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들

2012. 3. 25. 17:09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중학교는 광천부근의 여러 초등학교에서 배정을 받아 오기 때문에 처음부터 오서초등학교에서 같이 간 친구들도 꽤 되었다. 선교, 길순이, 정혁이가 나와 같은 마을에서 갔고, 광제에서 광석이, 우상이, 장룡이, 주몽이, 용순이가 있었으며, 안골의 정준이, 오성리에서 동호, 진태 등이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이다.

 

여자 동창으로 광흥에 간 친구는 주길이와 한순이가 있었다. 또 오서 출신이 아니더라도 장곡에서 온 아이들이 꽤 많았다. 우리는 장곡초등학교에서 2학년 1학기까지 보냈기 때문에 장곡 아이들과도 웬만큼 안면이 있었다.

 

처음에 반 편성은 시험을 쳐서 했다. 남자 네 반 중에서 성적우수반을 만들었고, 다른 반들은 골고루 섞어서 편성했다고 들었다. 1학년 2학기 때는 성적우수반을 둘로 나누기도 했었다. 나는 3년 동안 성적우수반에서 빠진 적은 없지만 그리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다.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도 그렇긴 하지만 처음 중학교에 가서는 주로 우리 오서출신하고만 어울렸다. 아무래도 서로 잘 아는 사이니까 좋았고 어떤 일이 있을 때는 작은 도움이라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지역 출신이 아닌 친구들과도 가깝게 지내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명남이와 철종이다.

 

명남이는 나보다 한 살 정도 위로 알고 있지만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는 점잖은 친구였다. 1학년 때에는 잘 몰랐던 것 같고, 2학년 때부터 한 반이 되어 같이 2년을 보냈다. 처음 만났을 때에 내 실수로 명남이가 손을 다쳤었다.

 

내가 다른 아이하고 장난치며 놀다가 교실 문을 힘 있게 닫는 순간에 명남이가 들어오다가 문 사이에 손가락이 끼었던가 해서 시커멓게 멍이 졌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아픈 가는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를 만큼 말로 형언할 수가 없는 통증이 온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실수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 그에 대한 보복성 조치가 있을 줄로 알았다. 이미 들은 바로는 명남이가 광천에서 노는 축에 속했고 노는 아이들도 명남이는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자기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명남이는 손가락을 보면서 무척 아픈 표정을 짓더니 더 말이 없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냥 괜찮다고 말하고는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무척 멋있는 친구라고 생각했고, 다른 일이 있을 때에도 늘 관심을 갖고 보게 되었다. 우리 학교에도 노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명남이 앞에서는 별로 그런 티를 안 냈던 것 같다. 나야 노는 것 하고는 거리가 먼 겁 많은 산골아이였어도 명남이 덕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다.

 

내가 대중가요를 좋아할 때에 명남이는 팝송에 빠져 있었다. 명남이는 내가 전혀 듣지도 못했던 외국 가수들 이름을 많이 알고 있었으며, 노래를 곧잘 흥얼거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어떻게 같은 시대, 같은 고장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그런 차이가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더 놀란 일은 명남이가 독배에서 하는 콩쿨대회에 나갔다는 거다. 그 때는 콩쿨대회라고 해서 일종의 노래자랑이 연례행사처럼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 마을에서도 두어 번 했지만 그것은 광천에서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동네잔치에 불과한 거였으나 독배에서 하는 콩쿨대회는 광천과 인근 지역 사람들이 대거 몰리는 큰 행사였다. 나는 그런 곳에 구경하러 갈 아이가 전혀 아니었지만 명남이가 가자고 해서 같이 갔다. 가서 보고 거기 몰려온 많은 사람들 때문에도 놀랐지만 우리 학교 애들이 꽤 많이 왔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광천에 사는 아이들 중에서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애들은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그런 자리엔 어른들만 나오는 줄 알았더니 고등학생, 중학생도 사복을 입고 많이 나왔고 명남이도 거기 나가 노래를 부른 것이다. 콩쿨대회를 구경하고 와서는 명남이를 친구보다 형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잘 하는 명남이가 대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명남이하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든 것이 하나 있다. 명남이가 영화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용팔이시리즈였다. 나는 얘기만 들었기에 잘 알 수가 없어 그 영화들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가 3학년일 때에 영구와 용팔이가 광천극장에 들어왔다. 그래서 내가 돈을 내기로 하고 둘이 극장에 갔다가 학생부장 선생님에게 걸려서 5일간의 정학을 당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을 수 있지만 참 가슴 아픈 추억이다.

