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2012. 3. 25. 17:06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중학교는 시험을 쳐서 가는 곳이 아니었지만 고등학교는 자기가 선택한 학교에 시험을 쳐서 진학하는 것이 당시의 제도였다. 서울은 연합고사를 봐서 시험에 합격한 학생들을 추첨으로 배정했지만 다른 지역은 본인이 진학을 하고 싶은 학교에 원서를 내고 거기에 시험을 쳐서 합격을 하면 다닐 수 있던 방식이다.

 

충남에서 점수가 가장 높은 학교는 대전고등학교였고, 그 다음은 역시 대전의 충남고등학교 그리고 공주의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가 세 번째였다. 이 세 곳이 아니면 홍성의 홍성고등학교를 가는 것이 당시 홍성 부근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선택이었다. 광천에는 광천상업고등학교가 있고, 삼육고등학교와 새로 신설된 광천고등학교가 있었지만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이라면 적어도 홍성고등학교에 가야 그것이 가능하다고 인정받았다.

 

나는 홍성고등학교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학교 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 고입모의고사를 보면 늘 점수가 잘 나와서 홍성고등학교를 우습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공주의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공주사대부고)였다. 공주사대부고는 반에서 1, 2등을 할 정도는 되어야 갈 수 있을 만큼 어려운 곳이었지만 합격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시험을 쳤다가 보기 좋게 떨어졌다.

 

후기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은 홍성에 새로 생긴 홍주고등학교와 광천의 광천고등학교였으나 나는 홍성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지가 않아 청주의 충북고등학교에 지원했다. 처음부터 충북고등학교를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학교가 있는지도 몰랐지만 공주에 가서 시험을 보고 청주에 사시는 막내 고모네 집에 갔다가 청주 후기 고등학교에서 가장 점수가 높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덜컥 원서를 냈다가 다시 떨어졌다.

 

체력장 점수 20점을 합하여 200점 만점에 커트라인이 170점대 학교들만 골라서 시험을 쳤으니 어지간히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게다가 나는 체력장도 15점을 받아 마이너스 5점을 안고 갔으니 다른 학생들보다 최소 5점은 더 맞아야 가능했었다. 그렇게 후기까지 떨어지고서 청주 고모네 집에 가서 1년을 재수했다.

 

요즘에는 고등학교를 재수해서 갔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때는 고입재수학원이 성행할 만큼 재수생이 많았다. 청주에서 1년은 내가 스스로 개안(開眼)을 했다고 얘기할 만큼 성적이 늘었다. 비록 타향인 청주에서 충남 출신으로는 서넛도 안 되는 시골아이였지만 초반부터 성적이 좋아서 애들에게 전혀 텃세를 받지 않고 생활했다. 아니 오히려 거기 아이들이 나를 받들어 줬다고 할 만큼 내 세상이었다.

 

청주에는 고입 종합학원이 두 군데 있었다. 내가 다닌 곳은 아카데미학원이었다. 우리 학원에는 청주 출신 아이들보다 지방에서 온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 충북 각지에서 공부하러 청주로 왔던 거였다. 나도 시골출신이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성적이 좋다는 것이 인정을 받아 학원에서 잘 나가는 편에 속했다.

 

내가 청주에서 만난 친구는 건호와 상진이, 그리고 종칠이다. 한반뿐인 종합반에 8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가물가물하고 셋은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한다. 학원을 떠난 뒤에 건호와 종칠이는 만난 적이 있지만 상진이는 한 번도 못 만났다. 상진이는 청주가 아니어서 만나기가 더 어려웠던 탓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서로 편지도 주고받고 했지만 지금은 다 끊겨서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게 벌써 3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니 이제 어디서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내 기억 속에는 청주에서 그들과 같이 지낸 기억이 확연히 남아 있다.

 

건호는 진천이 고향이다. 나하고 아주 잘 맞아서 고등학교에 간 뒤에도 오래 연락을 주고받았다. 공부도 나하고 엇비슷하게 잘 했고 성격이 털털한 것이 좋았다. 청주에 와서 할머님이 밥을 해주다가 나중에는 종칠이 누님 댁에서 하숙도 조금 했고, 막바지에는 우리 고모 댁에서 두어 달 같이 있기도 했었다.

 

종칠이는 청주가 고향으로 형제가 아홉이나 되는 대가족이었다. 학원에 다닐 때는 누님 댁에 있어서 우리가 거기로 많이 놀러 다녔다. 청주공고에 들어가서 한동안 연락을 취하다가 이젠 연락처가 끊기고 말았다.

 

상진이는 조치원 부근 강외면이 고향이었다. 키가 작고 두루뭉수리하게 생겨서 귀여웠다. 공부는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우리하고 잘 어울려 돌아다녔다. 상진이는 나중에 조치원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아마 내가 청주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이 친구들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가깝게 지낼 거다. 그런데 나는 생각지도 않게 학교를 홍성으로 오게 되었다. 나와 건호는 청주고등학교에 시험을 쳤다. 지난해보다 실력이 월등히 늘었다고 자신했고 모의고사 성적으로 보면 청주고등학교에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때에 우리 학원에서 청주고등학교에 시험을 친 아이가 우리 둘을 포함해서 넷인가 밖에 안 되었다. 그만큼 우리는 학원에서도 인정받는 실력이었다. 그러나 자신 있게 시험을 치기는 했지만 둘 다 청주고에 합격하지는 못 했다.

 

졸업하던 해에 전기와 후기에서 떨어지고, 재수해서 다시 전기에 떨어졌으니 고등학교 시험에서만 세 번을 떨어진 거였다. 그랬어도 후기인 충북고등학교는 충분히 갈 수 있으리라고 믿어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당시 분위기로는 충북고등학교에만 가도 썩 공부를 잘한 학생으로 인정을 받을 때였다. 충북고등학교에 원서를 내어 놓고 다시 시험 준비를 하느라 설도 청주에서 쇠기로 했다. 설이 지나고 며칠 뒤에 시험이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이 하루하루 다가오자 정말 긴장이 되었다. 더 이상 떨어지면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국민투표가 결정이 되어 시험 보는 날이 뒤로 며칠 연기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유신헌법 존속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여 다른 일정들은 다 뒤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국민투표 때문에 시험이 연기되자 긴장이 풀렸고, 나는 설을 쇠기 위해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설을 쇠며 친구들을 만났더니 다들 나더러 청주에 가는 것보다 홍성으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그러지 않아도 누나가 홍성 홍주고등학교에 원서를 내어놔서 가서 시험만 보면 된다는 거였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아닌 게 아니라 어머니 혼자 계신데 내가 청주에 가서 학교를 다니면 1년에 겨우 몇 번 집에 올 것이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홍주고등학교에 시험을 치기로 하고 충북고등학교를 포기했다.

 

그렇게 된 것이 충북고등학교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였는지 아니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지금도 판단이 서지는 않는다. 그때 내가 솔깃했던 말은 나중에 국회의원을 출마하더라도 고향에서 학교를 나오는 것이 낫지 않느냐?’ 는 거였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나는 정치인으로 크게 나갈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충북고에 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것은 솔직한 심정이다. 만약 그때 내가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충북대학교로 진학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청주에서는 공부를 아주 잘 하면 서울로 갔지만 웬만큼 잘 하면 다 충북대학교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충북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지금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은 아니지만 내가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더라면 지금의 생활근거지도 청주였을 거라는 생각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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