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을 나온 개구리

2012. 3. 25. 17:17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광천에는 중학교가 셋이 있었다. 충남 서부지역에서는 명문으로 이름을 얻고 있는 광천중학교와 거기에 떨어진 아이들이 가는 후기인 사립 광흥중학교, 그리고 그 둘보다 규모가 작은 삼육중학교였다. 삼육중학교는 종교재단에서 세운 학교로 광천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가보지는 못했다.

어렸을 때라 세상을 많이 알지 못했긴 하나 당시에 광천중학교는 상당히 이름이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지역에서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들은 대전중학교, 혹은 공주사대부중으로 갔고, 웬만큼 잘 하면 다 광천중학교로 갔다.

 

그 당시에는 광천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공부를 잘 한 학생으로 인정을 받을 정도였으니 다들 광천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홍성중학교도 공립으로 이름이 났었지만 우리에게는 광천중학교가 더 나은 곳으로 인식되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중학교에 진학을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중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집안 형편이 그래도 좀 넉넉해야 했고, 공부도 잘 하는 축에 속해야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광천중학교에 합격할 정도는 되어야 했는데 우리 동네에서 광천중학교에 다닌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광천중학교에서 떨어지면 광흥중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으나 그런 경우는 대부분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광흥중학교는 똥통 학교로 불렸다. 윗집에 주보 형이 광흥중학교에 다닐 때, 툭하면 똥통 학교 다닌다고 놀려주고는 도망을 다녔다. 그 학교에 내가 가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을 못했으나 나는 광흥중학교로 배정을 받아 똥통 학교인 광흥중학교 학생이 되고 말았다.

 

우리 1년 선배까지는 중학교도 시험을 쳐서 진학을 했었다. 당시에 오서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될 선배들이 광천중학교에 열두 명인가 합격을 하여 동네가 잔치분위기였던 것을 기억한다. 6학년 담임선생님이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시험을 볼 학생들을 지도해줬고, 또 모두 열심히들 공부하여 시험에 응시했던 학생 대부분이 합격을 했다. 그 바람에 동네 어른들이 우리 2회 담임도 그 선생님께 맡겨야 한다고 학교를 들락거리기도 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지방 신문에 기사가 날만한 일이었다.

 

우리부터는 중학교 진학이 시험이 아니고 배정으로 바뀌었다. 너무 일찍부터 입시에 대한 부담을 주어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진학을 원하는 아이들은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로 추첨을 통해 배정을 받도록 했다. 이런 입시제도의 변경과 조금씩 나아지는 생활환경 덕에 우리 동기들부터는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이 부쩍 늘었다.

 

우리가 중학교에 갈 때는 광천중학교에 남자 네 반, 여자 네 반이, 광흥중학교에는 남자 네 반, 여자 한 반으로 배정되었다. 광천에 광천여중이 들어선 것은 우리 1년 후배부터여서 광천중학교나 광흥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가 우리 다음부터는 남자만 가는 중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우리가 배정을 받을 학교 추첨은 광천중학교에서 했다. 진학원서를 낸 모든 학생들이 광천중학교에 가서 자기가 다닐 학교를 스스로 추첨했다. 그때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애들과 함께 가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광천중학교는 큰길가에 있어 아이들끼리만 가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추첨은 오전에 있었다. 가서 보니 둥근 물레 같은 통속에 은행 알보다 조금 굵은 구슬이 들어 있고 본인이 그 물레를 두 바퀴인가 돌려, 거기서 아래로 떨어지는 구슬을 들어 구슬에 찍힌 번호를 확인하고 원서에 기재하는 방식이었다.

 

여자들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남자들은 두 학교에 똑 같이 네 반씩 배정이니 양쪽 학교에 같은 숫자로 배정이 되어 번호가 1번 아니면 2번이었다. 자기가 돌린 물레에서 나온 번호는 즉석에서 알 수 있지만 어느 번호가 광천중학교이고 광흥중학교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2번이 나왔다. 추첨이 끝난 뒤에는 학교가 확정될 때까지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거기에 온 수백 명의 학생과 그 부모, 친인척까지 모두 바라는 것은 광천중학교였고, 광흥중학교를 바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당시에 광흥중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도 자기 아들이 광흥중학교에 배정되기를 바란 분은 정말 없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추첨은 오전에 일찍 끝났지만 자기 번호가 어느 학교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종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같이 간 친구들과 점심을 사 먹으며 지루하게 발표를 기다렸다. 별 것도 아닌 것을 저녁때가 되서야 발표를 했는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다. 1번이 광천중학교였고, 2번이 광흥중학교였다. 나는 2번을 받았으니 광흥중학교로 배정이 된 거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내가 정말 날벼락을 맞은 심정이었다.

 

그때의 실망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광흥중학교로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었다. 시험을 보지 않고 추첨으로 배정하게 만든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우리 오서에서 간 아이들은 30여 명이었는데 거의 반반으로 양쪽 중학교로 갈렸다.