 

철종이는 천북에서 왔다. 낙동초등학교 대표학생이었다. 철종이는 광흥중학교 우리 동기 중에서 감성이 가장 풍부하였고 최고의 문학소년 기질을 갖고 있었다. 나처럼 학교 공부보다는 소설책 읽기를 더 좋아했다.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얘기할 기회만 주면 판을 벌렸던 것이 나하고 철종이, 철종이 사촌 혜종이었다. 여기저기서 읽은 것하고 어디서 풍문으로 들은 것까지 다 엮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설전을 벌였다. 나중에는 이것이 소문이 나서 다른 과목 시간에도 선생님들이 시키면 역사, 정치, 문학에 대해서 쓸데없는 얘기들을 잘도 풀어냈다.

 

철종이는 당시 또래 아이들보다 생각이 깊었다. 위로 형과 누나가 있어 세상을 보는 것이 남들보다 빨랐던 데다가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조숙했던 것 같다. 가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한다고 핀잔도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하고는 얘기가 통했다. 사실 나야 정말 순진한 시골아이였으나 철종이는 나보다 몇 발짝을 앞서 나가 있었다. 여자 친구를 아는 것도 그랬고 이성교제 같은 것에 대해서도 한수 위였다.

 

철종이는 오서산 아래 우리 집에도 가끔 놀러 와서 같이 자고 학교에 가기도 했다. 그 바람에 경후나 기종이 같은 우리 동네 친구들과도 잘 알게 되었고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나보다 책을 더 많이 읽은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철종이라고 생각한다.

 

철종이는 책만 많이 읽은 것이 아니라 정말 감성이 풍부했다. 다만 또래 아이들이 철종이를 이해하기가 힘들 정도였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문학 소년이 조금 도를 넘으면 약간 돌았다는 말을 듣기가 쉽다. 한 발자국 먼저 나간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나도 천북 철종이네 집에 여러 번 놀러 갔었다. 우리는 그때 중학생이었지만 친구끼리 모이면 막걸리를 받아다가 마시고 놀았다. 그게 다 너무 일찍 읽은 고전작품들 탓이라고 하겠지만 당시 정서는 손님이 오면 막걸리를 받아다가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철종이는 학교 일에 대해 부정적인 정서를 가진 것에서도 나와 비슷했다. 그러니 학교 일에 앞장을 서는 선생님들에게는 밉보여 늘 혼나기 일쑤였고 자주 얻어맞았다. 1학년,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철종이네 동네에서 살고 철종이와 일가였다. 선생님이 보시기엔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모르지만 정상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잘못도 없이 자주 혼나는 집안 아우가 안쓰러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평초등학교를 나온 종환이는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6학년 때에 홍성교육청으로 문교부장관상을 받으러 갔다가 만났다. 우연히 만난 사이였지만 중학교에 와서 3년을 같은 반에서 지냈으니 그것도 인연이었다고 생각한다. 짙은 눈썹에 오뚝한 코로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당시 우리 반에는 공부 잘 하고 똑똑한 친구들이 무척 많았다. 철도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간 영철이, 현종이, 금오공고에 간 상민이, 그리고 홍성고등학교에 원서를 낸 친구들은 거의 합격을 하였다. 그 친구들은 공부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도 많았다. 쉬는 시간에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모르는 것이 없어 보였다.

 

나야 책을 통해 아는 것이 전부였지만 광천 아이들은 TV와 신문들을 통해서 현실 문제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당시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아버지나 형이 있는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학교에 와서 전달해서 많이 놀랐다. 지금 생각하면 월간 신동아같은 잡지나 동아일보 정도의 신문만 보면 다 알 수 있을 것들이지만 나는 그런 면에서는 많이 뒤떨어져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주판 7급을 따면 된다고 할 때, 4, 5단인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것이 나중에 무슨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경이스런 일이었다. 우리는 그 시절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등잔불 아래 공부를 했지만 광천에 사는 아이들은 전깃불 아래서 공부하고 TV를 보던 시절이다. 그러니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그 아이들도 내가 산골출신이라는 것을 잘 아는 친구들이지만 나를 무시하거나 우습게 안 친구는 별로 없었다고 생각한다. 더러 마음에 안 맞는 친구도 있기야 했지만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내가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국어시간과 국사시간에는 선생님조차 나를 무시하지 않을 정도여서 그것으로 내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동기에 여자도 한 반이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이 두 명이 있었고, 1년 선배도 한 명이 있었지만 나는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그 사람들하고 한 번도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학교를 졸업하고서 수십 년이 지난 몇 년 전에 내가 운영하던 오서초등학교카페에 장곡에 살던 중학교 동창 인숙이가 들어와 가끔 쪽지를 주고받았다. 그때는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었지만 장곡에서 살았다는 것과 중학교 동창이라는 것이 연결고리가 된 거였다.

 

많이 반가웠다. 중학동창회에 나가면 여자 동기들을 만나지만 예전에 알고 지내지 않았던 터라 많이 쑥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