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코는 어떤 모습일까?

2012. 3. 25. 17:20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이라는 수필집을 자주 본다. 인연속에는 주옥같은 수필들이 많이 들어 있지만 그래도 가장 재미있게 읽는 것은 역시 인연으로 이 수필은 언제 봐도 그리움이 남곤 한다. 인연은 예전엔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려 있어 아이들과 수업을 한 적도 있는 아주 익숙한 수필이다.

 

중학교 책에 나오는 소나기는 소설이고, 윤 초시네 증손녀인 소녀가 죽으면서 이야기가 끝나지만 인연은 수필인데다가 거기 나오는 아사코는 지금도 살아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직도 진행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인연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인연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아사코가 어떻게 생겼을까가 무척 궁금했다. 일본 사람을 많이 보지 못해 더 그랬을 거다.

 

어려서는 스위트피처럼 어리고 귀여운 꽃 같았고, 자라서는 청순하고 세련된 목련꽃을 닮았다는 아사코. 아사코는 이미 피 선생님의 연인만이 아니다. 비록 세 번째의 만남에서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을 본 뒤에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는 회상을 하셨지만 그런 피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좋아하거나 좋아했던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만나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예쁘고 귀여운 여자를 좋아한다. 말로야 마음이 예뻐야 한다고 하지만 얼굴이 예쁘지 않으면 마음도 예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얼굴이 예쁘지 않고 마음이 예쁜 여자가 있다고 해도 마음이 예쁜지를 알 수가 없으니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을 거다. 나이를 먹으면서 얼굴이 예쁜 것은 다 허상(虛像)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어려서는 얼굴이 예쁜 여자가 마음도 예쁠 거라 생각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TV를 보지 못했다. 어쩌다가 방학이 되거나 해서 서울 외삼촌댁에 가서 보면 TV에 나오는 내 또래의 탤런트들은 하나같이 예뻤다. 나는 그런 탤런트들을 보면서 아사코가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우리나라에서 하이틴영화라는 것이 붐을 이룬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우정과 사랑 이야기를 다룬 것이 주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유치하고 어설픈 것들이었으나 나도 그런 영화에 열광했었다. 아마 소나기인연의 연장선상에서 그런 영화들이 청소년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지 않았나 싶다.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여자 친구가 없었다. 아니 여자 친구가 아니라 친척 말고는 알고 지내는 여자아이도 없었다. 아마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더 신비롭고 아름다워 보였는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여자와 알고 지냈다면 책 속에서 본 여자를 신비롭게 생각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일본 영화를 일부러 보는 일은 없었으나 이와이 슌지(岩井俊二)가 감독한 러브레터는 두 번이나 보았다. 거기 나오는 여자 주인공 나카야마 미호(中山美穗)가 마음에 들어서다. 비록 대학생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카야마 미호를 보면서 청순한 모습의 대학생이었다는 아사코를 생각하곤 했다.

 

이와이 슌지의 또 다른 영화인 사월 이야기(四月物語)에 나오는 마츠 다카코(藤間隆子)의 모습도 청순하긴 했지만 아사코의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사코를 고등학교 때 보았으면 역시 러브레터에 나왔던 사카이 미키(酒井美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봤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사람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사람과 사람의 공간적 거리감을 무한정으로 가깝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자라서 고향을 떠나면 다시 보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휴대폰과 인터넷의 보급으로 어느 때고 어디든 연락이 가능하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찾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보고 싶고 궁금한 사람들을 다 찾아보면 좋을 것 같지만 때로는 모르고 지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피 선생님의 말씀처럼 어떤 때는 마음에만 간직한 사람도 있으면 좋을 거 같다.

 

별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헤어졌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함이요, 만나는 것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역설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만났다고 다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해서 떠나보낸 적도 있지만, 나로 인해 상처를 안고 가버린 사람도 있다. 아직 철이 들려면 멀었지만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을 생각해 본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저녁에

 

 

나는 이 시를 무척 좋아한다. 김광섭 선생님은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셨다고 하는데 내가 거기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퇴임하신 뒤여서 직접 뵙지는 못했다.

 

직접 뵐 인연을 갖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지만 그분께서 거기 계셨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구절은 늘 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과제이다.

 

이 시에, 80년대 가수 유심초가 시의 내용을 조금 바꿔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노래를 만들었다. 노래가 쉽지 않아서 제대로 익히지는 못했지만 늘 입버릇처럼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붙이고 다녔다. 간절히 원하면 다 만날 수 있다고 하지만, 만나지는 못해도 그리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만났던 사람, 만나는 사람이 나중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그 많은 만남들이 내게 그리워할 수 있는 기쁨을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흐뭇하다. 내가 감히 피 선생님의 생각을 추측할 수는 없지만 선생님도 사람을 좋아하니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건방진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피 선생님이 구순이 넘으신 연세에 일본에서 인연을 일본어로 번역 출간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풍문에 들었다. 아사코가 지금 살아 있다면 반드시 인연을 읽으리라고 생각한다. 인연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을 그 당사자가 그 인연을 읽고는 어떻게 얘기할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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