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새끼인 줄 알았으나

2012. 3. 25. 17:15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학생은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 중학교 때 일이다. 어디선가에서 얘기한 적이 있지만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재수학원이나 군 생활까지 포함한 공동체 생활에서 아웃사이더가 되었던 것은 중학교 때가 유일하다. 중학교에서 주류가 못 되고 비주류가 되었던 근본적 이유는 내가 공부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광흥중학교까지는 이십 리 가까운 거리였다. 보통 사람의 걸음으로 십 리를 걷는데 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통학하는 학생의 걸음으로는 십 리를 걸을 때 40분 정도 걸린다. 집에서 광천 입구까지는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지만 학교까지는 한 시간 10분이 족히 걸렸다. 그냥 천천히 걷는 걸음이 아니라 빠르게 걸어야 그 정도였다.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는 늘 뛰어서 다녔다. 시계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길 위에 다른 학생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래서 남보다 일찍 나와도 뛰고 늦게 나와도 뛸 수밖에 없었다. 아마 3년을 그렇게 뛰어다녔더라면 어디 가서 달리기에 빠지지 않았을 거였다.

 

광천입구까지는 경후, 기종이하고 늘 같이 다녔다. 경후와 기종이는 광천중학교였고, 우리 동네에서 선교와 길순이가 나와 같은 광흥중학교였지만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늘 셋이 만나서 같이 갔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올 때도 광천 다리목에서 만나 같이 오곤 했다. 우리 위로는 광천으로 중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나 우리 때부터는 많이 늘어서 이른 아침에 보면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마을마다 떼를 지어 나오곤 했다.

 

이른 새벽에 밥을 먹고 나와서 한 시간 넘게 걸어 다녔으니 학교에 가면 졸기 일쑤였고, 다시 끝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잠을 자도 늘 피곤했다. 장거리 통학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알지 못하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가 오면 비를 꼬박 맞고 다녀야 했고, 추위와 더위 속에서 장거리를 다니니 공부할 틈이 없었다.

 

솔직히 이것은 변명이다. 나는 그래도 1학년 2학기부터 광천에서 직장에 다니는 누나와 자취를 했으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소가 웃을 일인 줄은 스스로 안다. 하지만 처음에 그렇게 시작한 것이 환경이 바뀌어도 크게 변하질 않았다. 6학년 2학기부터 공부를 않고 노는 일에 빠져 있던 터라 중학교에 가서도 노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우수반에 들어가서 처음엔 10등쯤 했었다. 그러고는 점점 뒤로 쳐진 것이다. 우수반에서 떨어진 적은 없지만 성적은 아주 안 좋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인정받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독서였다. 비록 학교 공부는 별로였어도 많은 책을 읽어 수업시간에 답변 같은 것은 아주 잘 했기 때문이다.

 

나만이 아니고 우리 반에는 독서광들이 몇 명 있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시켜놓으면 서로 자기 의견을 옳다고 주장하여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갑론을박을 했다.

 

내가 학교에서 미운 오리새끼가 되었던 것은 말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돈을 걷는 것에 대해 자주 따지다가 교무실에 불려갈 때가 많았고, 가서 많이 맞았다.

 

더러 다른 곳을 시험 쳤다가 떨어진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광천중학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진 학생들이라 광천중학교에 비해 실력도 많이 떨어지고, 부모들도 학교에 관심이 없었다. 학교 선생님들도 애들을 열심히 가르쳐서 새롭게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현상유지만 하면 되는 학교였다. 그러다가 무시험으로 광천중학교와 똑같이 학생을 받게 되었으니 호박이 덩굴째 온 것이 아니라 밭으로 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거였다.

 

처음에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교실에 흙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진입로가 포장이 안 되어 있고. 교사(校舍)밖은 전부 흙이었으니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흙이 따라 들어 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와서 본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나 학교에서는 보도블록을 깔고 시멘트로 포장을 하고 해서 조금 나아졌다. 교장 선생님 성함이 전도진이셨는데 별명이 돈도진으로 통했다. 그때엔 온갖 잡부금이 많을 때라 툭하면 돈을 걷었다.

