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6. 18:25ㆍ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능금, 돈키호태는 아니어도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나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에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김춘수, 「능금」에서,
호태는 국문과 83학번이다. 83학번 남학생 중에서 내가 졸업을 한 뒤에도 서로 연락하고 지낸 사람이 호태, 기윤이, 종수, 석영이인데 호태와 기윤이는 국문학과 동기면서 고등학교도 제천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드문 경우였다. 호태는 강원도 영월이 고향이고 기윤이는 충북 제천이 고향인데 둘이 같은 고등학교와 같은 학과를 다닌 거였다.
우리 국문과에 제천고등학교 출신이 여러 명이 있다. 81학번 태한이, 82학번 미희, 83학번 호태와 기윤이, 86학번 수이다. 미희하고 수이는 제천여고라고 호태가 강조하지만 나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우긴다. 전체 국문과 졸업생을 배출한 고등학교를 찾아본다면 달라지겠지만 80년대 학번에 다섯을 보낸 곳은 아주 드물 것이다.
호태는 신입생 때부터 나를 잘 따랐다. 덩치는 왜소하고 사투리가 좀 심한 편인 전형적인 ‘촌놈’이었다. 84년도에 국문과 학생들이 전공분야로 나뉘어 스터디를 할 적에 호태는 내가 속한 고전강독반에 들어와서 함께 했다. 호태는 평소에는 조용한 성격인데 언제 그렇게 파악을 했는지 자기네 동기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내가 놀란 적이 많다. 호태는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고 내가 묻지 않은 일에 대해서 먼저 말한 적이 없다. 그만큼 진중하다는 것인데 어떤 때는 답답할 정도였다.
내가 3학년 때 학회장에 출마를 했을 적에 호태가 2학년으로 부학회장에 출마를 했는데 나는 바로 당선이 되었지만 호태는 세 명 중에 과반수가 나오지 않아서 부학회장은 재선거를 하기로 했다가 그게 당시 상황에서는 어려워 결국 당선이 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호태는 85년에 휴학하고 군에 갔다가 88년에 복학을 하였다. 88년은 내가 이미 국문과를 떠나 직장에 다닐 때다. 88년 1월 1일에 우리 선생님 댁에 세배를 갔다가 선생님께서 며칠 여행을 갔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내가 80학번 익성이와 호태에게 연락을 해서 동의를 얻고 영일고 3학년 졸업반인 형희와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2박 3일 여정의 여행을 갔었다.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영월에 가서 내렸고 영월에서 장릉과 청령포를 거쳐서 진부에 가서 하루 자고 새벽에 상원사에 가는 버스를 타고 눈 쌓인 상원사와 월정사를 보고는 다시 동해안 속초로 가는 여정이었다. 속초에서 하루 자고 서울로 왔는데 나는 말로 하고 몸을 움직여서 하는 일은 호태가 다했다. 속초에서 서울로 오는 고속버스표를 미리 예매를 했는데 우리 선생님이 갑자기 속초에서 만나신 후배들과 술자리가 길어져 표를 두 번이나 바꿔야 했다. 그 과정에서 호태가 무척 애를 먹었는데 차 시간을 잘못 판단하여 표를 끊었다가 내게 핀잔을 크게 먹기도 했다.
어느 여행이든 많은 추억을 쌓게 마련인데 그 여행에서 나는 호태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정말 대학에서 만나 호형호제를 하는 몇 안 되는 친구가 되었다.
호태는 90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수원에 있는 매향여중으로 갔다. 이왕이면 서울이 나을 것 같은데 호태 본인이 괜찮다고 해서 내가 관여하지 않았다. 좀 낯 뜨거운 얘기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힘을 쓰면 누구를 어디에 보낼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던 때다. 그게 다 우리 선생님의 그늘 덕이었어도 남들이 나를 좀 좋게 봐주던 시절이었다.
호태는 매향여중에서 12년을 근무하고는 공립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다 옛날이야기지만 예전에는 사립학교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공립학교로 임용해주는 관례가 있었다. 그게 호태가 옮기고 나서 곧 없어졌으니 호태가 마지막 차를 탄 것이다.
호태는 붙임성이 좋아서 어딜 가도 누구하고나 다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다. 겉으로 보면 수줍음이 많은 것 같기도 한데 ‘절에 가서 새우젓을 얻어먹을 친구’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겉보기에는 유약한 것 같은데 속은 굳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 사람들이 호태에 대해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호태 덕에 83학번 기윤이와 종수, 석영이와 여러 차례 만났고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다 있을 때가 아니고 집 아니면 직장 전화로 연락을 하던 시절인데도 호태가 자주 연락을 했고 자리를 주선해서 좋은 만남을 가졌던 것이다. 기윤이와 종수, 석영이 주례를 우리 선생님이 하셨는데 호태는 사정이 있어서 많이 늦게 결혼식을 올려 선생님께서 마지막 선 주례가 호태 결혼식이었다.
