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운명이었는지

2012. 3. 25. 17:03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나는 운명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인연이라는 말은 자주 쓴다. 세상에 아무 인연(因緣)없이 우연으로 되는 일은 없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다 인연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때는 인연처럼 보였던 것이 우연으로 끝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우연으로 알았던 것이 인연으로 자리를 잡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한다면 내가 홍주고등학교를 간 것은 나와 학교간의 인연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갑자기 생겼던 국민투표가 없었다면 집으로 설을 쇠러 오지 않았을 것이고 집에 오지 않았다면 홍성으로 학교 갈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였다.

 

내가 왜 홍성고등학교에 가기를 꺼려했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다. 이상하게도 거기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홍성고등학교로 시험을 쳤더라면 충분히 합격을 하였을 것이라고 지금도 확신한다. 나보다 공부를 많이 못하던 친구들도 홍성고등학교에 갔고, 내 모의고사 성적으로 본다면 홍성고등학교 정도는 합격을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거기는 가고 싶지 않았다.

 

홍주고등학교는 내가 2회 졸업생이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갈 적에는 3학년이 없었다. 홍성에는 역사가 제법 깊은 고등학교가 남고와 여고 둘이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반에 갑자기 사립인 홍주고등학교가 개교를 하였다.

 

그 무렵에 광천에는 광천고등학교가 들어섰고, 삽교에는 삽교고등학교도 생겼다. 이렇게 고등학교가 늘어나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출생률이 갑자기 늘어났던 데다가 교육에 대한 열의가 꽃 피기 시작하여 1957년생들부터 고등학교 진학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었다.

 

홍주고등학교를 세운 분은 홍성에서 사업을 하시던 고() 전용갑 님이시다. 전용갑 님은 장곡 천태리 쪽에서 탄광을 하여 홍성에서 연탄공장을 운영하셨다고 들었다. 학교 다닐 때에 듣기로는 신문도 제대로 읽으실 줄 모르는 무식한 분이라고 했었다. 그런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지만 운전기사가 보니까 신문을 거꾸로 들고 읽더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래도 홍성에서는 알아주시는 유지였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 문과 수석으로 이사장상을 받았어도 솔직히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고등학교 총동문체육대회가 있어서 갔다가 이사장님의 연설을 제대로 들을 기회가 있어서 듣고는 많이 놀랐다. 인재양성을 위해서 홍주고등학교를 세우셨다는 이사장님의 말씀은 내가 다른 데서 들은 어떤 학교 이사장님보다도 훨씬 가슴에 와 닿았다. 괜히 학생들 사이에서 떠돌던 얘기는 다 웃기려고 만들어 낸 거가 분명했다.

 

처음에, 고등학교에 가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1년을 늦게 갔기 때문에 중학교 동창들은 벌써 다 2학년이고, 1년 후배들이 같은 1학년이 되어 어색했다. 중학교 후배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거기서 내가 선배라고 티를 낼 일은 아니었다. 먼저 알고 인사를 하면 받을 정도였지 같은 학년이 되어가지고 낯 뜨겁게 선후배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광천에서 홍성으로 통학을 했다. 누나와 막내아우가 광천에서 자취를 하고 있어서 나도 거기 합류했고 광천에서 홍성은 버스로 40분 거리라 버스로 다니는 것이 어렵지가 않았다. 홍성에는 우리 홍주고와 홍성고, 홍성여고가 있어서 광천에서 버스로 통학을 하는 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등교시간에 맞는 버스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버스는 늘 콩나물시루와 같았다.

 

나는 광천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기 때문에 조금만 일찍 나가면 늘 자리에 앉을 수 있다. 광천에서 처음 출발할 때는 그래도 널널하게 간다. 버스는 가면서 백동, 신곡, 지정리, 상황리, 마온 등에서 아이들을 계속 태우니까 나중에는 꽉 차서 발을 디딜 틈이 없다. 그럴 때 기사가 버스를 좌우로 틀다가 급정거를 하면 공간이 생겨 학생들이 또 탈 수 있었다.

 

그 버스에 늦게 타서 힘들게 다니는 아이들 둘이 우리 반에 있었다. 용인이와 대웅이다. 용인이는 광천중학교를 나왔고 대웅이는 광흥중학교를 나온 후배였다. 광천에서 통학을 하는 아이가 우리 셋이었으므로 늘 같이 다녔다.

 

용인이는 대전고등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진 아이였다. 나보다 훨씬 어린 것 같았고 온순하고 말이 없었다. 대웅이는 중학교 때부터 나를 알던 사이라 내게 예의를 지키려 신경을 썼고 나도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버스에서 가끔 만나는 아이들 중에 우리 반이어서 알게 된 것이 천범이와 정재다.