 

우리가 2학년 때에 학교에서 종합예술제라고 하여 연극을 한 적이 있다. 어떻게 계획이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광천극장을 빌려서 춘향전을 공연했다. 미술선생님과 음악선생님이 지휘감독을 했던 것 같고, 학생들이 배역을 맡아서 했다. 그런데 이 종합예술제공연비로 모든 학생들에게 800원씩을 갹출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 자장면 한 그릇이 80원 정도 했고 광천극장 입장료가 70원 하던 때이니 800원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나는 애들에게 돈을 내지 말라고 선동했고 끝까지 내지 않았다. 끝까지 안 내고 싶었지만 나중에 고등학교 원서를 쓸 때에 그 돈을 안내면 원서를 안 써준다고 해서 낼 수밖에 없었다. 나 혼자서 버틴 것은 아니고 동조한 아이들이 여럿 있지만 내가 주동자로 몰려서 핍박을 많이 받았다.

 

2학년 겨울방학에는 보충수업을 하지도 않고는 보충수업비 고지서를 발급해서 교무실에 가서 따지다가 따귀만 얻어맞고 왔다. 우리 학교에 나와 같은 항렬의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나를 담임을 한 적이 없지만 그분에게 가장 많이 맞았다.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고 다녔는지는 모르지만 교실에 가서 ‘1반 이영주 때문에 봄 방학 때 보충수업을 하게 되었다고 얘기해서 다른 반에서 노는 아이들이 내게 찾아왔었다. 학교에서는 겨울 방학에 하지 않은 보충수업을 봄 방학에 하고 보충 수업료를 받겠다는 얘기였다. 그러니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냥 돈만 내면 될 것을 내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나를 때려주러 온 거였다.

 

엉뚱하게 몰매를 맞을 뻔했으나 다행히 우리 반 명남이가 명확하게 설명을 해서 일은 번지지 않고 끝났다. 보충수업을 하지 않았으니 돈을 내지 않아야 된다고 한 것이 뭐가 잘못된 것이냐는 명남이의 역성에 애들이 그냥 돌아갔다. 나는 봄방학에 한다는 보충수업에 안 나갔고 돈을 낸 기억도 없다.

 

비록 성적은 좋지 않았어도 나는 여기 저기 빠지지 않고 껴들어서 아이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교에서 어긋난 일을 하면 가만히 있지 않고 꼭 나서서 한마디 거들었다. 이런 일이 그전까지는 없던 터라 선생님들도 당황스러웠겠지만 나도 그렇게 나서보기는 중학교 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내가 미운 오리새끼라고 생각했다. 비록 당장은 미움을 받더라도 언젠가 백조가 되서 보란 듯이 날게 될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백조가 되지 못하고 그냥 오리에 머무르고 말았다. 동화에서는 오리가 백조가 될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오리는 처음부터 오리고 백조 또한 처음부터 백조였다.

 

나야 원래 오리였으니 백조가 되고자한 것은 나의 착각이라 하더라도 우리 학교, 우리 반에는 백조가 될 만한 오리새끼들이 많이 있었다. 그 오리새끼들에게 꿈을 주고 용기를 주어 잘 키웠더라면 백조는 아니더라도 기러기는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공주사대부고를 떨어지고 청주에서 재수를 했다. 1년 열심히 공부를 한 뒤에 청주고에 시험을 쳤다가 또 떨어지고 다시 충북고 원서를 쓰러 누나가 학교에 찾아갔더니 재수생 원서를 담당한 선생님이, 내 이름을 보더니 얘는 공부할 아이가 아닌데 왜 재수를 시켰느냐?’라고 물어서 누나가 무척 황당했었다고 들었다. 그게 어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하실 말씀인가?

 

지금 와서 누구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 학교에 딱 한번 찾아갔었다. 고등학교에 낼 생활기록부를 떼러 갔었다. 교무실에 찾아가서 인사를 해도 우리 담임선생님 외는 반갑게 맞아주는 분이 없었다. 그날 교문을 나오면서 다시는 이 학교에 발걸음 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모교지만 다시는 찾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