 

심심하면 주보 형더러 똥통 학교에 다닌다고 놀려댔더니 그 인과인지 나도 똥통 학교에 다니게 된 거였다. 나중에 왜 똥통 학교인지 알 수 있었다. 화장실이 차면 농업시간에 그것을 학생들이 직접 똥통으로 퍼내었다. 집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을 학교에서는 할 수밖에 없었다.

 

광흥중학교는 우리 집에서 가려면 광천중학교보다 10분은 더 먼 곳에 있어 그것도 힘이 들었고, 학교에 들어가는 진입로가 포장이 안 되어 비만 오면 운동화가 벗겨졌다.

 

교실은 복식(複式)인데다가 바닥은 시멘트였다. 교실바닥이 시멘트인 것은 오서초등학교에서만 보았을 뿐 대부분 학교는 교실바닥이 나무가 아니면 인조석을 갈아 닦은 바닥이라 물이 스며들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런데 중학교 교실바닥이 그냥 시멘트여서 청소를 할 때면 흙먼지가 얼마나 날리는지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시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학교에 계시는 선생님들도 고정으로 계신 몇 분만 빼고는 1년을 채우고 가는 분이 많지 않았다. 어떤 때는 한 학기에 담당과목 선생님이 두세 번 바뀐 적도 있었다. 그냥 자리가 있다니까 오셨다가 조금 지나서 더 좋은 곳이 있으면 가버리는 것이 학교 풍토였다.

 

고향이 광천 부근이신 분들은 그냥 눌러 계셨지만 타지에서 오신 분들은 우리 학교에 오래 계실 이유도 없었고 선생님들에 대한 대우도 무척 열악했었던 모양이다. 애들이 따르고 좋아하는 선생님 중에는 오래 계신 분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보다 선배들은 전기 시험에서 떨어지고 후기로 왔으니 광천중학교와는 실력이 비교가 안 되었지만 우리 동기들은 광천중학교에 비해 실력이 더 났다는 거였다. 뒤의 후배들은 모르지만 우리 광흥중학교 동기 중에는 각 초등학교에서 날리던 아이들이 대거 들어왔기 때문이다.

 

광동, 덕명, 장곡, 오서, 대평, 광신, 광남, 은하, 천북 등 아홉 학교의 대표 학생 중 한 곳을 제외한 여덟 학교의 대표들이 광흥중학교로 와 시험을 쳐서 선발한 우수 반에 모였다. 나도 거기에 낄 정도는 되었지만 사실 나는 그때서야 우물을 나온 개구리였다.

 

광천중학교로 갔다고 해서 내 운명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다. 난 내가 광흥중학교를 나온 것에 아쉬움을 두었던 적은 없다. 다만 우수한 학생을 대거 받아놓고도 제대로 진학지도를 못한 학교의 처사는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나야 열심히 하지 않고 도중에 낙오한 학생이라고 스스로 인정하지만 우리 동기 중에는 뛰어난 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그런 우수한 아이들을 지도해 본 적이 없는 학교였으니 좋은 인재를 가지고도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던 거다. 나는 그렇게 좋은 친구들에게는 못 미치지만 그런 친구들과 함께 공부한 것이 자랑스럽다.

 

나는 중학교 때만 아웃사이더였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하지 않고 늘 무협지만 끼고 살았다. 중학교 다닐 적에 상을 받아 본 적이 딱 한번 있는데 그게 독서를 많이 했다고 준 상이다. 다른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많이 보았다는 책이 대부분 무협지였다. 도서관에 무협지가 그렇게 많았던 학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예를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학교에 오래 계신 선생님들로부터는 좋은 얘기를 못 들었어도 왔다가 이내 떠나간 선생님들에게는 귀여움을 받았다. 나는 중학교 시절에 국어와 국사, 사회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자신했고, 이것은 다른 친구도 다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우리 광흥중학교에 여자 동창이 한 반 있었지만 졸업할 때까지 알고 지낸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근래에 광흥중학교 21기 동창회에 얼굴을 내밀면서 여자 동창들을 만난다. 나는 중학교 동창 모임에는 통 나가지 않았었다.

 

초등학교나 고등학교 때는 그런대로 잘 나갔기 때문에 모교의 일이라면 모른 체할 수가 없어서 나가지만 중학교 때는 별 볼일이 없는 학생으로 지내서 학교 모임에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을 했었다.

 

더러 개인적으로 만나는 친구들은 있어도 동창회에는 전혀 나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좋은 친구들이 계속 포기하지 않고 연락을 해줘서 요즘은 가끔 나간다. 이젠 다 오십 줄에 들어서고 있는 동창들을 만나서 옛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반갑기도 하고 예전에 열심히 못한 것을 지금이라도 보충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