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忍冬) 잎, 언제나 중기

2012. 3. 26. 18:29시우 수필집/개갈 안 나고 뜬금없는3(마지막 휴머니스트)

 

 

인동(忍冬) , 언제나 중기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近郊)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월동(越冬)하는

인동(忍冬) 잎의 빛깔이

 

                                                         -김춘수, 인동(忍冬)에서

 

 

 83년에 국문과 1학년으로 복학한 중기는 학번은 81학번이었지만 삼수를 하고 들어온 나이가 많은 친구였다. 내가 82년에 1학년에 복학하면서 괜히 무게를 잡았던 것처럼은 아니지만 중기도 83년에 1학년으로 복학하면서 83학번의 맏형이 되었다.

 처음 중기와 만난 것은 국문과 전체 MT를 가서였던 것 같은데 중기와 많이 친하게 된 것은 같이 울릉도에 답사를 가면서부터였다. 당시 답사는 전체가 가는 게 아니고 희망자만 갔는데 노강 선생님과 우리 선생님 두 분이 지도교수로 함께 가셨고 대학원생과 학부 학생을 합해서 스무 명이 넘었다. 이때 여학생들이 많았고 실제적인 일을 맡아서 한 사람이 나하고 중기였다. 1주일이나 되는 기간을 함께 먹고 자고 했으니 서로 많이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중기는 지방에선 명문으로 이름이 높은 이리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은 익산으로 지명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이리 남성고하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 볼 정도로 유명한 학교다. 우리 국문과 81학번 현진이, 82학번 재열이가 중기하고 동문이다. 남성고는 명문대 진학률이 높아서 유명한데 중기는 남성고를 나오고도 3수를 했으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놀리느라고 그 얘기를 하면 자기는 문학소년이라 다른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고 되받아친다.

 중기에게 고맙고 미안한 일은 선생님을 모시는 술자리가 있을 때면 선생님이 자리를 파할 때까지 같이 있다가 선생님이 일어나시면 중기가 선생님을 댁으로 모시고 갔던 일들이다. 선생님이 사시던 잠실 아파트와 내가 살던 집은 정반대 방향이어서 내가 모셔다가 드리고 가기는 너무 힘든 일이라 늘 중기에게 부탁했었다.

 

 나는 86년에 졸업하면서 바로 교직에 나갔고 중기는 87년에 졸업하면서 월간 낚시춘추에 입사했다.

지금도 그 잡지가 나오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중기가 입사하던 시기에는 우리나라에 낚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월간 낚시낚시 춘추가 꽤 인기가 있는 잡지였다. 중기는 그곳에서 기사를 쓰고 낚시 현장에 출장도 많이 다녔다. 현장에 가면 사진이 필수여서 중기는 펜탁스 MX사진기를 들고 다녔는데 내가 펜탁스 사진기를 주로 써서 그 얘기도 주고받았다.

 중기가 대학에 다닐 때에 만나던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할 적에 우리 선생님이 주례를 서주셨다. 홍릉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예식이 끝난 뒤에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2차를 갔던 걸로 기억을 한다. 중기가 발이 넓어서인지 결혼식에 조태일 선생님도 오셔서 중기 부부를 축하해주셨고 우리와 함께 술자리를 하셨다.

 

 내가 졸업하고 국문과를 떠난 뒤에 중기와 자주 만나게 된 것은 중기가 낚시 춘추에서 퇴사하고 김포공항의 직장으로 온 뒤부터다. 중기는 어느 날 낚시 춘추에서 나와 고등학교 친구가 운영하는 항공운송업체의 김포공항 책임자로 옮겨 앉으면서부터였다.

 중기가 김포공항으로 왔다고 전화를 했는데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만나서 얘기를 듣고야 상황 판단을 했고 그 뒤로는 자주 만났다. 중기는 성격이 소탈하고 붙임성도 있어서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는 편이라 좋았다. 지금은 흐지부지되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서양천지구에 있는 국문과 동문끼리 자리를 하는 모임이 있었다. 열두세 명이었는데 모임에 나오는 사람은 열 명 안팎이었고 그 자리에 내가 중기도 가끔 불러서 함께 했다.

 거기 나오는 사람들이 주로 70년대 후반기부터 80년대 초반기의 학번이라 자주 만나지는 않았어도 얼굴을 알고 있거나 한 사람 건너서 또 아는 사이고 해서 만나면 즐거운 자리가 되었다. 중기는 대학시절에 폭넓게 사람들을 만났고 어디를 가도 입담이 좋고 술도 잘 마셔서 어떤 자리에서도 환영을 받을 사람이다.

