸었다.

 

우리는 영화를 보기 위해 미리 돈을 걷었고 약간의 여유도 있었다. 약속시간에 맞춰서 극장 앞에 갔더니 선생님이 우리보다 미리 오셔서 표를 다 끊어 놓으셨고, 과자까지 한 보따리 내어주셨다. 그러고는 갑자기 할 일이 있어 선생님은 영화를 같이 못 보고 들어가셔야 한다고 하셨다. 솔직히 이번만은 우리가 모시고 싶었는데 너무 송구스러웠다.

 

영화가 끝난 뒤에 선생님께 어떻게 갚을 것인가를 상의했다. 조금씩 돈을 걷어서 선물을 준비해가지고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얼마 뒤에 겨울 방학을 하루 앞에 둔 날, 낮에 선생님을 찾아뵙고 저녁에 선생님 댁으로 놀러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반갑게 웃으시며 우리들 편한 시간에 집으로 오라고 하시어 시간 약속을 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 댁에 가자고 얘기했더니 다 이런저런 일이 있어 못 간다고 하여 나하고 후성이만 갈 수 있었다. 후성이와 둘이 어떤 선물을 살 것인가를 무척 고심하다가 빨간 가죽장갑을 샀다. 문방구에서 본 만년필이 무척 마음에 들어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겨울철이라 장갑으로 바꿨다.

 

저녁밥을 일찍 먹고 후성이와 만나서 선생님 댁으로 갔다. 교육청장 사택이라고 들었는데 많이 낡은 집이었다. 미리 시간 약속을 하고 간 것이라 선생님께서는 우리들 먹을 음식을 미리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던 모양이다.

 

선생님을 따라서 방에 가보니 여덟 개의 찻잔과 여덟 명이 먹을 빵과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가 늘 몰려다니는 숫자를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둘이 갔으니 정말 민망했다.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둘이서 여덟 명의 것을 다 먹으면 되니까 괜찮다고 하셨다. 식빵을 구워 토스트를 만드는 것을 그날 처음 구경했다. 진학 얘기, 우리들 가족에 대한 이야기, 여러 가지를 얘기하면서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나는 여럿이 있을 때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렇게 두세 사람이 앉은 자리는 무척 어색해하는데 선생님이 편안케 해주셔서인지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가기는 했지만 선생님이 준비해주신 것은 거의 다 먹었고 남은 것은 싸 주셔서 가지고 왔다.

 

선생님이 3월 말에 대전에서 결혼을 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꼭 가고 싶었으나 서울에서 재수를 하느라 가지 못하고 말았다. 선생님께 가겠다고 약속을 했으나 대전에 갈 수는 없었다. 꼭 결혼식에 가서 축하를 드리고 싶었는데 사정이 그렇게 되고 말았다. 선생님이 내가 처한 현실을 이해해주신다고 해도 나로서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해 12월 홍성 학교로 원서를 쓰러가는 용인이를 배웅하기 위해 용산 버스터미널에 나갔다가 선생님을 잠깐 뵈었다. 길을 가고 있는데 앞에 한복으로 정장을 하고 걷는 분의 걸음걸이가 눈에 익어 자세히 보니 선생님이셨다.

 

너무 반가워 뛰어가서 선생님을 뵈었다. 신길동에 사신다는 말씀만 듣고는 전화번호도 묻지 못하고 돌아섰다. 시간이 흘러서 어색한 것이 아니라 아직 불투명한 대학 진학 때문에 선생님과 길게 얘기를 하고 있을 형편이 못 되었다.

 

벌써 30여 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