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5. 17:29ㆍ시우 수필집/개갈 안나고 뜬금없는2(우물을 나온 개구리)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 대부분 믿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친구나 심지어 집사람까지도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결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에 취해 목숨을 잃을 번한 일도 있었으며, 어디 가서 술을 못 마신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많은 술을 마셔왔다. 어릴 때도 술을 많이 마시고 취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초등학교 때는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러 집에 와서 막걸리를 마셔 취한 채 학교에 간 적도 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친구를 만나면 의례히 술을 마셔야 되는 줄 알 정도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친구들과 집에 와서 밤 새워 술을 마시고 취한 채 학교에 갔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다는 거짓말로 조퇴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무렵에는 친구 하숙방에 가서 날마다 술을 마시고는 술병을 그 집 옷장 위에 집어넣었었다. 나중에 친구가 하숙집을 옮길 적에 옷장 위의 빈 술병을 치우다보니 사 홉 병이 수십 개가 되더라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군에 가서도 무척 많이 마셨다. 졸병시절엔 못 마셨지만 원주 제일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7사단 신병교육대 조교로 가서는 거의 매일 저녁 소주 4홉 한 병 정도는 마셨다. 같이 근무하던 고참들이 제발 술을 그만 마시자고 할 만큼 밤마다 소주를 사 날랐고, 우리가 고참이 되어서는 우리가 사다가 날마다 마셨다. 그러다가 한 겨울, 눈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쌓인 밤에 술에 취해 화장실에 갔다가 쓰러져 얼어 죽을 번한 일도 있었다. 훈련병이 없던 기간이라 생각보다 많이 마셨던 것 같다. 다행히 탄약고 근무를 나가던 다른 중대 군인들이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신고하여 죽지 않고 살았다.
대학에 다닐 때도 줄기차게 마셨다. 그 누가 나보다 더 많이 마실까 싶을 정도로 날마다 마시고 다녔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나와서도 여전히 많이 마신다.
나는 누가 술자리에 부르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거절하지 않는다. 또 사람들에게 술을 사는 것도 무척 즐겨한다. 술은 얻어 마시는 것보다 내가 살 때가 더 기분이 좋다.
흔히 날더러 애주가라고 한다
전혀 가당찮은 소리다
곧잘 나는 혼자서도 술을 마신다
그렇다고 애주가여서는 아니다
나는 밖에서 엔간히 술을 마시고도
집에 들어와 또 술을 마신다
그렇다고 애주가여서는 아니다
나는 구태여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애주가여서는 아니다
이참에 내 그대한테만 고백함세
그토록 내가 술을 마셔오는 건
단 한 마디의 말 때문이라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처음부터 두렵고 고통스런 말로
나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네
이 심약한 위인은 이를 어쩌지 못해
술로 피해 다니고 있는 거라네
아니 이참에 내 그대한테만 마저 다 고백함세
사실 그 말이 나를 붙들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이건 비밀일세
되레 내가 그 말을 놓칠까 겁이 나서
그래서 술을 마셔오고 있는 걸세
이런 나더러 애주가라니
-황순원, 「고백」
위의 시는 1984년 경희대 국문과 시화전을 할 때에 황순원 선생님께서 직접 써주신 시이다.
내 삶에서 황순원 선생님을 직접 뵙고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선생님은 소설가로 명성이 높으셨지만 어찌 이렇게 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까지 쓰실 수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 시는 내가 하고 싶은 말 그대로지만 나는 혼자서 마시거나, 밖에서 마시고 들어와 또 마시진 않는다. 내가 혼자서 술을 마시러 간 적은 딱 한번인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대학원에 시험을 쳤다가 떨어지고서였다. 만두와 순대를 파는 집이었는데 내가 너무 일찍 갔는지 안주가 준비가 되지 않아서 한 10분 기다리다가 너무 청승맞고 처량하여 그냥 슬그머니 나왔던 기억이 있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은 술이 좋아서라기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아서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술을 좋아해서 함께 마시기도 하고, 만나는 자리가 좋아서 마시기도 하고, 때로는 그 자리가 어색해서 마시기도 한다.
나는 술잔이 앞에 놓여 있으면 빨리 비우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이 들어서 빨리 잔을 비운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내가 술을 좋아하는 줄 알고 계속 잔을 권하고 술을 따라준다. 그러면 나는 계속 잔을 비울 수밖에 없다.
나는 안주 없는 술은 마시고 싶지 않다. 술은 싼 것을 마시더라도 안주만큼은 보다 고급으로 먹고 싶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안주를 가리지 않는다고 들었다. 또 좋은 안주가 있으면 술을 마신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그냥 좋은 안주를 놓고 좋은 사람과 마주 앉아 마시고 싶다.
나는 공인받은 식도락가는 아니지만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몸에 좋다거나 비싼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특이한 맛을 가진 것들을 좋아한다. 어느 무협지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음식을 잘 하는 요리사는 특별한 것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맞을 거다. 물론 좋은 재료로 만들어야 좋은 음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좋은 재료를 쓴다는 유명 음식점에 가서 흡족하게 먹은 적은 거의 없다. 나는 가격이 비싼 음식점에는 잘 가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유명하다는 곳은 한 번씩 들러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고인이 되신 백파 선생님 같은 그런 식도락기(食道樂記)를 나도 써 보고 싶다.
학교에서 소문이 나기를 ‘이영주는 여자를 좋아 한다’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는 여자를 더 좋아한다. 학교에 왔다가 간 계약직 교사 중에 남자교사보다 여자교사하고 술을 훨씬 더 많이 마셨다. 내가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들 중에는 여자가 훨씬 더 많은 게 사실이다.
대학 후배 중에도 남자후배보다 여자후배를 더 많이 만난다. 그러나 내가 만나는 사람은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다. 변명 같지만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기보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자위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많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라서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잊혀 진다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월이 가도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기억이 되기를 바란다. 나 또한 그들을 가급적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아직 깊은 사랑에 빠져보지 못했다. 많은 여자를 좋아하고 사랑했다고 생각하지만, 호사가들이 말하는 가슴 절절한 사랑이나 목숨 걸만큼 깊은 사랑에 빠져 본 적은 없다. 그냥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사랑하다가 헤어지고 잊는 것이 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늘 그것으로 족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비겁한 일이고 책임을 회피하는 거라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남에게 큰 아픔을 줄까봐 겁이 나고, 내게도 상처가 될까봐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래서 조금만 사랑하고 조금만 사랑을 받고 싶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헤아려보면 백 명은 넘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숫자는 갈수록 늘어날지도 모른다.
옛말에 ‘친구와 술은 묵은 것일수록 좋고 여자와 안주는 새것일수록 좋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오래된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다. 만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내가 만나는 여자들은 다 부담 없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나도 누구처럼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내가 싫어서 가는 사람에게 구차한 얘기로 하소연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의 진실은 언제든 알게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관계에 창의력을 불어넣는 것이며
갈등에서 일치하고자 주력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최고의 삶이며
최고의 삶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광고문에서,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사랑한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술을 마시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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