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선생님을 따라가시다

2012. 3. 26. 18:16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귀촉도. 사모님 소천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서정주. 귀촉도에서

 

 

 2018927일 목요일이었다.

 6교시 수업이 끝난 뒤에 교무실에 와보니 영희 선생으로부터 부재 중 전화가 와 있어 바로 전화를 했더니, 우리 선생님 사모님이 어제 별세했다는 부음을 전했다. 많이 울었다고 목소리가 영 안 좋았다. 영희 선생이 세세하게 얘기를 하지 못하고 울먹여서 길게 통화를 하지 못했다.

 

 나는 내일 조문을 가겠다고 영희 선생에게 얘기를 하고는 선생님 따님인 우리 양에게 전화를 했는데 우리 양도 경황이 없어서 두서가 없는 말을 해서 내일 가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에 와서 집사람에게 얘기했더니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안타까워하길래 내일 같이 조문을 가자고 했다.

 우리 선생님과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사모님과는 제대로 얘기조차 나눈 기억이 없었다. 내가 이럴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어서 내가 사모님 부음을 전해야 할 곳이 없었다.

 규범이가 서울에 있다면 알아서 다 할 것인데 규범이는 지금 중국 우한에 가 있어서 연락이나 받았는지 모른다. 우리 양과 주한이가 이제 40대 초반이니 집안 어른들과 장례절차를 알아서 잘할 거라고 위안을 삼았다.

 

 28일 금요일 낮에 영희 선생이 전화를 해서 30분 넘게 통화를 했다. 영희 선생은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사모님과 자주 통화를 하고 찾아뵙고 해서 다른 국문과 사람들보다는 사모님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나더러 내일 장지에 가자고 얘기를 하면서 사모님에 대한 안타까운 얘기를 계속 해서 통화가 길어진 거였다. 영희는 내일 장지에 간다고 했는데 나는 해마다 선생님 묘소에 세 번은 다니니까 내일은 가지 않고 그때 가서 인사를 하겠다고 했다.

 오후에 지형이가 전화를 해서 사모님의 부음을 전하기에 어제 소식 들었다고 얘기했다. 자기는 조문을 하고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내가 영희 선생에게서 이미 들었다고 얘기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순희에게는 알렸다. 순희가 선생님과 사모님 세례 이름을 알려주면 미사를 드리겠다고 해서 알려주었다.

 

 오후 여섯 시 반에 집사람과 함께 경희의료원으로 조문을 갔다. 예전에 서정범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그 적막하고 허전한 빈소가 생각이 나서 오늘도 그럴까봐 걱정을 하고 갔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아주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사모님 친정 분들과 선생님네 집안 분들이 웬만큼 있었고 우리 양이 근무하는 국제교류원 사람들 대여섯 명이 있었다. 거기서 최상진 형님을 만나 인사했다. 상진이 형님은 정년퇴임을 하신 것 같았고 이젠 국문과 동문회장의 직함으로 조화를 보낸 것이 빈소에 있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오래 앉아있기가 그래 얼마 안 머물고는 나오다가 전기호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부음을 알렸다. 국문과에만 연락이 되었고 선생님 지인들에게는 거의 연락이 되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전기호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선생님은 사모님 부음을 모르고 계셨다.

 

 나는 선생님과 가까웠을 뿐이지 사모님하고는 전혀 가깝지 않았다. 내가 대학 2학년 때부터 선생님을 모시고 온갖 추억을 만들며 선생님과 공유한 시간이 길었고 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언제 한 번 사모님께 따뜻한 말 한마디 들은 기억이 없다. 게다가 내가 선생님께 술을 너무 자주 대접한다고 못마땅한 말씀만 하셨지 언제 한 번 내게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

 나는 취하신 선생님을 모셔다 드리러 셀 수없이 선생님 댁 문 앞까지 갔지만 들어와서 차 한 잔 마시고 온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 댁에 가서 언제 밥 한 끼 대접받은 적도 없었다. 그래도 돌아가신 선생님과 사모님을 생각하니 여러 생각들이 많이 떠올랐다.

 

 우리 선생님과 사모님은 10년의 연세 차가 있었다. 사모님 외가가 선생님네 동네였다고 들었고 사모님 외조부가 우리 선생님을 무척 귀여워해 주셨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사모님은 수도여대 미술교육과를 나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늦은 나이에 우리 선생님과 결혼하셨다.