 

 90년대 중후반에는 내가 그쪽에서 큰소리를 칠 때라 스승의 날이 되면 우리 선생님을 모시고 거기 동신참치에서 행사를 하곤 했다. 그 자리에는 중기를 꼭 불러서 함께 했다. 그 시절에는 교육대학원에 다니는 그쪽 동문들이 여럿 있어서 선생님이 오신다고 하면 다 참석할 때였다.

 그 뒤로는 중기하고 단출하게 만나는 자리도 많았다. 우리 학교 바로 곁에 있는 등촌중학교에 있는 83학번 기윤이와 그쪽에서 좌장이신 70학번 인길이 형님과 넷이 하는 자리가 많았고 나와 같이 있는 81학번 운선이도 가끔 같이 했다. 그 전에는 내가 계산할 때가 많았지만 중기가 김포공항으로 온 뒤에는 늘 중기가 계산했다. 잘은 모르지만 소위 법인카드로 계산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쪽 모임이 좀 시들해지고 우리 선생님을 종로에서 모실 때에도 중기가 늘 함께 했다. 내가 미리 연락해서 기윤이와 중기는 항상 같이 나오고 그밖에 다른 친구들 서넛을 불러서 선생님을 대접하면 대부분 중기가 계산을 해주었다. 그게 늘 고맙고 미안해서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예전에 형이 다 했으니 이젠 내가 해도 된다.’고 했다.

 나는 국문과 사람 중에 만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주로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지만 중기가 만나는 사람들은 폭이 넓었다. 나는 중도 보수적인 편인데 중기는 상당한 진보적인 친구였다, 그럼에도 중기와 나는 만나는 일에 아무 갈등이 없어서 좋았다.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2007년 스승의 날에 종로3가 사조참치에서 중기, 기윤이와 함께 선생님을 모셨었다. 그날도 아주 기분 좋게 취했는데 선생님이 버스를 타고 가신다고 하니까 중기가 택시를 불러서 태워드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중기와 자주 만났다. 항상 내가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고 약속이 되면 인길이 형님과 기윤이에게 전화를 해서 같이 만났다. 중기는 두주불사에 안주도 가리지를 않아서 좋다. 술을 마시면 반드시 대리기사를 부르기 때문에 아주 부담이 없다. 술자리에 와서 운전 때문에 술을 못 마신다고 하거나, 조금만 마시고 차를 가지고 가겠다는 사람들을 보면 참 짜증이 나는데 중기는 그런 면에서 얘기할 것이 없었다.

 기윤이가 암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된 뒤에는 내가 가깝게 지내는 후배교사들과 같이 나갔다. 약속 시간이 되어 교문 앞에 나가 있으면 중기가 차를 가지고 와서 세 사람이든 네 사람이든 태우고 신정네거리 해천양꼬치에 가서 양꼬치를 많이 먹었다.

 어떤 때는 풍무동에 있는 횟집에 가서 마시고 내가 서울로 온 적도 두어 번이다. 춘식 선생이 잘 아는 횟집에 갱개미회를 부탁해 놓고 셋이 가서 마시고 나는 서울로 오는 거였다. 왜 거기까지 가서 마시냐고 묻지만 좋은 친구가 가자고 하면 마음 편히 가는 거였다.

 

 중기가 선생님 기일에 시안묘지에 왔던 적이 한 번 있다. 내가 자주 연락을 했더라면 더 많이 왔을 것인데 늘 연락을 하던 호태와 영희 선생에게만 하고는 중기는 까먹어서 그렇다. 그 한 번은 2014615일에 내가 중기와 순희에게 연락을 해서 순희흥술이 부부와, 중기, 호태, 종수가 왔고 나는 세근이가 함께 가줘서 시안 선생님 묘소에서 만난 거였다.

중기에게 연락을 했을 때에 선약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다고 얘기를 했는데 잠깐 들러서 참배하고 간다고 와줘서 많이 고마웠다. 이런 말을 하면 중기가 하는 말이, ‘형 선생님이나 내 선생님이나 같은 분아니냐고 되받는다. 그렇게 생각해주는 중기가 고마울 뿐이다.

 

 20201118일 수요일에 중기와 만났다.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만날 날을 잡지 못했는데 내가 학교를 그만 둘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얘기를 해서 자리를 만든 거였다. 학교 앞에서 영양사 세나, 상은 선생과 셋이 중기 차를 타고 해천양꼬치에 가서 먹고 마셨다. 작달막한 키에 목은 짧고 이제 머리가 하얀 중기를 보면서 38년의 세월을 볼 수 있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영원히 함께 할 친구라는 생각이다. 올 해는 선생님 기일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내년부터는 중기도 꼭 함께 할 거라고 생각한다.