호태가 결혼이 늦어진 것에 대해 선생님과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호태가 여학교에 있어서 그럴 거라고 하셨다. 남자 교사가 여학교에 있으면 결혼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도 하셨다. 나도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편인데 학교에서 착하고 예의바르고 예쁜 학생을 보면 그런 아이들에게 빠져서 자기가 결혼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호태는 그렇게 고르고 고르다가 10년 연하와 결혼을 하였다. 그래서 많이 늦어졌던 거였다.
기윤이와 호태는 둘 다 제천에서 결혼식을 올려서 기윤이 결혼식에는 호태가 선생님을 모시고 갔고, 호태 결혼식에는 기윤이가 선생님을 모시고 갔는데 내가 거기 살짝 끼여서 갔었다.
호태가 아내가 될 사람과 연애할 때는 내가 본 적이 없지만 얘기는 많이 들었다. 호태가 자랑을 많이 해서다. 호태의 아내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이 안 된다고 호태가 서둘러 다시 교육대학을 다녀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지금 호태 부부는 경기도 포천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국문과를 나온 많은 사람들이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선생님의 덕을 입었다고 생각한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는 말처럼 음으로 양으로 우리 선생님은 많은 제자들에게 도움을 주셨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이 선생님 그늘 안에서 지냈다. 그러나 호태는 우리 선생님의 덕을 본 제자는 아니었다. 호태가 매향여중에 갈 적에 선생님 도움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호태는 정성으로 선생님을 모셨다. 호태가 수원에 있을 적에 선생님이 민속촌 앞으로 이사를 하시어 자주 뵐 수 있었다.
호태가 만나는 83학번 동기들이 선생님을 자주 뵌 것도 호태가 주선한 일이고 내가 그 친구들과 여러 차례 자리를 한 것도 호태가 주선해서였다. 나는 늘 그게 고맙다.
호태는 공립학교로 자리를 옮긴 뒤에 여주에서 여러 해를 있었다. 여주에서 그 다음으로 간 곳이 포천이다. 호태는 여주에 있든 포천에 있든 선생님 기일에는 꼭 참석을 했다. 호태가 주선해서 종수하고 석영이도 계속 같이 참석을 했다. 나는 몸만 가는데 호태가 늘 제상에 올릴 제수를 준비해온다. 집에서 부부가 같이 준비한다고 들었다. 대단한 제수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처럼 포 하나와 소주 한 병을 들고 다니는 것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가 참배를 한 뒤에 묘 앞에 앉으면 선생님 생전의 얘기와 대학 다닐 때의 얘기로 꽃을 피운다. 웃고 떠들면서도 한 편으로는 또 가슴이 먹먹해진다. 호태는 늘 자기가 점심을 사겠다고 해서 나는 얻어먹기만 하고 와서 미안하다. 그런 말을 하면 예전에는 형님이 다 대셨다고 하는데 정말 그랬는지는 기억에 없다.
내가 몇 년 전부터는 이제 선생님 묘소에 다니는 일을 그만둬야지 생각이 들었다. 1월 1일, 5월 15일, 그리고 6월 15일 전후 등 세 번을 다니는데 버스로 다녀오면 네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이젠 그만 해야지 하다가도 호태가 미리 전화해서 ‘언제로 날을 잡을까요? 종수도 온다고 했습니다.’ 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러면서 그만 다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종수는 호태보다도 말이 더 적은 친구다. 언제 한 번 속을 터놓고 얘기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렇게 소극적인 종수와 지금까지 왕래가 있는 것은 호태가 중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인연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종수는 국문과에서 드물게 충남 청양 출신이다. 그게 다가 아니고 종수의 아내는 내 고등학교 동창의 동생이었다. 종수가 은행에 다녔고 은행에서 만난 아가씨와 결혼한다고 들었지만 그 아가씨를 본 적은 없었다. 종수가 결혼하던 날 결혼식장에 갔더니 거기 홍주고 동창이 정장을 입고 있어서 놀랐고 얘기를 들으니 신부 오빠라고 해서 또 놀랐다.
그 친구하고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내가 서울클럽 총무를 맡고 있던 시절에 대학로 예총회관에서 사진전을 할 때 몇 번 도움을 받았다. 그 친구는 외식업을 하는 곳에 다녀서 우리 행사가 있을 때마다 출장부페의 책임자로 현장에 와서 얼굴을 마주했었다. 그러니까 종수와 종수 아내는 다 청양이 고향인 사람들이었다.
종수는 선생님 기일에 늘 빠지지 않고 온다. 지금은 천안에 내려가 살고 있는데도 꼭 와서 같이 참배한다. 종수는 선생님 묘소에 올릴 술을 준비하는데 나처럼 소주가 아니라 독한 술을 가져와서 내가 늘 웃는다. 그 술을 마실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어 내가 취하게 되는 거였다.
전에는 석영이도 꼭 참석을 했는데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못 온다고 해 안타깝다. 석영이 병이 쉽게 나아지는 게 아니라고 해서 걱정이다. 그래서 요즘은 선생님 묘소에서 석영을 볼 수 없어 많이 걱정하고 있다.
내가 나이가 더 많아지고 늙더라도 선생님 묘소에 호태와 종수가 다니는 한은 꼭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제자를 두신 우리 선생님은 복이 많으신 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후배를 둔 나 역시 복이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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