천범이는 결성중학교를 나왔고, 정재는 화성중학교를 나왔다. 천범이는 집이 결성이었고, 정재는 청양 화성이었다. 둘 다 처음부터 알고 지낸 것은 아니지만 가끔 토요일에 집으로 갈 때 같은 버스를 타고 광천까지 다니게 되어 가깝게 된 사이다. 천범이나 정재 둘 다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내가 먼저 가까이 하려고 노력했다. 말이 없어도 하는 행동들이 진득해서 좋았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종만이는 홍성중학교를 나와 대전고등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진 아이다. 우리 반에 1등으로 들어왔고 반장을 했다. 나는 2등이었고 대의원을 했다. 종만이와 가까워진 것은 학급환경미화 준비를 하면서인데 고등학교 1학년 치고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조금 특이했다.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포기한 것도 아닌,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딘가 이상하게 생각할 아이였다. 그래도 종만이는 나하고는 잘 어울린 편이다.

 

종만이는 나중에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전학을 갔다.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고, 나중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와서 만났다. 쌍문동인가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린 둘 다 대학에 떨어진 상태에서 만났고 창경원에 같이 갔었다. 나중에 술에 취해 종만이네 집에 가서 잠을 잤다. 아버님이 공무원이셨다고 들은 것 같다. 그 때 만나고는 소식이 끊기어 만나지 못했다.

 

2학년이 되어 만나게 된 친구가 후성이와 재진이다. 반이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 용인이는 다른 반으로 갔지만 우린 대부분 문과여서 그대로 올라갔고, 거기에 다른 반에 있던 재진이와 후성이가 합류했다. 후성이는 나와 같은 동네의 초등학교 1년 후배로 홍성 누님 댁에서 학교를 다녔고, 재진이는 당진 출신으로 광천 누님 댁에서 홍성으로 통학을 하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시골 변두리 출신의 미미한 존재였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처음부터 잘 나갈 수 있었다. 420명을 뽑는 시험에서 합격한 아이들 중에 내가 4등으로 들어갔던 덕에 공부 좀 하는 학생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홍주고등학교에 입학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전기에서 홍성고등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진 아이들이었다. 그 중에는 홍성고등학교보다 더 높은 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져서 온 학생들도 여럿 있었는데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안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나이가 다른 동기들보다 두 살이나 더 먹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시험을 봐서 전체 3등 밖으로 나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재수생인데다가 공부도 잘 한다는 것이 인정을 받아서 선생님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아이들도 잘 따랐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가 3년을 같이 한 친구가 천범이, 정재, 대웅이, 순흥이였고, 2학년 때부터 같이 한 반으로 된 친구가 재진이, 후성이다. 그리고 1학년 때만 같은 반이었던 것은 용인이다. 우리는 문과였고 용인이만 이과였다.

 

내가 무슨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모임을 가지려고 만든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어울리기 시작한 여덟 명은 다른 학생들이 보면 조금 이상하다 할 정도로 뭉쳐서 놀았다. 내가 나이를 더 먹어서 리더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나 때문만은 아니고 서로가 다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방학 때가 되면 친구네 집에 돌아가며 놀러 다녔다. 맨 처음에 갔던 것이 결성 천범이네 집이다. 우리가 처음 갔을 때, 천범이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난다.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려 말고, 있는 친구를 잘 지키라는 당부셨다. 나는 지금도 이 말씀을 기억한다. 친구를 많이 사귀려하기보다는 진실한 친구가 되게 노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 여덟 말고도 내가 자주 어울린 친구가 용대, 환섭이, 기석이, 세호다. 이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았지만 나하고도 아주 가깝게 지냈다. 용대, 기석이는 결성이었고, 환섭이는 서부, 세호는 천북이었다. 나는 용대와 환섭이네 집에도 자주 다녔다.

 

초등학교·중학교 친구는 같은 동네 개념이 크지만 고등학교만 해도 같은 마을 친구는 아니다. 넓게 보면 다 충청도이고 홍성 근방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려서 자란 친구들과는 다른 것이 고등학교 친구라고 생각한다. 더 많이 알고 가깝게 지낸 친구도 많지만 우리는 고등학교에서 만나 수십 년을 함께 가까이 지내고 있다.

 

친구들하고 모임을 가질 때에 집식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이다. 주로 결성에서 모이지만 식구들이 다 같이 만나서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그리고 애들은 애들대로 끼리끼리 모여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닐 거다.

 

이게 다 홍주고등학교에서 얻은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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