 우리 선생님은 집안이 어려워서 서울대에 합격을 해놓고도 4년 장학금을 보장해준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나오셨다. 경상도 상주에서 맨 손으로 올라와 혼자 공부를 하려니 무척 힘이 드셨을 것이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학원 강사로 학비를 벌면서 대학원을 다녔으니 쉽게 결혼할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중매로 만나신 것 같고 사모님과 결혼하셨을 적에는 방 한 칸 얻을 형편도 못되신 것 같았다. 사모님과 결혼하면서 사모님이 억척스레 살림을 하셔서 변두리 연립에 사시다가 잠실아파트로 이사를 하셨다. 사모님 본댁 형제들이 도움을 주고 알선해서 아파트를 분양받고 또 넓은 곳으로 이사를 하고 하면서 선생님네 재산 모든 것은 사모님이 다 일군 거였다.

 대학교수가 되면 무척 잘사는 줄로 아는 세상이지만 적어도 전임강사는 되어야 그나마 교수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대학교수 급여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것도 아니어서 사모님이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자들이 찾아와도 따뜻하게 대접할 정황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한다.

 

 우리 선생님이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한 마디 입 밖에 내지 않으셨는데 전주에 계신 박지연 선생님을 만나서는 사모님이 힘들게 생활해온 얘기를 하셨다고 해서 내가 많이 놀랐었다. 사모님이 그렇게 억척으로 생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선생님의 모습이 많이 위축이 되셨을 것이다.

 

 나는 솔직히 우리 선생님이 좋아서 따른 것이지 사모님하고는 정말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였다. 그래서 영희 선생처럼 슬픈 마음이 우러나질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사모님하고는 얘기를 나눈 적이 전혀 없었다. 선생님 돌아가시고 10년 되던 해 7월 말에 분당에서 수명이와 대희, 흥술이 등을 만나서 술을 마시다가 선생님 얘기가 나와 영희에게 사모님 전화번호를 물어 전화를 한 번 드린 적이 있다. 사모님 음성은 누가 들으면 너무 사무적이라고 할 것 같다. 그러니 전화를 드려도 말을 길게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사모님 음성은 언제 들어도 딱딱하다가 맞을 것이다. 이건 나뿐이 아니고 선생님 댁에 자주 갔던 사람이나 전화를 드렸던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기호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은 제자하고 전화를 해도 가족들의 안부를 다 묻는다고 쓰셨는데 사모님은 정말 사무적인 어투여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느낌이 냉랭하다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희 선생이 장지에 갔다가 거기 장례식에 온 사모님 조카며느리와 함께 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장례식에 선생님네 집안사람들이 아닌 사모님네 집안사람들이 주관을 하고 그쪽은 구경만 하는 형국이라 내 눈에는 그게 좋게 보이지가 않았었다. 모든 일을 우리 양 외삼촌이 주관하고 진행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영희 선생이 그날 저녁에 또 길게 얘기를 해서 사모님이 돌아가신 전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추석 명절이 지나고 사흘 뒤에 돌아가셨는데 명절에 아들과 딸, 사위, 손녀와 잘 보내시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다. 사모님은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도 성당의 일을 많이 보셨는데 돌아가신 뒤에는 더 성당의 일에 열중이셨다고 한다. 집에는 아들 주한이와 둘이 살고 계셨고 주한이야 늘 나가서 돌아다니니 사모님이 적적하게 지내셨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모님이 돌아가시던 날, 우리 양이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안 받으셔서 동생에게 전화를 했더니 자기가 나온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다고 하면서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도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두어 번 했고 안 받으셔서 남편하고 댁으로 갔더니 문이 잠겨 있어 열고 들어갔는데 주방에 수돗물이 나오고 있고 사모님은 쓰려져 계서 바로 119로 연락을 해서 모셔갔는데 이미 운명을 하신 뒤였다고 했다.

 

 선생님도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셨는데 사모님도 그랬다고 하면서 두 분이 같은 운명을 타고 나신 것 같다고 조카며느리가 얘기를 했다고 한다.

 영희 선생은 그 며느리가 두 분이 다 고독사(孤獨死)’를 하신 것이라고 했다고 하면서 어쩌면 그런 것 같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 말에 동조를 하면서도 마음이 무척 허망했다.

 

 흔히 얘기하기를 살만하면 죽는다.’고 한다. 정말 고생이 다 끝나고 이젠 행복을 누리면 된다고 할 때에 사람들은 그 행복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하고 소천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게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이고, 타고난 팔자라면 팔자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이젠 선생님에 대한 모든 것이 다 허망한 얘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